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애도와 우울 사이에서 길을 잃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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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분석 안에 인간의 가슴(heart)은 어디에 있는가? (……) 정신분석적 사고에서 가슴이라는 말이 생략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신분석이나 심리치료에서 피분석자나 환자들에게 말할 때 가슴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즉각적으로, 종종 생생한 반응과 함께, 무언가가 소통되고 있다는 느낌을 발생시키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가슴의 필요들, 바람들, 그리고 우리 모두가 방어하고 있는 그것의 상처들을 불러일으킬 때, 거기에는 대체로 생생한 충격이 발생한다. 그것은 확실히 이드나 에고나 수퍼에고를 말하는 것보다, 심지어는 무슨 리비도적 자아니 또는 내적 파괴자로 인격화된 반-리비도적 자아에 대해서 말하는 것보다 정서적으로 더 잘 접촉할 수 있는 직접적인 통로이다.
- 수잔 캐버러-애들러 지음, 이재훈 옮김, <애도>, 한국심리치료연구소, 2009, 16~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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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루디는 베를린에서 오랜만에 부토 공연을 관람한다. 온몸으로 죽음 저편의 세계를 그려내는 아티스트의 몸짓은 마치 남편의 죽음 이후를 생각하는 트루디의 마음처럼 소리 없는 절규로 가득하다. 트루디의 눈빛은 이미 삶의 저편, 피안을 바라보는 눈빛처럼 아득하다. 그녀의 시선은 단지 부토를 추는 아티스트의 몸짓이 아니라 부토가 표현하는 죽음 저편의 세계에 이미 가닿은 것만 같다. 그녀는 부토의 춤사위와 함께 죽음 저편의 세계로 건너가는 듯한 표정으로, 공연 시간 내내 무용수의 몸짓과 하나가 되어 마음으로 춤을 춘다.
한편 그녀가 홀로 다가오는 죽음의 망령과 싸우고 있는 동안 자식들은 여전히 냉담하다. 자식들은 어머니가 그토록 좋아하는 부토가 무엇인지도 모르며 그녀를 공연에 데려갈 생각 또한 없었다. 엉뚱하게도 딸의 여자친구 프란치가 트루디를 공연장으로 안내한다. 트루디는 프란치의 예상 밖의 친절에 감사하면서도 남편과 자식들과의 마지막 만남을 이렇게 허무하게 날려버리는 듯하여 마음이 무겁다. 그녀의 아들딸들은 부모에 대한 사랑이 별로 없으므로 애도조차 불가능한 것일까.
자식들이 저마다 바쁘다며 아무도 트루디 부부를 챙겨주지 않자 두 노인은 복잡한 베를린 거리를 더듬더듬 헤매며 점점 지쳐간다. 버스표를 끊을 줄 몰라 당황하던 남편 루디는 마침내 노여운 속내를 털어놓고 만다.“여보, 나 집에 가고 싶어져.”트루디는 남편의 마음을 이해한다.“한 놈도 시간 있는 놈이 없다잖아.” 낯선 베를린 거리를 헤매는 외로운 두 노인은 비로소 자신들에게는 이 거대한 도시가 어울리지 않음을 깨닫는다. 트루디는 문득 남편과 둘만의 여행을 떠나고 싶어진다. “그래요, 우리 발틱으로 가요.” 발틱 해변, 남편이 언젠가 죽으면 그곳에 뿌려지고 싶다고 했던.
베를린의 마지막 밤. 트루디는 계속 잠을 이루지 못한다. 의사의 선고를 들은 날부터 이미 트루디의 불면증은 시작되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평화롭게 잠들어 있는 남편과 자식들을 바라보며 트루디는 홀로 남아 걸어가야 할 저 수많은 나날들을 생각하며 아득해진다. 남편이 세상을 떠난다면 내게 닥쳐올 저 막막한 나날들을 함께할 친구가 아무도 없겠구나. 너희들의 마음속에는 우리의 이별을 슬퍼할 만한 아무런 마음의 여유도 남아 있지 않구나. 그녀의 자식들에게는 사랑이 없기에 애도도 불가능한 걸까. 사랑이 있어야 뼈아픈 상실도 있고 사랑의 대상이 있어야 애도나 우울의 몸부림도 가능하다. 애도도 우울도 어쩌면 사랑을 지닌 자의 특권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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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증에서 나타나는 불면증은 그 상태의 경직성, 즉 수면에 필요한 전반적인 리비도 집중의 철회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우울중의 콤플렉스는 마치 아물지 않은 상처와 같이 모든 방향에서 리비도 집중을 끌어 모으고 자아가 완전히 빈곤해질 때까지 자아를 텅 비우게 된다. 이런 과정이 자아의 수면 욕구에 대한 저항 세력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 프로이트, 윤희기 · 박찬부 옮김, <정신분석학의 근본 개념>, 열린책들, 2004, 25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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