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타인의 삶>과 한나 아렌트 ⑭

 14. ‘what’을 넘어 ‘who’가 되는 법 (1)
 

   
  근대에 무세계성(worldlessness)이 증가한 것, 즉 우리 ‘사이에’ 있는 모든 것이 소멸한 것은 사막의 확산으로도 묘사할 수 있다. (……) 우리가 사막의 조건에서 고통받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우리는 아직도 인간적이며 여전히 본래적이다. 위험한 것은 사막의 진정한 거주자가 되어 거기에 익숙해지는 일이다.
 - 한나 아렌트, 제롬 콘 편집, 김선욱 옮김, <정치의 약속>, 푸른숲, 2007, 246~247쪽.
 
   




   만신창이가 된 영혼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온 크리스타. 그녀는 씻을 수 없는 죄를 억지로 씻어내는 몸짓으로, 남편과는 눈도 마주치지 못한 채 샤워실에서 목욕을 한다. 말없이 이틀 동안 외박을 하고도 변명조차 하지 않는 아내를 향해, 드라이만은 대화를 시도하지만 크리스타는 절망적인 몸짓으로 자신의 몸을 씻어낼 뿐이다. 그들이 서로를 향한 소통의 주파수를 찾지 못하고 있는 동안, 안보부 요원들이 또다시 들이닥친다. 그들은 이미 드라이만이 타자기를 숨긴 곳을 알고 있는 것이다. 크리스타의 얼굴은 공포로 얼어붙는다. 이제 모든 것이 밝혀질 것이다. 내가 남편을 밀고했다는 것, 내가 내 삶의 마지막 자존심을 팔아버렸다는 것, 이제 더 이상 사랑하는 이의 눈을 똑바로 바라볼 수 없다는 것.  

 



   안보부 요원들은 마침내 마룻바닥을 뜯어낸다. 이제 모든 것이 밝혀지는 순간. 허둥지둥 목욕을 마친 후, 샤워가운만 입은 채 겁먹은 표정으로 남편을 바라보는 크리스타. 아내의 배신을 직감한 남편은 충격을 감당하지 못한다. ‘당신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라는 무언의 항변을 그대로 담아 아내를 쏘아보는 드라이만. 크리스타가 지금까지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었던, 완전한 증오의 시선. 남편의 눈에 담긴 경멸과 저주의 뉘앙스를 한눈에 알아차린 크리스타는 샤워가운만 입은 채로 무작정 도망치기 시작한다. 그녀는 이미 제정신이 아니다.  

 



   드라이만의 집 근처에 있었던 비즐러는, 산발을 한 채 맨발로 뛰쳐나오는 크리스타의 모습을 발견한다. 완전히 이성을 잃은 크리스타는 차도로 뛰어나오다가 마침 달려오던 트럭에 치이고 만다. 그 순간, 드라이만의 집안에서 마룻바닥을 뜯어낸 안보부 요원들은 아연실색한다. 크리스타가 분명히 거기 있다고 진술했던 타자기가 그 자리에 없었던 것이다. 비즐러는 크리스타를 위해, 드라이만을 위해, 그들이 사랑했던 예술과 자유를 위해,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의 잃어버린 시간을 위해, 타자기를 이미 다른 곳으로 옮겨놓았던 것이다.     

    



   비즐러는 안보부가 드라이만의 집을 수색하기 직전에 자신의 인생 전체를 바꿔놓는 커다란 결단을 내린 것이다. 비즐러는 ‘안보부 요원으로서의 정체성’과 ‘예술을 사랑하는 한 인간으로서의 정체성’ 사이에서 존재의 분열을 경험했고, 마침내 후자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그는 자신이 평생 동안 외면해왔던 또 다른 세상의 아름다움에 매혹된 것일까. 아렌트 식으로 말하면 그는 ‘무엇(what)’을 넘어 ‘누구(who)’의 세계로 이전한 셈이다. ‘무엇(what)’으로 규정되는 존재는 성별, 국적, 직업, 주소 등의 외적 역할로 규정되는 인간의 정체성이다. 이러한 객관적 속성이나 사회적 지위로 인간을 묘사할 때, 사람들은 타인과 ‘공약 가능한 위상’에 놓이게 된다. 즉 공무원 A는 공무원 B로 언제든 대체될 수 있는 것이다. 이를 ‘표상의 공간’이라 한다.

   반면 ‘누구(who)’로 규정되는 존재는 공약 불가능하고, 대체 불가능하며, 환원 불가능한 존재의 유일무이성을 인정받는다. 조직 내에서 똑같은 업무를 똑같은 완성도로 처리할 수 있는 타인이 나타나도, 유전자배열이 완전히 동일한 쌍둥이가 나타나도, 지금 여기에 있는 비즐러 한 사람을 대체할 수 없는 세계. 이것이 바로 ‘현상의 세계’다. 서로를 ‘무엇’으로 처우하는 공간이 ‘표상의 공간’이라면, 서로를 ‘누구’로 처우하는 공간이 바로 ‘현상의 공간’이다. 비즐러는 마침내 언제든 대체 가능한 ‘무엇’의 존재에서, 누구로도 교환할 수 없는 ‘누구’의 존재로 비약한 것이다.  

 

 

   
 

   ‘누구’는 ‘무엇’과는 다르게 공약(共約) 가능하지 않다. 그것은 내가 자신의 것으로 할 수 없는 것이고, 또 타인에게도 귀결시킬 수 없는 것이다. ‘현상의 공간’은 내가 소유할 수 없는 것, 우리가 공유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관심에 의해 성립된다. (……)타자의 현상에 흥미를 갖는 것은 우리가 그 타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타자의 삶을 살 수 없기 때문에 타자의 행위와 말을 보고 들으려고 하는 관심을 가지는 것이다. ‘현상의 공간’을 성립시키는 것은, 타자의 ‘세계’의 한 자락이 드러나는 것, 그러한 세계개시(世界開示)에의 욕구이다. ‘현상의 공간’에서 우리는 완전하게 비대칭적인 위치에 있다. (이 경우의 비대칭성은 누구도 결코 타자의 위치를 차지할 수 없고 위치 교환이 불가능하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그 사람의 ‘세계’는 그 사람 자신에 의해 보여질 수밖에 없다. 공공성의 이러한 차원에서는 우리가 그 사람의 ‘세계’를 표상(represent)하는 것이 불가능하므로 그 사람을 대리=대표(represent)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 사이토 준이치 지음, 윤대석/류수연/윤미란 옮김, <민주적 공공성>, 이음, 2009, 64~6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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