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슈렉>과 줄리아 크리스테바 ⑥

 

6. 코라(chora) : 내가 버린 나의 가능성들의 총집합 (2)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우리는 좋아하지 않습니다. 솔직히 우리는 그러한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래도 최소한 이 괴물은 신비스럽잖아요?
 - 영화 <미녀와 야수> 중에서, 야수를 죽이려는 주민들의 목소리 
 
   

   슈렉은 동키와 함께 피오나 공주를 구하러 떠난다. 이 모험의 첫번째 난관은 거대한 용암 위에 펼쳐진 흔들다리를 건너는 것이다. 고소공포증이 도진 듯 벌벌 떠는 동키를 보며 슈렉은 우리가 함께이니 괜찮다고 말해준다. “동키, 내가 바로 옆에 있잖아, 걱정 마. 천천히 건너가면 되는 거야. 밑을 보지 말구.” 아래를 쳐다보지 말라는 슈렉의 경고를 어긴 동키는 두려움에 질려 더 이상 못가겠다고 버티고, 슈렉은 특유의 재치를 발휘해 동키가 오히려 다리를 먼저 건널 수 있도록 도와준다. 동키가 절대로 할 수 없다고 생각하던 일이, 슈렉과 함께라면 가능해진다. 

   마침내 성에 도착한 슈렉과 동키는 흩어져서 용과 공주를 찾는다. 공주가 있는 계단을 찾던 동키는 오히려 거대한 용을 만나고, 흉측한 용이 ‘남자’일 거라고 생각했던 동키는 뜻밖에 용이 ‘핑크빛’ 얼굴을 가진 여성임을 알게 된다. 용이 거대한 이빨을 선보이며 동키를 금방이라도 꿀꺽 삼킬 태세를 취하자 동키는 기지를 발휘해 살아남을 궁리를 한다.



동키 : 동키 : 오우, 이빨이 정말 크시네요. 이빨이 눈부시게 하얗고 반짝거리네요. 자주 들으시겠지만 이빨이 정말 하얗고, 미소도 정말 눈부시고요. 그리고 민트 냄새도 나는 것 같아요. 저…… 그리고…… 당신도 잘 알듯이…… 당신은 여자 용이시군요. 오우, 정말 여성다운 아름다움이 가득해요. 정말 아름다우세요.



   동키는 살아남기 위해 과장된 연기력을 발휘한 것이지만 우리의 핑크 드래곤에게는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들어보는 ‘칭찬’이다. 핑크 드래곤은 동키를 잡아먹으려던 시늉을 그치고, 갑자기 기다란 속눈썹을 우아하게 깜빡이며 그녀의 ‘여성적’ 매력을 마음껏 발산한다. 그녀가 여성으로서 아름답고 매력적이라는 칭찬은 그녀도 몰랐던 그녀 안의 여성성을 발굴해준 셈이다. 슈렉은 동키의 두려움을 사라지게 함으로써 동키의 코라를 일깨우고, 동키는 핑크 드래곤의 여성성을 발굴함으로써 드래곤의 코라를 일깨운다. 이제 피오나가 슈렉의 코라를, 슈렉이 피오나의 코라를 일깨울 차례다.



슈렉 : (드디어 공주를 찾았다는 표정) 당신이 피오나 공주님인가요?
피오나 : (꿈꾸는 듯한 표정으로) 저를 구해줄 용감한 기사를 기다리고 있어요.
슈렉 : (무뚝뚝하게) 그렇군요, 갑시다!
피오나 : 잠깐만요, 기사님! 처음 만나는 건데 뭔가 아름답고 로맨틱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슈렉 : (피오나의 손을 잡아채어 얼른 데려가려 한다) 네,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어요.
피오나 : (자신과 함께 계단을 뛰어내려 가려는 슈렉에게 놀라) 잠깐만요? 뭐하시는 거예요? 저를 안아든 다음에 밧줄을 타고 내려가서 백마에 올라타야죠! 이 순간을 추억에 남겨야 해요! 시를 낭송해 주세요! 발라드! 소네트! 아무거나!
슈렉 : (귀찮다는 듯이) 싫어요!
피오나 : (실망을 감추지 못하며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저를 구출해 준 기사의 이름이라도 알려주실 수 없어요?
슈렉 : 슈렉입니다.
피오나 : (아직 살아 날뛰고 있는 용을 바라보며) 아직도 용을 안 죽였어요?
슈렉 : 그럴 예정이에요, 갑시다!
피오나 : 이게 아니에요! 당신이 직접 뛰어들어서 용과 싸우는 거예요! 다른 기사들은 다 그랬어요!



   피오나의 머릿속에는 동화적 환상이 완벽하게 구현되어 있다. 자신을 구하러 오는 기사는 완벽한 외모와 용감한 심성을 지닌 왕자님이어야 하고, 왕자님은 자신을 구하기 전에 미리 용을 무찔러야 했다. 그런데 지금 눈앞의 이 기사님은 투구를 벗어 자신의 얼굴을 보여주지도 않고, 자신에게 아름다운 시를 낭송해주며 로맨틱한 감정을 불러일으키지도 않는다. 게다가 백마 탄 왕자님은커녕 우리의 귀하신 공주님을 몸소 두발로 뛰어다니게 만드는 얼굴 없는 기사님이라니. 왜 동화 속의 이야기처럼 나의 멋진 라이프스토리가 펼쳐지지 않는 걸까, 피오나는 혼란스럽기만 하다.  

   <슈렉>은 디즈니 월드가 추방한 아브젝트의 부분적 귀환이라 할 수 있다. 슈렉은 <미녀와 야수>에서 ‘야수’처럼 다시 ‘왕자’로 돌아갈 희망이 전혀 없다. 슈렉은 괴물인 채로, 흉측한 채로, 여전히 매력적이고 사랑스럽다. 슈렉은 백인이 아니며 귀족이 아니며 왕자도 아니고 꽃미남도 아닌, 그야말로 디즈니의 주인공스러운 구석이 조금도 없는 사상 초유의 캐릭터였던 것이다.

   
 

미키 마우스의 세계는 가끔 무섭기는 하지만 안전하며, 비폭력적이며, 비이데올로기적인 어린이의 세계이며 여기서 모든 이야기는 행복한 결말을 맺는다. 어떤 디즈니 영화도 어린이에게 악몽을 꾸게 하거나 어른들이 심각하게 생각할 여지를 주지 않는다. 미키의 모든 존재는 모든 이를 위한 사랑과 안전에 그 준거를 두고 있다. 그의 모험에는 어떤 철학적인 함축이 담겨 있지 않고 영화에서 언급한 것 이상의 것은 없다. 미키의 매력은 모든 것이 잘 되며, 온유한 자가 상속받을 것이며 순진한 자가 승리를 거둘 것이라고, 관객들에게 끊임없이 안심시켜주는 데 그 뿌리를 두고 있다.
 - 로널드 오트먼Ronald Oatman, <Journal of Popular Film and Television> 24권 2호, 1996, 8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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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모 2010-01-06 16: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핑크 드래곤, 너무 큐트해요~ ㅋㅋ

ehdrmf 2010-01-07 1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어릴 때 좋아했던 애니메이션을 지금 와서 보면 가끔 끔찍할 때가 있죠. 미녀와 야수, 미키마우스, 라이온 킹...특히 라이온 킹에서는 내심 '스카'가 멋졌음 ㅋㅋ

바밤바 2010-01-13 2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현실의 과도한 낙관주의로 현실을 이겨내려는 방향성의 기저에도 로널드 오트먼의 아포리즘이 작용한 듯 하네요. 잘 읽었습니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