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동화의 철책에 갇힌 주인공들 (1)
동키 : 두 사람 서로 좋아하잖아. 이봐. 슈렉, 감정을 무시하면 안 돼. 그녀에게 네 감정을 말해 줘.
슈렉 : 안 돼. 그녀는 공주야. 나는, 나는……
동키 : 괴물이라고?
오랫동안 성 안에 갇혀 있던 공주답지 않게 우울증의 기미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었던 명랑소녀 피오나. 특히 동화 속 캐릭터 중 하나인 로빈 후드가 나타나 그녀를 슈렉에게서 빼앗아 가려하는 대목에서 명랑소녀 피오나의 진면목이 발휘된다. “전 당신의 구원자입니다! 당신을 구출하러 왔습니다! 저 녹색 괴물로부터!” 잘난 척, 잘생긴 척, 멋진 척은 혼자 다 하는 로빈 후드에게 슈렉이 괴력을 보여주기도 전에, 피오나는 <미녀삼총사>의 유쾌한 패러디 액션으로 로빈 후드 일당을 일거에 퇴치해버린다. 슈렉의 엉덩이에 꽂힌 화살을 빼주며 두 사람 사이에는 로맨틱한 감정이 싹트는데.
이렇게 유쾌 ·상쾌 · 통쾌한 성격을 지닌 피오나는 황혼녘만 되면 히스테리 증상을 보인다. 슈렉, 동키 일행과 함께 듀록으로 가던 중 피오나는 어둠이 밀려오자 겁에 질린 얼굴로 황급히 은신처를 찾는다. 그녀는 저녁마다 ‘괴물’로 변하는 자신의 모습을 아무에게도 보여줄 수 없어 황혼녘만 되면 숨을 곳부터 찾는 것이다. 로빈 후드뿐만 아니라 성을 지키고 있던 거대한 핑크 드래곤도 한방에 기절시킬 것 같은 괴력을 지닌 피오나는 왜 그동안 얌전히 누워 백마 탄 기사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일까.
피오나를 가두고 있었던 것은 핑크 드래곤이나 거대한 성벽이 아니라 왕자가 자신을 구해주면 마법이 풀릴 것이라는 동화 속 환상의 스토리가 아니었을까. 피아노 공주를 옭아매고 있었던 것은 동화의 교과서적 내러티브였다. 영화 <슈렉>은 동화의 낭만적 환상으로부터 ‘해방’되는 두 남녀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피오나는 “내 신랑이 될 파쿼드 군주는 어때요?”라고 물어보면서도 사실 자신을 구해준 ‘진짜’ 영웅 슈렉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다.
피오나 : (슈렉이 구워주는 고기를 맛있게 뜯어 먹으며) 이게 뭐죠?
슈렉 : 들쥐에요, 들쥐 바비큐.
피오나 : 그래요? 맛있어요.
슈렉 : 들쥐국을 해 먹어도 맛있어요. 자랑하려는 건 아니지만 제가 끓인 들쥐국은 정말 맛있어요.
피오나 : (슈렉과의 이별을 아쉬워하는 눈빛으로) 내일 밤에는 조금 다르게 식사를 하고 있겠군요.
슈렉 : 언제 절 보러 늪으로 놀러 오세요. 맛있는 요리해 드릴게요. 개구리 수프, 생선눈 타르트, 말만 하세요.(……) 저 석양을 보세요. 정말 아름답죠?
피오나 : 석양? 이런, 이런! 늦었어요. 정말 늦었어요.
슈렉 : 왜 그래요? 잠깐만요, 이제 알거 같아요. 어둠을 두려워하시는 거죠?
피오나: 네, 맞아요! 정말 무서워요. 안으로 들어가는 게 좋을 거 같아요.
슈렉은 태어나 처음으로 타인에게 ‘우리 집에 놀러 오세요’라는 말을 한다. 사랑스런 피오나는 누구도 들이고 싶지 않은 슈렉의 늪으로 초대받은 첫번째 주인공이 되었다. 하지만 슈렉은 아직 두렵다. 파쿼드 군주와의 ‘약속’도 약속이지만 피오나가 정말 자신을 좋아하는지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녀가 나를, 이 괴물을 사랑할 수 있을까’라는 공포를 딛고, 아무도 우리를 축복해주지 않을 거라는 불안을 딛고, 슈렉과 피오나는 사랑에 빠질 수 있을까. 백마 탄 왕자에 대한 피오나의 상상이 틀렸듯이 우아하고 얌전하게 왕자님만을 기다리는 공주에 대한 상상도 틀렸다. 우리가 ‘그러리라’고 믿었던 공주와 왕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 시대의 지배적 담론에 맞게 변형된 공주와 왕자의 전형이 존재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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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씹어 먹은 아동 동화는 아직 우리 위장 속에 들어 있다. 아동 동화는 우리의 진정한 정체성이다. 백설공주와 그녀를 구해준 영웅 왕자는 우리의 두 가지 거창한 픽션이다. 이 두 픽션 사이에서 우리에겐 정말이지 별다른 승산이 없었다. (……) 소년들은 백마에 올라타고 난쟁이를 찾아가서 백설공주를 사오는 꿈을 꾸고, 소녀들은 시간증(屍姦症) 환자의 욕망의 대상(순결한 희생양인 잠자는 공주, 최고로 어여쁜 살덩이, 잠자는 상품)이 되기를 소망한다. 우리는, 자기도 모르게, 때로는 알지만, 원하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우리가 배웠던 역할을 연기한다.
- 안드레아 드워킨Andrea Dworkin, <여성혐오Women hating>, Plume, 197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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