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그래도 삶은 계속되는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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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슬픔 때문에 화석이 되었다.
- 오비디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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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루디는 남편과 마지막 여행을 떠나며 마음속으로 혹독한 이별의 예식을 치러낸다. 그녀는 아름다운 발틱 해변에서 남편과 거닐며 깨달았을 것이다. 당신과 모든 것을 함께 나눠왔지만 유일하게 나눌 수 없는 것은 바로 당신의 죽음이라는 것을. 트루디는 이 마지막 여행에서 그의 죽음 뒤에 펼쳐질 바닥없는 슬픔은 온전히 그녀만의 것임을 알게 된다. 여행의 끝자락에서 트루디는 남편의 죽음 이후에 펼쳐질 기나긴 어둠의 나날들을 이미 속속들이 관찰한 듯 철저한 무력감을 느낀다. 그녀는 마음속에서 그녀가 다녀올 수 없는 슬픔의 극한까지 홀로 걸어 들어간다. 아무도 그녀 마음에 새겨진 어둠의 깊이를 헤아릴 수 없다.
이별의 슬픔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감정의 공간이 사라져가는 현대 사회에서 사람들은 차라리 슬픔을 표현하지 않는 것이 ‘쿨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격정적인 슬픔을 조용히 억압하는 것이 보다 침착하고 세련되어 보이는 세상이 된 것이다. 장례식장에서도 ‘난 분명히 슬픈데 왜 눈물이 나지 않을까’를 고민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머리를 풀어 헤치고 통곡하며 슬픔을 마음껏 표현하는 사람을 ‘우아하지 못하다, 촌스럽다, 교양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고, 장례식장에서 끝까지 의연함을 잃지 않고 슬픔을 억누르는 것이 더욱 ‘바람직한’ 슬픔의 에티켓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 모든 태도에서 발견되는 것은 ‘솔직하게 슬픔을 표현하는 것은 뭔가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일’이라는 선입견이다. 게다가 슬픔의 눈물과 통곡을 쏟아내지 않았다고 해서 우리 자신이 슬픔에 ‘승리’한 것은 아니다. 오늘 마음껏 울지 못한 슬픔은 언젠가 우리의 삶 어디에선가 적당한 자극을 만나면 오래된 지뢰처럼 속수무책으로 터질지도 모른다. 우리가 ‘슬픔을 잘 참고 있다’고 느낄 때, 그 순간은 슬픔을 정복한 것이 아니라 어쩌면 너무 슬퍼서 슬프다는 감정조차 느끼지 못하는, 감정의 마비 상태가 아닐까.
트루디는 오랫동안 어떤 슬픔도 자신이 혼자 껴안고 견뎌야 한다고 믿어온 사람 같다. 가족은 물론 어떤 지인에게도 이 슬픔의 비밀을 털어놓지 못한 그녀는 남편의 등 뒤에서 남편의 시선이 잠시 다른 곳을 향하고 있을 때에야 남몰래 눈물을 흘린다.“당신은 앞으로 살날이 얼마 안 남았다면 뭘 하고 싶어요?” 트루디는 마치 남의 일인 듯 심상하게 질문한다. 아직 죽음에 대해 전혀 심각하게 고민해보지 않은 사람처럼, 루디는 가볍게 말한다. “내일 죽을 것처럼 오늘을 살라고들 하지. 하지만 뭘 어떻게 하겠어? 난 아무것도 다른 건 안 해, 아무것도. 그저 언제나처럼 아침에 출근했다 저녁에 당신이 기다리고 있는 집에 와야지.” 트루디는 이렇게 남편과 진정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놓쳐버린다. 어쩌면 이미 슬픔의 극한까지 자신을 밀어붙인 트루디와 아직 슬픔의 출발선에도 서지 못한 루디와의 진정한 대화는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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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리비도라고 부르는 사랑의 능력을 소유하고 있다. 이 리비도는 성장의 초기 단계에 자아로 향해 있다. 비록 초기 단계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 리비도는 나중에 자아에게서 벗어나 다른 대상으로 향하게 된다. 물론 그 대상도 어떤 의미에서는 자아 속에 들어 있다. 그런데 그 대상이 파괴되거나 상실되면 우리의 사랑의 능력(리비도)은 다시 해방되어 대신 다른 사랑을 찾거나 아니면 일시적으로 우리 자아에게로 되돌아오게 된다. 그러나 리비도가 그 대상과 분리되는 것이 어찌 그리 고통스러운 과정으로 나타나는지는 불가사의한 것이고, 아직 우리는 그것을 설명할 만한 어떤 가설도 세워놓지 못하고 있다. 다만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리비도가 어떤 대상에 집착한다는 것, 그리고 그 대상을 상실했을 때 비록 다른 대체물이 있다 하더라도 애초의 그 대상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슬픔이 생겨나는 것이다.
- 프로이트, 정장진 옮김, <예술, 문학, 정신분석>, 열린책들, 2004, 337~33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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