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피사체가 가장 아름다워 보이는 앵글을 찾아서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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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내 전체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이 인물은 마치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나의 전체를 보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당신은 보지도 듣지도 알지도 못하고 계십니다.” 이런 주인공은 작가에게 미결정적이다. 다시 말하면 그는 계속하여 다시 태어나며, 계속해서 새로운 완결 형식을 요구하면서도 이 형식을 주인공이 자신의 자의식으로 파괴해버린다.
- 미하일 바흐친, 김희숙 ·박종소 옮김, <말의 미학>, 도서출판 길, 2007, 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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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타인의 인상을 판단할 때 일반적으로 채택하는 기준은 무엇일까. 외모와 직업이야말로 우리가 아무리 부정하려 해도 피할 수 없는 ‘정체성의 덫’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의형제>의 주인공 송지원(강동원)과 이한규(송강호)는 둘 다 매우 불리한 직업을 가졌다. 이한규는 국정원 요원이고 송지원은 남파 공작원이다. 너무도 ‘뻔한’ 직업이라 생각하기 쉬운 이 상투적인 정체성의 틀에 두 인물은 자칫하면 갇히기 쉽다. 누군가가 어떤 직업을 가지고 있다고 할 때 사실 그 사람의 인상의 80퍼센트 이상이 결정되곤 하지 않는가. 게다가 그 직업이 ‘간첩’이나 ‘국정원 간부’라면 이야기는 더욱 단순명료해진다. 그 사람 고유의 삶이란 존재하기 어려운, 전형적인 ‘조직중심형’ 인간이기 쉽기 때문이다.
그런데 <의형제>는 영화 초반부터 그 직업이라는 정체성의 틀을 살짝 비틀어 관객을 교란시킨다. 국정원 요원 이한규는 냉혹한 이성을 지닌 전형적 요원이라기보다는 가볍게 내뱉는 말과 표정 하나하나가 코믹하기 이를 데 없다. 송지원은 순정만화에서 방금 튀어나온 듯한 수려한 외모에 자상한 아빠와 로맨틱한 남편의 모습을 동시에 보여준다. 송지원이 전화로 북한에 있는 아내와 통화하며 뱃속에 있는 아기에게 동화를 읽어주는 장면은 ‘간첩에게 숨겨진 의외의 성격’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송지원의 모습임을 관객은 처음부터 믿게 된다. 그 모든 모순적인 캐릭터들이 두 사람의 몸에 찰싹 달라붙어 조금도 이물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림자’라는 닉네임을 가진 베테랑 공작원의 지시를 따르는 송지원. 그는 그림자와 접선하기 위해 암호를 해독한다. 가수 남궁옥분의 ‘재회’라는 노래가 나오는 순간 지원은 톨스토이의 소설 <부활>을 펼쳐 자신에게 도착한 암호를 읽어낸다. 같은 시간 이한규는 국정원 직원들과 함께 그림자가 보낸 암호를 해독하려고 백방으로 애써보지만 실패하고 만다. 그림자는 이한규의 오랜 표적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송지원이 오래전 남파된 친구이자 공작원인 손태순의 차량을 타고 가는 것을 알게 된 이한규 일행은 그를 추적하기 시작한다. 송지원과 그림자 사이에 오가는 암호는 해독할 수 없지만 이한규에게는 손태순이라는 비밀 연락책이 있었던 것이다. 손태순에게서는 지원에게서 느껴지는 팽팽한 긴장감과 결연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남한 여성과 결혼하여 아기까지 낳은 그는 이미 오래 전에 ‘남한 사람’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손태순의 정보력을 믿는 이한규는 다른 부서의 지원을 받지 않고 단독으로 그림자를 잡기 위해 발 빠르게 움직인다.
영화의 스토리는 이렇듯 전형적인 ‘추격신’의 방정식을 따라가지만 관객은 자신도 모르게 스토리와 캐릭터의 균열을 경험한다. 감독의 시선은 마치 바다 위에서 윈드서핑을 하듯 끊임없이 흔들리며 주인공의 의무와 욕망사이, 직업과 성격 사이, 이성과 감성 사이의 균열을 포착해낸다. 이때 인물들은 영화라는 거대한 불가마 안에서 조금씩 자신의 빛깔과 형태를 찾아가는 도자기처럼 천천히 자신의 모습을 만들어간다.
감독은 송지원을 있는 힘껏 노출시키지도 않고 지나치게 신비화하지도 않는다. 프레임 바깥에서 흔들리는 카메라는 주인공도 함께 따라서 흔들리도록 내버려둔다. 감독은 송지원과 이한규의 과거를 속속들이 파헤치지 않고도 그들의 라이프스토리 곳곳에 크고 작은 ‘구멍’난 채로 내버려둔 것 같다. 작가-감독은 단순히 주인공에 대한 찬성이나 반대의 위치가 아니라 주인공의 세계 바깥에서 흔들리는 시점의 윈드서핑을 하며 그가 최대한 아름답게 비치는 카메라의 위치와 각도를 찾는다. ‘그는 이런 사람입니다’라고 설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의 있는 그대로를 최대한 담담히 보여주기 위해. 그리고 작가-감독이 포착할 수 없는 ‘잉여’에 인물이 존재할 수 있는 아련한 여백을 남겨 두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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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자신 밖에 위치해야 하며, 우리가 실제로 우리 자신의 삶을 체험하는 차원과는 다른 차원에서 자신을 체험해야만 한다. (……) 작가는 자신과의 관계에서 타자가 되어야 하며, 타자의 눈을 통하여 자신을 바라보아야만 한다. 사실, 삶에서도 우리는 매순간 이렇게 하고 있다. 우리는 타자의 관점에서 자신을 평가하며, 타자를 통하여 우리 자신의 의식에 대해 경계이월적인 요소들을 이해하고 고려하려고 노력한다.
- 미하일 바흐친, 김희숙 ·박종소 옮김, <말의 미학>, 도서출판 길, 2007, 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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