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주의!!


 영화 <의형제>와 미하일 바흐친 ⑮


  15. 나는 네가 아니다. 그러나……(3)  

   
 

 인간은 예술 속에 있을 때는 삶 속에 있지 않고, 삶 속에 있을 때는 예술 속에 있지 않다. (……) 내가 예술에서 체험하고 이해한 모든 것이 삶에서 무위로 남게 하지 않으려면 나는 그것들에 대해 나 자신의 삶으로써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러나 책임은 죄과와도 결합되어 있다. 삶과 예술은 서로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할 뿐만 아니라 서로에 대한 죄과도 떠맡아야 한다. (……) 무책임을 정당화하기 위해 ‘영감’에 의지하는 것은 소용없는 일이다. 삶을 무시하고, 그 자신이 삶에게 무시당하는 영감은 영감이 아니라 사로잡힘이다. (……) 삶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고 창조하는 것이 더 쉽고, 예술을 염두에 두지 않고 사는 것이 더 쉽기 때문이다.
 예술과 삶은 하나가 아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내 안에서, 나의 책임의 통일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한다.
 - 미하일 바흐친, 김희숙 · 박종소 옮김, <말의 미학>, 도서출판 길, 2007, 26쪽.

 
   

  



   피를 뚝뚝 흘리며 쓰러진 이한규 곁에서 신음하던 지명훈은 묻는다. “당의 지시로 온 거냐? 누구의 지시로 온 거냐?” 송지원은 갑자기 머릿속이 하얘진다. 그럼 이 모든 것이 당의 지시가 아닌 그림자의 단독 행동이었단 말인가. 그림자는 망설임 없이 지명훈에게 잔혹한 총질을 해대고 지명훈은 즉사한다. “변절자 새끼. 말이 많구먼.” 송지원은 그림자에게 항변한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당의 지시로 온 게 아니었습니까? 그럼 태순이도 그냥 동무가 죽인 겁니까?” ‘변절자’를 처단하는 일은 당의 지시 없이도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듯한 뉘앙스를 풍기는 그림자. 이제 그림자의 총구는 송지원을 향한다. “너, 북에 있는 가족들 빼돌렸지?” 지원은 이성을 잃고 부들부들 떨기 시작한다. “제 가족은 어떻게 됐습니까?” “어떻게 됐을 것 같네?” 이때 죽은 줄로만 알았던 이한규가 기적처럼 깨어난다. 


   이한규의 복부에서 흐르던 피는 실은 이한규의 피가 아니라 송지원의 피였다. 송지원은 이한규의 복부를 찌르는 척하면서 남몰래 자신의 손을 찌른 것이다. 아무도 다치게 할 수 없어 스스로를 난자한 송지원. 날카로운 자상(刺傷)을 입어 선혈이 뚝뚝 흐르는 지원의 손을 바라보며 이한규는 가슴이 시리다. “미련하긴.” 지원은 아픔조차 잊은 채 가족의 안부를 걱정한다. 그림자의 암시처럼 가족들이 잘못되었다면 이젠 더 이상 살아갈 이유가 없어져버린 지원은 자신에게 총구를 겨눈 그림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죽음에 대한 공포조차 잊은 표정이다. 이한규의 총구는 그림자에게, 그림자의 총구는 송지원에게 향해 있다. 송지원은 아예 그림자의 총구를 손으로 꽉 잡은 채 차라리 자신을 죽여버리라고 절규한다. 일촉즉발의 순간. 그림자와의 몸싸움 끝에 지원은 그림자와 함께 건물 아래로 추락하고 만다. 

 


   숨이 끊어질 듯 긴박한 상황에서 송지원은 자신을 껴안고 눈물 흘리는 이한규를 바라보며 유언처럼 속삭인다.

 송지원 : 저는…… 아무도 배신하지 않았습니다.
 이한규 : 알아, 임마…….

