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와 발터 벤야민 ⑩

 

  10. 멜랑콜리의 도시 (3) 

 

   
 

  산책자의 마지막 여행. 그것은 죽음으로의 여행이다.
 - 발터 벤야민

 
   
 


   그에게는 ‘현재’가 없다. 그에게는 ‘미래’ 또한 없다. 그에게는 오직 되돌아오는 과거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렇게 끊임없이 되돌아오는 과거야말로 그의 유일한 ‘현재’다. 문제는 ‘그의 과거’와 ‘사람들의 현재’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누들스는 해묵은 과거의 눈빛으로 사람들을 바라보지만, 사람들은 이미 각자의 생생한 현재 속에서 과거 따위는 잊고 살아간다. 그래서 노인이 된 누들스를 뜻하지 않게 재회한 옛 사람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길을 걷다 유령과 마주친 듯 놀란 표정이다. 누들스는 그가 자라난 도시에서 사실 이제 별로 ‘마주치고 싶지 않은’, 철지난 유령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에게는 여전히 생생한 ‘과거=현재’가 사람들에게는 묻어버리고 싶은 과거일 뿐이다. 그리하여 누들스는 세상에서 가장 낯익은 ‘고향’을 세상에서 가장 낯선 눈빛으로 바라보는 산책자가 되었다.    


   누들스의 우울한 시대착오. 그에게 과거는 노스탤지어의 대상이 아니라 ‘바로 지금 앓고 있는 우울증’의 대상이다. 누들스의 안타까운 시대착오적 성격은 그의 연애를 통해 가장 잘 나타난다. 누들스와 데보라는 서로에게 아련한 첫사랑의 설렘으로 남아 있지만 이들의 사랑에는 항상 ‘현재’가 없었다. 누들스는 ‘데보라’라는 이름의 지칠 줄 모르는 환상의 필름을 마음속에서 매일 재생하지만, 데보라는 사랑보다 성공을, 과거보다는 미래를 선택한다. 그가 평생 동안 부여잡을 아름다운 기억은, 평생 동안 안타깝게 그리워할 한 여인은, 그의 앞에서 달콤한 사랑의 기미를 보여주자마자 뒤돌아서버린다. 그에게 사랑은 시작되자마자 끝나는 비극이었다. 


   그러나 그가 잃은 것은 단지 어린 시절의 데보라가 아니다. 누군가를 조건 없이 사랑할 수 있는 능력, 기억에 매몰되지 않고 현재를 살아갈 수 있는 용기조차 그는 잃어버린다. 그는 오랜 시간 감옥이라 불리는 ‘세상 바깥’에 머물렀지만 데보라와 맥스는 언제나 ‘세상 속’에 있었다. 감옥에서도 오직 데보라가 패러디했던 <아가서>를 연구하며 어떻게 데보라에게 멋지게 사랑을 고백할 수 있을까 고민했던 누들스. 그는 멈춰진 시간 속에서 자아가 대상을 삼켜버림으로써 대상 그 자체가 되어버리는, 소위 자기애적 퇴행으로 치닫는다. 이런 식의 시대착오적 관계 맺기는 그의 절친한 벗이었던 맥스와의 관계에서도 반복된다.


   자본주의가 요구하는 가장 성공적인 인간형으로 성장한 맥스. 이제 그에게는 뒷골목 좀도둑 소년의 얼굴에서 풍겨 나오던 배고픔과 눈칫밥의 흔적이 사라졌다. 대신 친구를 배신하고 친구의 여자를 가로챈 자 특유의 비열한 눈빛, 자신의 누추한 과거를 모두 지우고 오직 화려한 현재만을 긍정하는 자의 뻔뻔한 눈빛이 남았다. 그런 맥스를 회한과 그리움이 뒤섞인 눈빛으로 바라보는 누들스 또한 한때 ‘같은 꿈’의 소유자였다. 두 사람은 각자 자본의 찬란한 빛과 자본의 음습한 어둠을 대변하는 존재이지만 두 사람 모두 으슥한 뒷골목 자본의 부산물이라는 점에서 ‘승리자’ 맥스 또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누들스 또한 단지 맥스의 협잡이 만들어낸 ‘희생자’에 그치지 않는다. 누들스 또한 맥스의 불법 행위를 ‘밀고’하려는 적극적 주체였다는 점에서 누들스 또한 뒤틀린 운명의 공범이다. 누들스와 맥스는 브루클린 거리의 어둠이 낳은 형제들이었다. 


   
 

  스스로의 환상에 의해 지배되는 세계, 그것이 바로 현대성이다.
 - 발터 벤야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