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슈렉>과 줄리아 크리스테바 ⑫

 

12. ‘우울한 결핍’에서 ‘유쾌한 차이’로 (2) 

   
  슬픔은, 그 사람이 좌절감을 느끼기 때문에 적대적으로 생각되는 타인에 대한 숨겨진 공격이 아니라, 상처 입고 불완전하며 텅 빈 원초적 자아의 증거이다. 그러한 상태에 빠진 사람들은 자신들이 공격받았다고 생각하지 않고 어떤 근본적인 결함, 선천적인 결여로 인해 고통받는다고 생각한다.
 - 줄리아 크리스테바, <스스로를 향한 타인들>(1989) 중에서
 
   




  슈렉은 슬픔을 방패로 삼아 타인의 접근을 불허하고, 마침내 거대한 슬픔의 커튼 뒤에 숨어버린다. 오랫동안 슈렉은 슬픔의 벽돌로 지은 마음의 성벽 안에 스스로를 가두었다. 슈렉은 가족도 친구도 연인도 이웃도 없이 오랫동안 자기만의 늪에 갇혀 지냈다.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아’라는 절망은 처음에는 슬픔의 ‘원인’이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스스로 선택한 고립과 후천적 대인기피증의 ‘핑계’로 작용한다. 그에게 슬픔은 자신의 은둔형 외톨이 생활을 정당화하는 구실이 되어버린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자신의 선천적인 결핍, ‘괴물’로 태어난 저주받은 운명 때문이라고 믿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사랑 따윈 필요 없어’라고 결론 내리기에 이르렀다. 그의 유일한 친구는 슬픔이었다.  





   그런 슈렉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 아니 친구가 생겼기에 사랑하는 사람도 만날 수 있었다. 모두가 꺼리는 슈렉의 늪에 처음 찾아와 ‘함께 살고 싶다’고 말하는 동키가 있었기에 슈렉은 모험을 떠날 수 있었고 피오나를 만날 수 있었으며 태어나 처음으로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온갖 갈등과 혼란, 서로 다른 존재들로 가득 찬 세상 밖으로 뛰쳐나가지 않는 한 자폐적 우울의 수레바퀴는 멈추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 슈렉은 자신을 둘러싼 슬픔의 장막을 스스로 거두고 그녀에게 다가가기를 원한다. 파쿼드와의 결혼을 앞두고 조바심과 두려움에 떠는 피오나를 지탱해주는 것은 ‘진정한 사랑’으로 ‘마법’이 풀리게 될 것이라는 동화적 스토리에 대한 불안한 확신뿐이었다.  





   피오나와 파쿼드의 결혼식을 보기 위해 듀록의 모든 시민이 모였다. 파쿼드 군주의 명령에 따라 웃으라면 웃고 박수 치라면 박수 쳐야 하는 듀록의 사람들. 드디어 만인 앞에서 결혼이 성사되었음을 선언하는 순간. 슈렉과 동키는 피오나를 구출하고 슈렉의 진심을 알리기 위해 결혼식장으로 잠입한다. 이 결혼에 불만이 있는 사람이 있으면 누구든 앞으로 나오라는 의례적인 코멘트를 향하여 “불만 있습니다!”라고 선언하는 슈렉. 사람들은 초대받지 않은 손님, 게다가 모두가 두려워하는 괴물 오우거가 나타나자 술렁거리고, 피오나는 반가움과 두려움이 교차하는 복잡한 표정으로 슈렉을 바라본다.



 
 슈렉 : 피오나 공주님,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혹시 제가 너무 늦지 않았나요? (……) 이 결혼은 안 됩니다.
 피오나 : (두려움 반 설렘 반이 뒤섞인 표정으로) 왜죠?
 슈렉 : 왜냐하면, 왜냐하면……. 파쿼드는 왕이 되기 위해서 당신과 결혼하려는 거예요. 그는 당신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에요.
 피오나 : (새치름한 표정으로) 진정한 사랑에 대해서 당신이 뭘 아나요?
 슈렉 : 저……. 저는요.
 파쿼드 : (슈렉이 더듬거리는 틈을 타 슈렉을 조롱하며) 이거 정말 재미있군! 오우거 주제에 공주님을 사랑하다니! (좌중의 ‘폭소’를 억지로 유도하며 슈렉의 마음을 상하게 한다) 괴물과 공주의 사랑이라니! 으하하!
 피오나 : (파쿼드의 ‘폭로’를 통해 드디어 슈렉의 진심을 알게 된 후) 저 사람의 말이 정말인가요? (저물어가는 창밖을 바라보며 이제 자신의 비밀을 밝힐 때가 되었음을 깨닫는다. 이윽고 해가 지고 석양과 함께 점점 변해가는 피오나의 ‘밤의 얼굴’이 드러난다) 저는 이렇게 낮에는 예쁘고 밤에는 못생긴 사람이에요. 이 비밀을 당신에게 보여드리고 싶었어요.




   슈렉은 피오나의 ‘못생긴’ 얼굴에 전혀 실망하지 않고 오히려 마음이 편해진 표정이다. “이제야 모든 오해가 풀렸네요.” 공주가 슈렉을 밀어내는 것이 슈렉이 ‘오우거’이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슈렉. 파쿼드는 피오나의 ‘밤의 얼굴’에 대경실색하지만 어쨌든 피오나를 아내로 맞아야 왕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 슈렉을 추방하고 공주를 다시 성 안에 가두려 한다. “저놈들을 끌어내라! 당장 끌어내라! 이 결혼식은 끝났다. 이제 나는 왕이다! 너를 죽여버리겠다! 슈렉! 내 와이프는 피오나! 그 탑에 다시 갇혀서 여생을 보내도록 하겠다!”

   파쿼드는 분노와 광기에 사로잡혀 슈렉을 처치하고 피오나를 감금하려 하지만, 피오나와 슈렉 사이에는 이미 진정한 사랑을 확인한 커플 사이에서만 오가는 은밀한 환희의 눈짓이 오간다. 그들은 드디어 서로의 ‘우울한 결핍’을 ‘유쾌한 차이’로 탈바꿈시킨 유쾌한 사랑의 기적을 실현한 것이다. 이제 피오나의 평생의 굴레였던 마법의 저주는 드디어 풀릴 것인가.  




 

   
 

크리스테바의 진술에 따르자면, 모든 문학은 일종의 카타르시스이고, 작가가 이질적이고 불결한 것을 배출하는 시도이다. 모든 정화 의식을 가진 성경이 일찍이 이것을 예증했다. 그러나 20세기 문학은 서사적 조직이 얼마나 지속적으로 파열의 위협을 받는 얇은 필름인지를 가장 생생하게 보여준다. 모든 서사물은 허구적 통일성, 즉 단일한 의미와 동일성을 창조하려 한다. 그러나 그러한 통일성이 아브젝시옹의 효과인 한, 그것은 박약할 수밖에 없고, 따라서 그것은 고통의 이야기가 된다.
 - 노엘 맥아피 지음, 이부순 역, <경계에 선 줄리아 크리스테바>, 앨피, 2007, 10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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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fn 2010-01-18 18: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글쵸잉...슬픔이 장기화되면 그 원인은 더 이상 중요치 않게 되어버리죠. 슬픔 자체가 원인이 되어버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