   송지원은 자신의 손바닥에 전해지는 날카로운 고통을 통해 스스로 이한규가 되었고, 이한규는 자신을 지켜내기 위해 끝까지 애쓰다 추락한 송지원을 바라보며 어느덧 자신의 분신이 되어버린 그의 고통을 깨달았다. 스스로의 존재를 깡그리 부수어서라도 그 누구도 배신하지 않으려는 그의 몸부림을 읽어낸 것이다. 아무리 접근해도 영원히 닿지 않는 점근선 같았던 ‘나’의 존재가 드디어 ‘너’의 경계를 구성하는 단단한 이성의 각질을 뚫는 순간. 나의 존재가 무한히 작아질수록 나는 타인의 고독에 무한히 가까워질 수 있다. 영원히 나와 네가 일치할 수는 없지만 나의 존재는 너의 존재에 끊임없이 다가가는 몸부림 그 자체가 될 수는 있다.  



  송지원은 드디어 꿈에 그리던 가족을 되찾게 되고, ‘이한규’의 동생 티가 팍팍 나는 새로운 이름 ‘이상규’도 갖게 되었다. 이한규가 영국에 있는 가족을 만날 수 있도록 비행기 표를 선물하고는 자신도 몰래 그 비행기를 탄 이상규-송지원. 언뜻 보아 ‘해피 엔딩’처럼 보이지만 어쩌면 송지원이 아무리 이상규가 되어도 다가갈 수 없는 ‘평범한 삶’의 아득한 장벽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는 누구도 배신하지 않았지만 남파공작원이었다는 사실은 그를 평생 따라다닐 것이다. 아무도 배신하지 않았지만 그 누구의 ‘편’도 아니기에 이곳에서도 저곳에서도 마음 편히 살 수 없게 된 송지원. 교육비는 물론 생활비 자체가 터무니없이 비싼 한국은 송지원 같은 ‘우리 안의 디아스포라’가 살기에는 너무 척박한 땅이 아닐까.




   <의형제>는 ‘자기 땅’에서 디아스포라가 되어버린 사람들의 21세기 판 오디세이다. 오디세우스는 돌아올 집과 든든한 삶의 토대가 있었지만, 송지원에게는 돌아갈 집은커녕 삶의 토대 전체가 사라져버렸기 때문에 스스로의 가난한 몸뚱이 자체가 ‘늘 움직이는, 불안한 집’이 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이 절망적인 상황에도 아주 작은 희망의 틈새는 남아 있다. ‘싸구려 흥신소’ 냄새가 물씬 풍기는 이한규의 회사 ‘인터내셔널 테스크포스’는 이한규뿐 아니라 이 메마른 디아스포라들의 기나긴 겨울 같은 삶을 끌어안는 따스한 요람이 되지 않을까. 이한규는 이미 엄청난 현상금이 걸린 라이따이한 출신 조폭을 늠름한 직원으로 고용한 상태다. 그러고 보면 이한규는 거액의 현상금이 걸린 죄인조차 자신의 가족으로 만드는 뛰어난 용병술의 대가다. ‘빨갱이 잡는 정의의 사도’가 아니라 ‘잃어버린 사람 찾기’로 자신의 직업을 바꾸어버린 이한규의 사람 찾기 프로젝트는 자신의 자리를 잃어버린 사람들을 제 자리로 돌아오게 만드는 멋진 사업으로 거듭나지 않을까. 


