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사랑 후에 남겨진 것들>과 지그문트 프로이트  ⑩

   10. 이승에 실현된 저승의 그림자 (3)





 루디 : (인사불성으로 취해 아버지에게 대드는 아들에게) 언제 이렇게까지 마셨니?
  : 다들 항상 아빨 챙겨야 하고, 아빤 항상 주인공이셔야 하죠. 엄만 항상 말씀하셨죠. 네 아빨 생각해! 불쌍한 네 아빠! 아빨 좀 가만 두렴! 피곤하셔! 너무 열심히 일해서 사무실 뜨기도 힘드셔!
 루디 : 됐다. 그만해라.
  : 아버진 평생 그렇게 일에 숨어 지내셨죠! 진짜 엄마를 알지도 못하고! 아빤 엄마를 몰랐어요! 바보 같은 아빠. 나가요! 쓰레기차에나 가요! 거기 소속이잖아요. 재활용도 잊지 말구요!
 



   난니 모레티 감독의 영화 <아들의 방>은 불의의 사고로 아들을 잃은 가족들이 겪는 슬픔을 그려낸다. 부부 금슬도 더없이 좋았고 그들 사이에 태어난 남매도 더없이 사랑스러웠던 이 가족은 아들이 죽은 후로 급격히 붕괴되어 간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사고사’임이 분명하지만 부모의 마음속에서는 모든 것이 자기 탓처럼 느껴진다. 스스로를 자책감으로 학대하는 부부는 점점 서로에게서 멀어지고, 오빠가 죽은 후 자신을 돌보지 않는 부모에 대한 원망이 쌓여가는 딸은 점점 외로워진다. 이렇게 남겨진 사람들은 서로를 할퀴며 괴로워한다. 떠나간 자를 되살릴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그 상실감을 서로에 대한 무의식적인 공격으로 표현한다. 그들이 아들의 죽음을 진정으로 받아들이고 서로에 대한 사랑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오랜 애도의 시간이 필요했다. 최선을 다해 사랑했기에 최선을 다해 아플 수 있었고, 또다시 새로운 최선으로 서로를 사랑할 수 있었다. 

 


   영화 <사랑 후에 남겨진 것들>의 가족들에게는 ‘회복’할만한 사랑이 별로 남아 있지 않았다. 아버지는 평생 가족을 위해 헌신했지만 아이들은 아버지에게 자상함이나 친밀감을 발견할 수 없었고, 어머니의 예술적 기질을 아버지가 가로막은 것이라고만 생각할 뿐이다. 가족 중 누군가가 떠난 후 슬픔을 이겨내는 데 가장 큰 도움이 되는 것은 가장 가까운 가족일 때가 많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닮은 상처를 지닌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랑 후에 남겨진 것들>에서는 가족이 그 슬픔을 더욱 극대화시킨다. 막내아들 칼은 항상 바쁘다는 핑계로 아버지를 혼자 두고, 그러다가 아버지가 행방불명될 뻔하자 아버지에게 이름표와 전화번호를 달아주어 졸지에 아버지를 금치산자로 만들어버린다. 자신의 이름과 아들의 전화번호가 적힌 커다란 이름표를 목에 건 루디는 영영 길을 잃은 미아처럼 서글픈 얼굴이다.




   칼은 아버지를 더 이상 맡아주기 힘들다는 사연을 전하기 위해 누나인 카롤린에게 전화를 건다. “날 미치게 하셔. 종일 주변에 앉아만 계시고. 나도 어쩔 줄 모르겠어. 시내에 볼만한 건 벌써 다 보셨어. 매일 어떻게 이벤트를 생각해내? 시간도 없는데. 할 말은 아니지만, 정말 거치적거리셔. 이상하시고. 아빠가 현금을 몽땅 다 가져 오신 거 알아? 엄마 옷도 가져오셨어. 그래, 진짜. 치료가 필요하신 것 같아. 못 견디시겠나봐. 나도 못 견디겠어. 누나가 좀 맡아줘.” 루디는 그저 홀로 아내를 그리워했을 뿐인데 그것조차 자식들에게 부담만 된다는 것을 알자 고통스럽다. 그는 자신의 몸에 찾아온 이상 징후를 느끼며 아들에게 간곡히 부탁한다. 조금만 더 머물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어느 날 혼자 공원을 산책하던 루디는 벚꽃이 흐드러진 연못 건너편으로 가녀린 소녀가 하늘하늘 춤을 추는 모습을 발견한다. 루디의 눈에서는 반가움과 그리움이 일렁인다. 바로 저것이다! 그녀가 추는 춤은 바로 부토였다. 평소의 루디였다면 그저 부랑자 소녀의 안쓰러운 구걸 행각으로밖에 비치지 않았을 것이다. 그토록 괴상하고 과격해 보였던 부토가 저렇게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것이었구나. 루디의 눈길은 사랑스러운 소녀의 춤사위에서 떨어지지 못한다. 마침내 루디는 아내 트루디가 사랑했던 것을, 그가 ‘과격하고 당혹스럽다’고 생각했던 부토를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아내와 교신하는 가장 멋진 방법임을 알게 된다. 나도 저 소녀처럼 춤추고 싶다. 내 아내가 사랑했던 바로 그 춤을. 당신의 육체를 이곳에서 찾을 수 없을지라도 당신의 목마른 흔적을 내가 언제든 재생할 수 있다면.


 


 

   
 

   애도란 타자의 상실을 슬퍼하는 지속적 행위를 일컫는다. 이것이 가능하기 위한 전제조건은 더 이상 과거에 집착하지 않은 채 그것을 기리고 겸허하게 성찰하는 것이다. 프로이트가 애도작업을 기억 구성의 규범으로 제시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우리가 타자의 상실을 돌이킬 수 없는 것으로 인정하지 않는 한 우리는 진정으로 타자를 애도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슬픔을 느끼는 것은 소중한 그것의 상실이 다른 무엇으로 대체될 수 없기 때문이다. 프로이트가 지적했듯이 우리가 나르시시즘적 ‘동일화’라는 퇴행적 심리에 빠져 소중한 그것이 아직도 내 곁에 있다고 믿는 한 우리는 결코 애도를 행할 수 있는 처지가 되지 못한다. (……) 애도란 상실된 과거에 대한 비판과 계몽을 슬픔과 연민의 감정에 결합시키는 의식적인 작업이다. 오직 이를 통해서만 상실되어버린 그것은 계속적으로 우리 안에 살아 있게 된다.
 - 전진성, <어떻게 부담스런 과거와 대면할 수 있는가>, 독일연구 제6호, 2003, 15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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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lly 2010-04-07 1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아들의방과 한 핏줄 영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