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슈렉>과 줄리아 크리스테바 마지막 회

 

 13. ‘우울한 결핍’에서 ‘유쾌한 차이’로 (3) 

   
  여성적 윤리는 죽지 않는 것, 사랑이다.
 - 줄리아 크리스테바
 
   


   우리는 ‘아브젝트’가 추방되고 사형되고 사라지는 수많은 영화들을 감상한 경험이 있다. <조스>에서 끔찍한 식인 상어들은 인간의 단결된 힘으로 처치되었으며, <프랑켄슈타인>에서 인간의 시체에서 나온 잔해들로 만든 ‘괴물’은 인간의 지혜로 살해되었으며, <괴물>에서는 힘없는 소시민 가족의 좌충우돌 모험기를 통해 ‘어쨌든’ 괴물을 소탕했다. 혐오와 공포의 대상인 괴물은 영화의 종반부에서는 반드시 퇴치되는, 주인공에게 가장 ‘적대적’인 조연급 배우였다. ‘괴물’이 주로 ‘인간’이 아닌 존재로 등장하거나 누구나 분노할 만한 엄청난 죄를 지은 존재로 묘사되는 것은 괴물의 제거를 정당화하는 구실이 되곤 했다.




   그런데 영화관을 나올 때마다 우리는 매번 뒤통수가 따갑거나 먹은 것이 제대로 소화되지 못한 듯한 석연치 않은 감정을 느끼곤 하지 않았던가. 괴물을 소탕하고 살해하고 처치하는 인간들의 현란한 스펙타클에 집중한 나머지 우리는 막상 ‘괴물의 입장’을 듣지 못했기 때문은 아닐까. 그리고 그 괴물들은 우리와 ‘전혀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숨죽이고 웅크린 숨은 욕망 어딘가를 닮은 구석이 있지 않았던가.

   영화 <슈렉>의 급진성은 바로 언제나 관객들의 사랑을 받지 못했던 조연급 배우 ‘괴물’을 관객들의 폭발적인 사랑의 대상인 ‘주인공’의 자리에 올려놓았다는 점이다. 우리는 영화의 러닝타임 동안 괴물의 관점에서, 괴물의 마음으로, 괴물의 시공간을 체험하는 기회를 맛보게 된 것이다. 아브젝트의 시점에서, 아브젝트의 삶과 사랑과 꿈을 체험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야말로 크리스테바의 철학적 기획과 <슈렉>의 급진성이 만나는 지점이 아닐까. 




   만약 <슈렉>의 결말이 ‘못생긴 피오나 공주’가 슈렉의 키스를 받아 ‘어여쁜 피오나 공주’의 본모습을 찾는 것이었다면, 그것은 <미녀와 야수>에서 남녀의 위치만을 바꾼 결과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슈렉>은 상대방의 야수성과 야생성을 반드시 교정해야만 획득되는 문명인의 사랑이 아니라, 그가 야수인 채로, 그가 ‘늪의 괴물’인 채로 사랑하는 법을 발견하는 과정을 담아낸다. <슈렉>의 또 다른 미덕은 버려진 존재들, 짓밟히고 배제된 ‘아브젝트’의 이야기를 굳이 오싹한 공포물이나 손발이 오그라드는 멜로물로 만들지 않고 유쾌하고 산뜻한 ‘애니메이션’의 그릇에 담아냈다는 것이다.  



   <슈렉>에서 슈렉과 피오나 못지않은 드라마틱한 로맨스의 주인공은 바로 동키와 핑크 드래곤이다. 처음에는 거대한 핑크 드래곤에게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 그녀의 ‘여성성’을 이용했던 동키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핑크 드래곤의 구애를 피하다가, 마침내 그녀의 도움을 받아 슈렉과 피오나를 구해내는 과정에서 그녀의 진정한 여성성을 발견해내고 그녀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우리는 여자 생쥐와 남자 사자 사이의 슬픈 로맨스처럼, ‘생물학적 차이’ 때문에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에피소드들을 알고 있다.
   하지만 <슈렉>은 우리가 ‘어쩔 수 없다’고 믿었던 생물학적 차이마저 유쾌하게 넘어버린다. <슈렉 3>에서 핑크 드래곤과 동키 사이에서 태어난 귀여운 ‘하이브리드’들은 우울한 결핍 혹은 넘어설 수 없는 차이를 핑계로 헤어지는 사람들에게 통쾌한 해답을 제공한다. 너와 나의 차이가 인종의 차이든, 계급의 차이든, 더 나아가 ‘생물학적 종(種)의 차이’일지라도, 우리의 사랑이 그 차이를 끌어안을 만큼 크고 따스한 것이라면, 그 사랑의 결과물은 저토록 귀여운 ‘하이브리드’ 후손들일 것이라고 말이다. 
 

