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주의!!


 영화 <의형제>와 미하일 바흐친 ⑦


 7. ‘존재의 가장 어두운 밤’을 통과하는 동안 (1)

   
 

 제아무리 견고하다 해도 현실은 인간의 감각을 통해서만 드러나는 것이므로, 인간은 누구나 한 번쯤 자신의 감각이 바뀌면서 현실이 무르게 되는 순간을 경험하게 마련인데, 이를 두고 십자가의 성 요한은 '존재의 가장 어두운 밤'이라고 불렀다. 모든 성인들은 자발적으로 고립을 택해 그 '존재의 가장 어두운 밤'으로 들어가는데, 이는 현실이 오직 감각을 통해서만 드러난다는 사실을 깨닫기 위해서다. 하지만 '존재의 가장 어두운 밤'을 경험한 그 다음 순간, 모든 성인들은 감각적 현실이 얼마나 아름다운 세계인지 깨닫게 된다. 현실이 감각적으로만 성립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모든 게 덧없을 뿐이라는 허무주의에 빠져야 할 텐데, 아이로니컬하게도 더욱더 그 감각적인 생생함을 즐기게 되니 놀라운 일이다. 
 - 김연수,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문학동네, 2007, 42쪽.

 
   

  



   “공작금 끊겨서 생계형 간첩 된 애들. 지금 취업난에, 알바자리 찾느라 난리라던데.” 그림자와 헤어진 후 송지원도 이렇듯 물적 토대를 완전히 상실한 상태에서 막노동에 몸을 던져야 하는 처지였다. 이한규는 도망간 베트남 처녀를 찾는 일로 건당 200만원에서 400만 원가량의 돈을 벌며 이혼한 아내에게 딸 윤지의 양육비를 보내고 있다. 송지원은 북한의 지원이 끊긴 상태에서 낯선 남한에서 생계를 감당해야 할 뿐 아니라 북한에서 오도 가도 못하는 아내와 딸을 데려오기 위해 거액의 자금을 필요로 하는 처지다. 그들은 지금 저마다의 절박함 때문에 타인의 절박함이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송지원은 이한규에게 고용되어 베트남 처녀를 잡아오는 ‘비인간적인’ 일을 어쩔 수 없이 하면서도 최소한의 ‘인간적인’ 길을 찾으려 한다. 

 

   실종된 베트남 여인을 찾던 이한규는 동네 할머니들과 함께 고스톱을 치면서 할머니들을 구워삶아 그녀에 대한 정보를 얻으려 한다. 할머니들은 약속이나 한 듯 함구하고, 이한규는 오늘은 이렇게 공치는구나 싶다. 이때 송지원과 베트남 여인이 나란히 이한규 앞에 나타난다.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고 순순히 따라오는 베트남 여인을 보며 이한규는 놀란다. “어떻게 한 거야?” 송지원은 보일 듯 말듯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설득했죠. 인간적으로.” 이한규의 비인간적인 작업 방식에 대한 가벼운 풍자가 담긴 송지원의 대사다. 한방 맞은 이한규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그러나 그는 이때를 놓치지 않고 냉혹한 남파 공작원 송지원의 빈틈없는 표정의 갑옷 사이로 언뜻 비치는 ‘감성의 틈새’를 발견한다. 
 


   송지원은 이한규가 여전히 국정원의 팀장으로 일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의 활동 정보를 자세히 보고하면 그림자의 신뢰를 다시 얻고 끊어진 ‘당’과의 접촉도 다시 시작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그는 이한규의 유능한 피고용인의 연기를 해내면서 동시에 이한규의 각종 신상 정보를 이메일을 통해 보고하기 시작한다. 그가 그림자에게 보내는 보고서는 ‘참수리 7호 보고서’다. “국정원 3팀장 이한규. 흥신소를 가장한 업무 반복. 딸이 있고, 이혼했음. 특이사항 햄버거.” 양주를 먹을 때조차도 싸구려 햄버거를 안주 삼아 씹어 먹는 이한규의 서글픈 식습관은 송지원의 눈에 ‘특이사항’으로 보였던 것이다. 늘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못해 햄버거로 대충 허기를 모면하는 이한규의 식습관은 송지원의 연민을 자극한다. 그들은 서로의 숨 막히는 역할 가면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서로의 맨얼굴과 상처 입은 속살을 훔쳐보며 조금씩 서로에 대해 알아가기 시작한다.  


 

   밤이 되면 서로를 향해 단단히 무장하고 있던 심리적 가면이 반쯤은 벗겨진다. 특히 한쪽이 잠들 때쯤이면 그들은 자신의 가면을 벗고 자신도 모르게 벗겨진 저쪽의 가면을 바라보며 더욱 쓸쓸해진다. 잠들었을 때. 우리는 거울 앞에서처럼 좀더 ‘마음에 드는’ 자신의 표정을 지어보일 수도 없고, 누군가가 나를 보고 있을 때의 긴장감도 사라진다. 서로의 잠든 얼굴을 슬며시 훔쳐보며 그들은 자신이 미처 단속하지 못하는 자신의 숨은 얼굴을, 상처가 생겨도 털어놓을 사람조차 없어 외로움으로 점점 굳어가는 서로의 얼굴을 발견한다. 송지원이 북한을 향해 보내는 편지는 늘 ‘unread’ 상태로 쌓여만 간다. 그가 보내는 편지는 어디에도 도착하지 않는다. 그가 하고 있는 일은 그 누구에게도 소통되지 않는다. 그는 지금 완벽히 혼자다. 그는 지금 존재의 가장 어두운 터널을 지나고 있다. 그런데 그는 정말 혼자일까. 
 


   

   
 

 작가는 자신 밖에 위치해야 하며, 우리가 실제로 우리 자신의 삶을 체험하는 차원과는 다른 차원에서 자신을 체험해야만 한다. (……) 작가는 자신과의 관계에서 타자가 되어야 하며, 타자의 눈을 통하여 자신을 바라보아야만 한다. 사실, 삶에서도 우리는 매순간 이렇게 하고 있다. 우리는 타자의 관점에서 자신을 평가하며, 타자를 통하여 우리 자신의 의식에 대해 경계이월적인 요소들을 이해하고 고려하려고 노력한다.
 - 미하일 바흐친, 김희숙 ·박종소 옮김, <말의 미학>, 도서출판 길, 2007, 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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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lsend 2010-03-04 1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존재의 가장 어두운 밤. 영혼의 통과의례 같은 거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