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이승에 실현된 저승의 그림자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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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풍부한 겉치레는 오늘날 후퇴했고, 그래서 죽음은 뭐라고 이름 붙일 수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 기술적인 측면에서 우리는 죽을 수 있으며, 불행으로부터 가족을 지키기 위해 우리는 생명보험을 신뢰한다. 그러나 진실로 우리들 자신의 심층부에서 우리는 죽지 않는다는 것을 느낀다.
- 필립 아리에스, 이종민 옮김, <죽음의 역사>, 동문선, 1998, 86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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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자체만큼이나 죽음에 소비되는 비용을 걱정하는 각종 준비들에 현대인은 익숙해졌다. 크고 작은 모든 죽음의 징후에 노심초사하게 만드는 건강보험, 죽음 이후의 각종 의례를 준비하는 상조 회사들, 죽음 이후 남겨진 이들의 불안까지 걱정하는 생명보험, 오랜 시간이 지난 후까지 죽음을 아름답게 회상하기 위한 메모리얼 파크까지. 죽음에 관한 각종 형식은 끊임없이 세련되고 우아해지지만, 죽음에 대한 공포는 더욱 격화되었고, 죽음을 둘러싼 고통은 더욱 타자화되었다. 죽음 관련 산업이 세련되어갈수록 우리는 죽음의 본질에서 멀어지는 것 같다.
루디는 가지고 있는 현금과 아내의 유품을 모두 챙겨 일본으로 왔다. 아내의 꿈의 화살표가 향하던 장소로 오면, 아내와 좀더 가까워질 수 있을까. 그러나 아내가 그토록 오고 싶어 했던 일본에 와서도 막상 어떻게 아내를 잃은 상실감을 극복해야 할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는 점점 ‘아내라면 어떻게 했을까’를 생각하기 시작한다. 아내라면 일본에 와서 막내아들 칼에게 맛있는 도시락을 싸주지 않았을까 싶어 ‘아내의 레시피’로 생애 최초의 요리도 해보고, 아내가 원했던 벚꽃놀이를 보러 가기 위해 칼과 함께 단체관광을 떠나기도 한다. 그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아내처럼 생각하고 아내처럼 행동하기’를 실천한다. 그러나 그가 알고 있는 아내의 습관과 아내의 정보를 모두 동원해 봐도,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는 고통을 안고 죽어간 아내의 마음에 가닿을 수 없는 것만 같다. 그래서 그는 더욱 더 고독해진다. 떠나간 자의 고독에 가닿을 수 없음을 알기에, 남겨진 자의 고독은 더욱 심화된다.
루디는 아내의 삶을 단지 모방하는 것만으로는 도저히 아내의 꿈을 되살릴 수 없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마침내 혼자만의 내면의 예식, 애도의 제의를 시작한다. 전형적인 이성애자이며 평생 모범적으로 근속한 모범 공무원이며 아주 사소한 변화조차 싫어하는 보수적 인물인 그가, 아내의 스웨터를 걸치고 치마를 두르고 목걸이까지 장착한 채 드디어 ‘진정한’ 벚꽃놀이를 시작한다. 주위를 돌아보고 아무도 자신에게 눈길을 주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는, 비로소 코트 안에 숨겨진 아내의 옷을 드러내 보이며 거리 가득 흐드러진 아름다운 벚꽃의 향연을 보여준다. 그의 몸 위에 입혀진 아내의 영혼이 저 아름다운 벚꽃을 실컷 감상할 수 있도록. 비로소 루디에게는 진정한 혼자만의 애도가 시작된 것이다. 세상에 단 한 사람, 루디 앙게마이어만이 해낼 수 있는 아내 트루디를 위한 애도가.
비로소 루디는 아내와 교신하는 작은 소통의 출구를 찾은 것이다. 프로이트는 이러한 과정을 기입 혹은 통합(incorporation)이라고 불렀다. 이것은 잃어버린 대상을 자신의 삶 안에 기입하는 행위다. 떠나간 이의 ‘죽음’을 남겨진 자의 ‘삶’ 속에서 다시 새롭게 시작하게 만드는 것. 프로이트가 말한 ‘통합’은 잃어버린 대상이 남겨진 자의 육체에 보존되는 과정이다. 죽어간 그녀의 습관과 성향 하나하나를 자신의 몸속에 이식하는 루디의 눈에서는 그제야 전에 없던 활기가 피어나기 시작한다. 비로소 아내의 영혼과 교신할 수 있는 내면의 주파수를 찾아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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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심리학자들이 그렇게 오랜 세월동안 연구했음에도 불구하고 애도의 대상을 처음으로 강조한 사람이 바로 프로이트였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은가? (……) 슬픔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드는 주체는 자신이 대상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 인간의 모든 경험에서 참을 수 없는 면은 자신이 직접 경험하지 못하는 자신의 죽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죽음이다.
- 자크 라캉 지음, 권택영 엮음, <욕망 이론>, 문예출판사, 1996, 166~1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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