     동화들은 흔히 ‘그 후로도 오랫동안 그들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고 끝난다. 하지만 <슈렉2>와 <슈렉 3>는 간신히 서로의 사랑으로 맺어진 슈렉과 피오나 커플이 정말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엄청난 장애물들이 남아 있음을 증언한다. 아무리 위대한 커플이라도 ‘결혼’만 했다 하면 디즈니 애니메이션처럼 자동으로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우여곡절과 산전수전을 ‘함께’ 했다는 수많은 추억의 퍼즐들이 모여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행복’이라는 커다란 모자이크로 천천히 완성되어 가는 것이 아닐까. ‘행복’은 단지 주어진 유리한 ‘조건’이 아니라 그것을 만들어가는 ‘과정’ 자체가 아닐까. 그러므로 행복은 불행의 요소들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불행과 위험과 불안과 공포까지 마침내 끌어안을 수 있는 감성의 스케일이 아닐까.




   모든 장애물은 ‘잠시’ 활동을 멈추었고, 드디어 아름다운 두 연인의 키스 타임이 시작된다. 마법이 풀리는 방식은 단지 괴물이 미남미녀가 되는 것만은 아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가장 ‘편안하게 느끼는’ 모습이 되는 것 또한 마법이 풀리는 ‘또 하나의 길’이니까. 두 사람의 키스가 끝나고 피오나가 거대한 빛의 소용돌이 속에 공중부양까지 당한 이후에도 피오나는 ‘낮의 미모’를 회복하지 못한다. 뭔가 내 안의 응어리가 한바탕 시원하게 씻겨나간 것 같은 느낌은 분명한데, ‘못생긴 외모’는 그대로다. 이럴 수가. 슈렉의 간절한 사랑에도 불구하고, 그 끈질긴 마법이 풀리지 않은 것일까.




 슈렉 : 사랑해요, 피오나.
 피오나 : 슈렉, 나도 사랑해요. 그런데 이해가 안 되네요. 공주는 아름다워야 하는데, 난 왜 이렇죠?
 슈렉 : 당신은 이미 아름다워요. 

 


   우리가 버린 아브젝트를 우리 안의 창조적 혼돈으로 바꾸는 기술. 그것이야말로 줄리아 크리스테바가 말하는 여성적 힘, 바로 ‘사랑’의 기술일 것이다. 영원히 너의 사랑을 받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지금은 네가 나를 사랑하지만 내 얼굴이 주름살로 뒤덮이거나 나보다 더 매혹적인 대상이 나타나면 네가 나를 떠날 것이 분명하다는 불안감, 나의 선천적인 결핍이 너의 밝은 미래에 어둠을 드리울지도 모른다는 공포……. 이런 것들은 사랑의 ‘아브젝트’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아브젝트를 끌어안고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야말로 사랑의 고수들이 지향하는 ‘커플의 유토피아’가 아닐까.
   서로의 결핍을 통해 타자의 고통을 내 것처럼 앓게 되는 과정을 통해 우리는 동키처럼, 슈렉처럼, 피오나처럼, 그 어떤 결핍이나 단점도 끝내 ‘사랑의 구실’로 변신시키는 연애의 기술을 배운다. 사랑이 원초적으로 품은 불안과 우울, 그 자체가 삶을 아름답게 요리하는 상상력의 에너지원이 되는 순간. 우리의 사랑은 나의 결핍이 도드라질수록, 너의 결점이 유난히 눈에 띌수록, 이상하게도 더욱 완전해지는 즐거운 신비다. 


 

   
 

 나는 여성을 회복할 수 없는 이방인으로 보는 관점에 매료되었다. 그러나 여성에 대한 긍정적인 관점을 원하는 미국의 어떤 여성주의자들은 그러한 관점을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우리는 변화의 동력인 이 영원한 주변성으로 시작하여 긍정적인 개념에 이를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여성성이란, 달이 우리의 정체성이라는 태양의 반대라는 점에서 바로 이 달의 형태와 같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보면 우리 여성이 남성보다 주변성을 더 많이 소유할지는 몰라도, 남성 역시 그것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화해시킬 수 없는 이 부분을 보존하려는 노력으로 우리는 아마도 항상 헤겔이 말한 공동체의 영원한 아이러니일 수 있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태양’의 반대편에 있는 ‘달’로서의 여성은〕 공동체가 폐쇄적이지 않도록 하고, 동질적이고 그래서 억압적이지 않도록 하는 불침번일 수 있다. 즉, 나는 여성의 역할을 일종의 불침번, 이질성, 그래서 항상 감시하고 경쟁할 수 있는 것으로 본다.
 - <줄리아 크레스테바 인터뷰>(1995)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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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lsend 2010-01-19 16: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휴~크리스테바와 함께 하니 <슈렉>이 이렇게 슬픈 영화가 될 수도 있는 거였군요...

니모 2010-01-20 1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나의 결핍과 너의 결점이 넘쳐날 수록 더욱 차오르는 사랑의 신비~!^^

맨손체조 2010-01-20 1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괴물'의 입장을 듣는 것. 우리가 타자화한 것, 배제한 것들의 다름을 이해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