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존재의 가장 어두운 밤’을 통과하는 동안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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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자신의 입술은 오직 타자의 입술에만 닿을 수 있으며, 오직 타자에게만 나의 손을 올려놓을 수 있으며, 타자만을 적극적으로 딛고 일어설 수 있고, 그의 모든 것을 덮어줄 수 있으며, (……) 그의 육체와 그의 육체 안에 있는 영혼을 덮어줄 수 있는 것이다.
- 미하일 바흐친, 김희숙 · 박종소 옮김, <말의 미학>, 도서출판 길, 2007, 74~7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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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부 : (아내를 다시 찾아준 이한규와 송지원에게 진심 어린 감사의 표정을 담아) 사례를 해야 할 텐데.
이한규 : 찾는 데 200, 데려오는 데 200, 총 400 되겠습니다.
송지원 : 부인이 직접 오셨으니까 사례는 필요 없습니다.
이한규 : (사장도 아닌 송지원이 제멋대로 사례비를 눈앞에서 공중분해시키자 어안이 벙벙한 채로 송지원을 노려본다.)
농부 : (해맑게 미소 지으며) 그래도 감사의 표시라도…….
이한규 : (농촌에서 직접 재배한 각종 야채와 닭을 자동차에 실어준 농부의 ‘사례’를 한심한 듯 바라보며 한숨을 쉰다. 홰를 쳐대고 꼬꼬댁 꼬꼬댁 소리를 내며 야단법석을 떠는 토종씨암탉을 노려보며) 그거 가져가려면 수갑 채워!
송지원 : (흐뭇한 표정으로 씨암탉을 꼭 껴안고 있다.)
두 사람은 지금 서로에게 최대한의 실용적인 정보를 빼내어 저마다 자신의 생존을 도모하는 중이다. 하지만 두 사람은 불현듯 자기 자신의 정해진 업무를 망각하곤 한다. ‘인터내셔널 테스크포스’의 기계적인 흥신소 업무를 송지원은 별 무리 없이 잘 해내는 듯하지만, 그는 ‘두당 200만 원’의 수고비를 한 순간에 제멋대로 날려버릴 정도로 ‘타인의 삶’에 관심이 많다. 농촌에서 힘겹게 농사를 짓는 가난한 남편과 무럭무럭 커가는 아이들을 보자 200만 원의 수고비를 받아낼 생각이 싹 달아난 것이다.
눈 깜짝할 사이 외부에서 입력된 공적인 정체성이 잠시나마 지워지는 순간이다. 농촌 아이들과 놀아주며 나이를 묻는 송지원의 모습은 영락없이 잘생긴 동네 총각이다. 그의 얼굴에 가득 드리운 서늘한 그림자 뒤에 숨겨진 따스함을 읽어낸 관객의 마음은 어느덧 가뿐하게 무장해제되어 있다. ‘송지원의 직업과 이데올로기’에 상관없이, 한 인간의 마음속 소용돌이를 읽어낼 준비가 된 것이다.
두 사람은 자신들도 모르게 남파공작원과 전직 국정원 팀장의 목소리가 아닌 저마다 자기 마음속에 깊숙이 간직하고 있는 ‘인간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그 과정은 너무 자연스러워서 본인들도 선뜻 ‘주어진 역할로서의 자아’와 ‘내면의 자아’를 구분하지 못한다. 농부가 준 씨암탉을 능숙하게 요리하여 닭백숙을 만들어낸 송지원. 그가 만든 닭백숙을 게 눈 감추듯 먹어 치우는 이한규. 늘 싸구려 햄버거를 비롯한 각종 인스턴트 음식으로 끼니를 때우던 이한규는 송지원의 찰진 손맛에 배인 사람 냄새를 맡고는 자신이 그리워하고 있는지도 몰랐던 ‘집에서 해주는 음식’에 대한 향수를 맛본다. “토종 씨암탉. 맛있다. 누가 해주는 음식. 오랜만이네.”
결코 닮은 데라곤 없어 보이던 두 사람의 영혼. 그런데 서로의 내심을 흘깃흘깃 엿보는 두 사람의 눈빛은 언젠가부터 조금씩 닮아간다. 송지원은 가족은 물론 조직사회에서도 버림받은 이한규를 바라보며 저 고독한 표정을 어디선가 많이 본 것 같은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이한규도 마찬가지다. ‘끈 떨어진 연’ 신세가 되어 당의 지원은 물론 그림자와도 연락이 끊긴 송지원을 바라보며 이한규는 가슴 한 구석이 서늘해진다. 저 얼굴. 저 얼굴은 내가 너무나 잘 아는 얼굴이다. 거울 속에 비친 내 얼굴. 바로 그것이다. 나밖에는 사랑할 사람이 없는 내 얼굴이지만 결코 마음을 다해 사랑할 수 없는 내 얼굴. 언제나 내심을 숨겨야 하기에 진짜 자연스럽고도 솔직한 표정이 어떤 것인지도 오래전에 잊어버린, 나 자신조차 낯선 내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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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우리 자신 안에 머물며, 우리 자신의 반영만을 볼 뿐이고(……) 우리는 자신의 외양이 반영된 상은 보지만, 외양 속에 있는 자기 자신은 보지 못한다. 외양은 나의 모든 것을 포함하지 못하며, 따라서 나는 거울 앞에 있는 것이지 그 안에 있는 것은 아니다. (……) 실제로 거울 앞에서의 우리의 위치는 항상 어느 정도 허위적이다. (……) 바로 여기서 우리가 거울 속에서는 보지만 실제 삶에서는 드러내지 않는 독특하고도 부자연스런 얼굴 표정이 나타난 것이다.
- 미하일 바흐친, 김희숙 · 박종소 옮김, <말의 미학>, 도서출판 길, 2007, 6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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