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사랑 후에 남겨진 것들>과 지그문트 프로이트  ⑪

   11.  그림자의 춤 : 나를 벗어 너를 입다 (1)

 

   
   인간은 수천 년 동안 자신의 죽음과, 그 죽음의 국면을 지배하는 주권자로 존재했다. 인간은 오늘날 그런 존재의 모습을 중단했다. (……) 오늘날에는 자신의 죽음이 가까워졌다고 생각하거나 생각해야 할 개념도, 죽음의 순간이 지니고 있던 공적인 장엄한 성격도, 어느 것 하나 남아 있지 않다. (……) 당연히 가족들과 의사의 첫번째 임무는, 죽음을 면할 길 없는 환자에게 용태의 위중함을 은폐하는 것이었다. 환자는 자신의 죽음이 가까워졌다는 사실을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결코 더 이상 알아서는 안 되었다. 새로운 관습은 그가 자신의 죽음을 모르는 상태에서 죽는 것을 요구했다. (……) “나는 적어도 그가 결코 죽음을 느끼지 않았다는 것에 위안을 받는다”라는 한 남편이나 한 친척의 말을, 우리는 얼마나 많이 들어왔는가?
 - 필립 아리에스, 이종민 옮김, <죽음의 역사>, 동문선, 1998, 196~201쪽. 
 
   


 

   첨단의학이 발달하여 죽음의 주권을 ‘의학’이 쟁탈하기 이전. 전근대사회의 사람들은 지금보다 훨씬 일찍 죽거나 ‘사소한’ 질병으로 죽곤 했지만 자신의 죽음을 명확히 감지하여 죽음의 의식을 스스로 연출하는 주인공이기도 했다. 많은 친지들의 마지막 배웅 속에 자신의 못다 한 말을 차례대로 남기고, 자신이 믿는 종교적 의례의 든든한 비호 속에 죽어가는 수많은 영화 속 주인공들을 우리는 보았다. 필립 아리에스의 말에 따르면 근대인의 죽음은 개인의 주체적 체험이라기보다는 ‘진료의 중단’을 통해 획득되는 ‘기술적 현상’이 되었다. ‘고통 없이 죽는 것, 혹은 잠자면서 죽는 것’은 죽음의 이상형이 되었고 우리는 죽음과 독대하는 ‘바로 그 순간’을 꺼리는 문화 속에서 살게 되었다. 

 

   박탈당한 죽음의 주권. 그것은 특히 불치병을 선고받은 환자에게 더욱 치명적인 고통으로 나타난다. 전근대사회에서 죽는 사람도 물론 철저히 혼자였지만 그는 다른 사람들의 듬직한 배웅 속에 이승을 떠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많은 사람들은 ‘혼자’ 죽는다. 오래 앓던 노인들은 가족의 배웅이 아니라 전문 호스피스의 간병 속에서 죽어간다. 의학의 도움조차 제대로 받지 못하는 독거노인들의 죽음은 말할 것도 없다. 철저히 혼자라는 느낌 속에 죽어가는 것은 죽음이 임박했다는 느낌보다 더욱 큰 고통이 아닐까. 죽음의 감지자도 죽는 자 스스로가 아니라 죽음을 선고하는 의사일 경우가 많다. 병을 앓던 이들은 병원의 감시 하에 ‘사망선고’를 받아야 죽음을 ‘인정’받는다. 죽음의 시점을 결정하는 권력은 의료기관에 있고 죽음의 뒤처리는 상조 회사들이 도맡게 되었으며 남겨진 자의 슬픔은 지나치게 간소화된, ‘촌스럽고 감정적인’ 애도를 배제한 절제된 격식에 가둬진다. 

 


   아내 트루디의 본심은 아니었지만, 루디 또한 자신의 임박한 죽음을 알지 못하기에 죽음의 주권을 본의 아니게 박탈당한다. 그는 점점 쇠약해지는 자신의 몸을 느끼며 남은 시간이 많지 않음을 직감한다. 공원에서 부토를 추는 17살 소녀 ‘유’와의 만남은 그가 이 많지 않은 시간을 가장 행복하게 보낼 수 있도록 인도하는 안내자가 된다. ‘유’에게 자연스럽게 부토를 배우면서 루디는 태어나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몸의 자유’를 느끼게 된다. 팔다리를 오직 노동과 일상생활에만 사용해왔던 루디에게 ‘춤’이란 상상하기 힘든 유희였다.

   그러나 부토를 추는 일본 소녀 ‘유’와 서툰 영어로 대화를 나누며 루디는 처음으로 자신의 새로운 신체 사용법을 익히게 된다. 끊임없는 노동으로 소모되는 피로와 권태에 찌든 신체가 아니라 춤을 추며 해방되는 신체의 기쁨을 배우게 된다. 그는 부토를 배우면서 조금씩 죽은 아내의 못다 한 꿈에 다가가는 느낌을 받는다. 그녀의 꿈을 향한 미메시스, 그녀의 못다 한 꿈에 빙의되기. 애도는 어쩌면 떠나간 이의 부재로 인해 황폐화된 ‘나의 삶’을 되살리는 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떠난 자의 못다 한 삶’을 뒤늦게나마 다시 살아내는 부활의 제의가 아닐까.

 



  : (자신의 춤사위를 보여주며 루디가 그녀의 실물이 아니라 그림자를 보도록 유도한다) 부토는 그림자의 춤이에요. 내가 아니라 그림자가 추는 거예요. 보세요. (루디에게 가벼운 춤동작을 가르쳐준다.) 이렇게 할아버지 그림자가 춤춰요. 난 그림자가 누군지 몰라요. (분홍색 수화기를 귀에 대며) 여보세요! 누구세요? 대답이 없네요. (뻣뻣한 루디의 몸이 부드럽게 움직일 수 있도록 루디의 팔을 잡고 함께 움직여주며) 누구든 부토를 출 수 있어요.
 루디 : (한 번도 춤을 춘 적 없는 듯 난감한 몸치의 표정으로) 난 안 돼.  
  : (천진하게 웃으며) 아뇨, 돼요, 누구든 돼요. 다들 그림자가 있잖아요. 젊은이와 늙은이, 여자와 남자……. 다들 살아 있으면서 다들 죽어 있어요……. 동시에요.



   
 

 상실한 대상을 그녀/그 자신에 옮겨놓고 간직하는 우울증 환자처럼, 에고는 상실한 대상을 투사하고 간직한다. 프로이트는 ‘잃어버린 대상은 에고 안에서 다시 자리를 잡는다. 즉 대상 리비도 집중은 동일시로 대체된다’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에고는 그것이 포기해야만 했던 모든 욕망의 저장소이다. 또한 프로이트가 말하듯 ‘에고의 특징은 그것이 포기된 대상 리비도 집중들의 침전물이며 그러한 대상-선택들의 역사를 담고 있다’.
 - 사라 살리, 김정경 옮김, <주디스 버틀러의 철학과 우울>, 앨피, 2007, 99~10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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뷰러 2010-04-08 1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사실 이 영화를 통해 부토를 처음 봤어요. 서늘하기도 하면서 둔중한 그 느낌. 자꾸 눈에 아른거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