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타인의 삶>과 한나 아렌트 ⑪

   11. ‘사이’에 존재하는 법 (1)



   
    독일민주공화국은 1977년 이후로 자살자의 통계를 내지 않고 있다.
 스스로 죽음에 이른 사람들, 그들은 피 흘리지 않는, 열정이 없는 삶을 참지 못했다.
 죽음만이 그들에게 유일한 희망이었다.
 9년 전, 자살통계를 중단한 후, 유럽에서 동독보다 사망률이 높은 나라는 단 하나, 헝가리이다. (……) 오늘 내가 쓰려는 것은 얼마 전 자살한 위대한 극작가 예르스카에 대한 것이다.
 - 영화 <타인의 삶> 중에서, 드라이만의 독백
 
   




   

   이제 비즐러가 사용하던 ‘도청용 헤드폰’에서는 단지 ‘감시당하는 자의 신상정보’를 넘어서서, 그 이상의 것들이 들리기 시작한다. 자살한 예술가 예르스카가 선물한 악보를 피아노로 직접 연주하는 드라이만. 드라이만이 연주하는 <선한 사람들을 위한 소나타>는 비즐러가 완전히 잊고 있었던, 그의 마음속에는 도저히 살아남을 수 없을 것만 같던 ‘선한 사람’을 이끌어낸다. 그 순간 도청용 헤드폰은 얼어붙은 한 남자의 감수성을 일깨워 사랑의 음악을 연주하는 훌륭한 악기가 된다. 비즐러는 자신의 진정한 결핍이 어디서 우러나오는가를 깨닫는다. 그는 이제 스스로 인정할 수밖에 없다. 나는 누구에게도 정치적 필요 이상으로, 긍정되고 배려되고 응답받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그는 국가권력의 충직한 하인으로 인정받지만 그 어떤 ‘친밀권’에도 편입되지 못한다. 드라이만과 크리스타는 타인에게 영향을 미치고 타인을 배려하며 타인을 존중하고 이해하는 것에서 자신의 삶의 의미를 찾는다. 타인을 사랑하고 타인에게 사랑받는 행위 속에서 그들의 예술적 영감이 잉태되는 것임을, 비즐러는 이제야 깨닫는다.  



   비즐러의 질투는 단지 아름다운 여성 크리스타를 향한 욕망이 아니라 한 예술가를 향한 경의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드라이만을 향한 비즐러의 질투는 자신의 마음속 깊이 숨겨져 있던 ‘선함’과 예술적 감수성을 일깨워주는 존재에 대한 순수한 동경에서 비롯한다. 단지 크리스타의 미모와 연기력에서 나오는 빛이 아니라 드라이만의 사랑과 드라이만의 예술 작품에서 함께 우러나오는, 두 남녀의 사랑이 빚어내는 예술작품들. 그것이야말로 비즐러가 동경하던, 비즐러가 버린 세상 너머에 있던 잃어버린 감수성의 진원지였다. 국가보안부는 아름다움을 느끼고, 아름다움에 감사하고, 아름다움에 감탄하는 한 인간의 마음마저 길들일 수는 없었던 것이다.   


 

    
   드라이만과 크리스타의 사랑은 비즐러의 도청과 국가안보부의 감시로도 파괴되지 않았다. 비즐러는 역설적으로 그들 내부의 훼손 불가능한 아름다움을 일깨웠고 그들은 오히려 예전보다 더 열렬하게, 낭만적 사랑의 열정을 넘어서 더욱 깊은 영혼의 연대감을 느끼게 된다. 비즐러는 이들의 사랑에서 국가도, 법률도, 도청도 파괴할 수 없는 무언의 힘을 감지한다. 이 아름다운 사랑은 드디어 예술가 드라이만에게 창조적 영감의 원천이 된다. 그는 ‘바깥세상’을 향해, 위대한 예술가 예르스카의 ‘자살을 위장한 사회적 타살’의 의미를 알리기로 결심한 것이다. 예술가의 자유를 억압하는 사회와의 목숨을 건 투쟁이, 이제 드라이만의 새로운 예술작품 그 자체가 되기 시작한다. 
 

 

   
 

    완전한 침묵과 수동성에서만 인격은 은폐될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의 성질을 소유하고 처분하는 방식으로 인격을 소유하고 처분할 수는 없는 것처럼, 인격의 현시는 의도적으로 할 수 없다. 반대로 타인에게 분명하고 착오 없이 나타나는 인격이 자신에게는 은폐되기 쉽다. 이것은 마치 한 사람을 일생동안 동행하는 그리스 종교의 다이몬처럼 뒤에서 어깨너머로 바라보기 때문에 각자가 조우하는 사람들만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 한나 아렌트, <인간의 조건>, 한길사, 1996, 2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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