영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와 발터 벤야민 (13)

 

  13. 꿈의 시체로 만든 별자리들 (3)

 

   
 

나는 성스러운 교향곡 속에
 잘못 끼어든 불협화음이 아닌가.
 (……) 나는 상처이며 칼!
 나는 따귀 때리기이자 뺨!
 나는 깔리는 팔다리이자 짓누르는 바퀴.
 또 사형수이자 사형집행관!

 나는 내 심장의 흡혈귀,
 영원한 웃음의 선고를 받고도
 미소 짓지도 못하는
 버림받은 중죄인!
 - 보들레르, 「자신을 벌하는 사람」 중에서(윤영애 옮김, 『악의 꽃』, 문학과지성사, 2003)

 
   
 

 
  가장 친한 친구에게 모든 것을 빼앗긴 채, 너무 일찍 삶을 향한 희망의 끈을 놓아버린 누들스. 그가 현실의 고통을 잊는 유일한 방책은 바로 마약이었다. 중국인이 경영하는 아편굴에서 환각에 빠져 있는 누들스는 자신을 끊임없이 학대함으로써 고통을 잊으려 한다. 맥스가 연방은행을 털자는 황당한 계획을 털어놓자, 광기 어린 맥스의 굳은 결심을 돌릴 수 없어 적어도 맥스의 죽음만은 막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금주법 위반 혐의로 맥스를 신고했던 그날 밤. 그날 예고 없이 갑자기 일어난 화재 사건 때문에 맥스가 죽었다고 믿으며 살아온 지난 삼십 년. 그 뼈아픈 죄책감이야말로 누들스의 끊임없는 자기학대의 원흉이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맥스의 치밀한 계략이었음을 알게 된 30년 후에도, 누들스의 마음은 편치 않다. 자신의 모든 것을 빼앗아 가고, 그것도 모자라 친구를 죽였다는 죄책감을 안고 평생을 괴로워하게 만들었던 맥스가 결코 행복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맥스는 정신질환으로 고통 받고 있었으며 자신이 죽인 자들의 망령 속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누들스에게, 고통으로 가득한 현실과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의 간극을 메우기 위한 유일한 도피처는 마약이 약속하는 환각이었다. 그 달콤한 환각 속에서만은, 누들스는 초라한 패배자가 아닐 수 있었기에. ‘자신을 학대하는 고통’과 ‘현실을 망각하는 쾌락’의 이중주 속에서 누들스는 자기모순적 쾌감을 느낀 것일까.   

 


   
  벤야민이 쓴 글들 중에는 자기가 꾼 꿈의 기록이 많은데, 당시 그는 또한 각종 마약으로 실험을 시도했다. 공업적 생산의 압력 하에서 사유나 사유의 대상, 즉 주체나 객체가 모두 경직되는데, 꿈의 기록과 마약에 의한 실험 모두 이처럼 경직화되고 겉 딱지가 앉는 상태를 타파하기 위한 시도였다. 꿈속에서뿐만 아니라 약물에 의한 도취를 통해서도 벤야민은 ‘특히 은밀한 친밀성들로 가득 찬 세계’가 열리는 것을 보았는데, 이 세계 속에서 사물들은 ‘극히 모순적인 방식으로 상호 결합해’ ‘온갖 형태의 친화성들’을 보여준다. 꿈과 도취는 자아가 아직도 사물들과 미메시즉어로 생동감 있게 교류할 수 있는 경험의 영역을 열어주는 것처럼 보였다.
 - 롤프 티데만, 『아케이드 프로젝트』의 편집자 서문(벤야민 지음, 조형준 옮김, 『아케이드 프로젝트』, 새물결, 2005, 54~55쪽.)
 
   



 
  그러나 누들스는 그가 그토록 찾고 싶었던 사랑과 이상을 마약을 통한 환각 속에서는 결코 찾지 못했다. 그의 꿈은 저 거짓말 같이 달콤한 약속, 아메리칸 드림보다도 훨씬 더 허황되다. 그가 꿈꾸던 세상 속에 머무를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마약의 환각 속에서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것이었다. 내가 결코 가질 수 없었던 꿈과 사랑과 우정은 그 환각 속에서만 생생한 현재이니까. 내 꿈을 비웃는 이 모든 냉혹한 현실을 아주 잠시나마 잊을 수 있는 공간 아닌 공간, 환각. 망각만이 누들스의 유일한 도피처이지만, 환각에서 깨어나는 순간 그는 또 다시 제자리다. 그는 아무 것도 잊을 수가 없다. 그는 평생 붙잡을 수 없는 꿈과 가질 수 없는 사랑과 이루어질 수 없는 우정만을 갈망했다. 

 

 

   
 

 종교적 계시를 진정으로, 그리고 창조적으로 극복하는 것은 마약으로는 절대 불가능하다. 진정한 극복은 세속의 계시에 있다. 즉, 유물론적이고 인간학적인 영감 속에 있는데, 해시시나 아편 그리고 그 밖의 다른 그와 비슷한 것들은 그저 그러한 영감의 예비단계를 이루는 것에 불과할 뿐이다.
 - 발터 벤야민, 조형준 옮김, 『아케이드 프로젝트』, 새물결, 2005, 5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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퐁퐁 2010-07-13 06: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진정한 극복은 세속의 계시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