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사랑 후에 남겨진 것들>과 지그문트 프로이트 ⑧

   8. 이승에 실현된 저승의 그림자 (1)

 칼 : (어머니가 평생 와보고 싶어 하시던 도쿄에,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야 찾아온 아버지를 바라보며) 왜 두 분이서 한 번도 안 와보셨어요?
루디 : 시간이 있을 줄 알았지……. 네 엄마에게 가장 소중한 걸 내가 빼앗았어. 죽은 사람에겐 해줄 수 있는 게 없으니…….  






   죽은 자가 떠난 후 남겨진 사람들에게는 해야 할 일이 정말 많다. 그가 미처 완성하지 못한 각종 업무와 부채관계 정리, 유언의 집행, 장례 관련 업무들……. 그 수많은 죽음의 공식 절차가 끝나고 나면 마지막으로 남겨진 사람들의 마음을 할퀴는 가장 아픈 절차가 남아 있다. 바로 떠나간 사람의 유품을 정리하는 것이다. 바로 이 대목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애도의 절차가 시작된다. 사회적으로 구성된 장례 절차보다 더욱 참혹한 것은 바로 남겨진 사람들 각자의 내면에서 이제야 시작될 기나긴 애도의 과정이다.   



 



    아직 자신에게 임박한 죽음을 알지 못하는 루디는 납득할 수 없는 아내의 죽음 앞에서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아내 트루디는 어쩌면 남편이 죽은 후에 낱낱이 거쳐야 할 고통스러운 애도의 의식을 홀로 마음속으로만 치러내다가 슬픔에 지쳐 세상을 떠났을지도 모른다. 수십 년 동안 아내와 살아왔던 정든 집이 한없이 낯설고 아득해지는 이 순간. 아내가 없는 이 집에서, 어느 구석 하나하나 아내의 손길과 아내의 추억이 묻어나지 않는 곳이 없는 이 집에서 루디는 아내의 유품을 정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아무것도 버릴 수 없는 그는 차라리 모든 것을 껴안고 살아가고 싶다. 아니, 정말 살아갈 수 있을까.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다. 아내가 없는 매순간이 벼랑 끝을 내딛는 듯 두렵기만 하다.   




 


   루디는 부질없이 어디에도 없는 아내의 이름을 부르며, 작은 집안에서도 마치 머나먼 풍경을 바라보는 듯한 멍한 눈길로 하루하루를 보낸다. 아직 아내의 냄새가 희미하게 남아 있는 잠옷을 꺼내 침대 위에 깔아 놓기라도 해야 그나마 선잠에라도 들 수 있다. 아내를 보낼 수도 아내를 품을 수도 없는 이 집에서는 도저히 홀로 버틸 수 없음을 알게 된 루디. 그는 비로소 아내와 조금이라도 가까이 있을 수 있는 곳으로 떠나보기로 한다. 평생 쳇바퀴 돌 듯 집과 직장만을 오가던 루디가 드디어 고향을 떠나기로 한 것이다. 아내가 가장 가고 싶어 했던 곳, 일본으로. 아내 트루디가 평생 보고 싶어 했던 도쿄의 벚꽃과 후지산의 절경이 있는 곳, 그리고 아내의 꿈이었던 현대 무용 부토의 본고장, 일본. 아내의 꿈이 닿지 못한 곳, 그곳으로 가자. 베를린에서도 길 잃은 아이처럼 헤매던 시골 노인 루디는 막상 베를린보다 더욱 낯선 일본에 도착하자 어쩔 줄을 모른다. 막내 칼은 일이 바쁘다는 핑계를 대며 아버지를 거의 혼자 방치해둔다.



   루디는 떠나간 아내의 손길을 그리워하며 도쿄의 밤거리를 헤매지만 아내를 닮은 그 어떤 대체품도 찾지 못한다. 도쿄에는 돈을 받고 거품목욕을 시켜주는 곳도 있지만 낯선 여인들의 친절한 손길은 떠나간 아내를 다시는 되찾을 수 없다는 현실을 더욱 쓰라리게 환기시키고 만다. 자신의 벌거벗은 등을 열심히 밀어주는 여인들 앞에서 아이처럼 엉엉 울며 뛰쳐나온 루디는 기어이 길을 잃어버리고, 그날 밤 거대한 도쿄의 밤거리에서 노숙을 하고 만다.

   다음날 아침 간신히 아버지를 찾아낸 아들은 아버지의 뼈아픈 외로움을 알아보진 못하고 그저 아버지의 어두운 길눈을 탓하며 늙은 아버지를 타박한다. “도대체 어디 계셨어요? 미쳤어요? 얼마나 걱정했는데요. 영원히 못 찾는 줄 알았어요. 여기가 얼마나 큰 도시인지 아세요? 깜빡하다가는 길 잃어요.” 아들은 결코 모른다. 어머니가 없는 한 아버지는 영영 길을 잃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미 철저히 길을 잃은 아버지에게 실종자가 되고 안 되고는 그리 커다란 차이가 아니라는 것을.  

 



   
 

 많은 심리학자들이 그렇게 오랜 세월동안 연구했음에도 불구하고 애도의 대상을 처음으로 강조한 사람이 바로 프로이트였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은가? (……) 슬픔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드는 주체는 자신이 대상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 인간의 모든 경험에서 참을 수 없는 면은 자신이 직접 경험하지 못하는 자신의 죽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죽음이다.
  - 자크 라캉 지음, 권택영 엮음, <욕망 이론>, 문예출판사, 1996, 166~1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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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사람 2010-04-03 16: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죽은 부인의 숨결을 조금이라도 느껴보려고 침대 위에 부인의 옷을 펼쳐놓는 장면....너무 막막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