   바흐친이 말한 ‘이질성’의 언어가 자신의 고유한 정체성을 잃지 않고 ‘정해진 질서’가 아닌 매번 새로 만들어지는 ‘카니발의 언어’로 거듭나는 그곳. ‘나’라는 존재가 영원히 종결되지 않고 타자를 향해 끝없이 열린 정체성으로 기쁘게 살아가는 그곳. 육체와 육체, 문화와 문화,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 사이, 그 모든 ‘경계’와 ‘접촉지점’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차이의 충돌을 이질성의 카니발로 만드는 지혜. 너와 나의 차이로 인해 너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돌이킬 수 없는 차이로 인해 내가 더욱 풍요로워지는 그곳. 바흐친의 말처럼, 타자를 향해 끊임없이 열려 있는 존재의 기원은 ‘대화’가 아닐까. 혼자 있을 때도 우리에겐 대화가 필요하다. 단지 ‘동일성’으로 수렴되는 내 안의 또 다른 내가 아니라, 내 안에 깃들어 이미 오래전부터 살고 있는 수많은 타자들과의, 소리 없이도 이미 왁자지껄한, 서로의 차이로 인해 더욱 풍요로워지는 수많은 그대들과의 대화가. 영원히 완결되지 않을 나를 향해 말을 거는 타자의 모든 의심과 비판이야말로 우리의 진정한 대화를 향한 창조의 밑거름이 될 것이다.   

 

   
 

   타자의 말은 내가 나의 말의 잠재력에 말을 걸 수 있게 한다. 내적 대화를 통해 생성되는 것은 아직 한 번도 실현된 적 없는 내 말의 잠재력이다. 나의 말도 타자에게는 동일한 기능을 수행한다. 타자 또한 낯선 나의 말을 통해서 자신의 잠재력에 말을 걸게 될 것이다. 그가 나의 말을 향해 열려 있다면 말이다. 타자를 향해서 마음을 열었을 때 나와 타자는 모두 자신의 말에서 ‘잠재력’을 발견하게 되고, 그로 인해서 창조성을 발휘하게 된다. 진정한 대화는 그 자체가 창조를 부추기는 행위인 것이다. (……) 일상이란 매일 틀에 박힌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창조 행위다. 다시는 반복되지 않는 일상의 말과 행위는 그 자체로 나의 것이며 내가 내 말에 책임을 지는 한 나의 말은 언제나 창조적이다. 책임지는 자아, 창조하는 자아야말로 바흐친의 산문학에 거주하는 시민이다. 책임지는 자아, 창조적인 자아는 언제나 자기 말의 외부를 통해, 잉여를 통해, 타자를 통해 자신의 말을 바라보는 사람이다. 말에 대한 타자의 시험을 두려워하는 사회, 말에 대한 타자의 의심을 통과하지 않는 말을 내뱉는 사회, 그렇게 의심받지 않은 말이 지배하는 사회에 필요한 것은 대화다. 그런 뜻에서 바흐친은 다른 사람의 말에 응답하는 자신과 먼저 대화하기를 권한다.
 - 게리 솔 모슨 · 캐릴 에머슨 지음, 오문석 외 옮김, ‘옮긴이의 말’ 중에서, <바흐친의 산문학>, 책세상, 2006,  799~80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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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릭 2010-03-19 15: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영화를 보면서 "나는 아무도 배신하지 않았습니다."라는 송지원의 말이 마음을 울렸다. 그 말은 누구의 편에도 설 수 없었던 그의 모습을 보여주는 게 아닐까? '자기땅에서 디아스포라가 되어버린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말에 공감하지만, 이 영화의 마지막에서 디아스포라들의 '희망의 틈새'를 보지는 못했다. 그냥, 해피엔딩으로 뭉뚱그린 느낌? 정여울 님의 말대로 '잃어버린 사람찾기'는 정말로 그들이 찾은 '희망'을 보여주는 것인지 생각해보게 한다

lily2010 2010-03-20 2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물론 분명한 확신에 찬 희망은 발견하기 어렵지만, 아주 어렴풋이 조심스럽게 흔들리는 듯한 희망의 조짐들이 느껴지기는 했어요. 그렇게 텍스트 너머로 계속 아스라한 무언가가 있다고 느끼게 만드는 것이 이 영화의 매력이겠지요?^^

맨손체조 2010-03-23 09: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대화가 필요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