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매트릭스>와 미르치아 엘리아데  ⑩

 

10.  “미안해, 난 그냥 평범한 사람이야.” vs “아니, 그게 너의 비범함이야.” (2)

   
 

 우리는 모순으로 인해 비옥해진다.   
  

 - 괴테

 
   
   
   
 

      
  사랑이 머리에서 가슴까지 내려오는 데 70년이 걸렸다.     


 - 김수환 추기경

 
   

    
   내가 바로 ‘그’여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자 네오는 비로소 자유로워졌다. 내가 반드시 ‘그’가 되어야 한다는 의무감도, 내가 ‘그’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불안도 잊고, 오직 소중한 친구를 살려야 한다는 생각으로 꽉 찬 네오. 오라클의 예언이나 네오의 엄청난 능력 때문만이 아니라, 네오가 자신의 삶을 잊고 오직 모피어스를 살려야 한다는 마음을 갖게 되는 순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네오는 진정한 ‘그’가 된다. 이제 네오는 세상에서 제일 멀다는 그 거리, ‘마음과 머리 사이’의 거리를 극복했다. 이제 마음과 육체의 거리를 좁히는 일이 남았다. 마음처럼 움직이지 않는 육체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다면. 그렇게만 된다면 네오는 이제 매트릭스의 중력장에 갇힌 스미스 일당뿐 아니라 마지막 남은 인간의 땅 ‘시온’의 희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미디어가 만들어낸 매트릭스의 촘촘한 그물에 갇혀 사는 현대인에게는 ‘마음과 머리’ 사이의 거리만큼이나 ‘마음과 육체’ 사이의 거리가 멀어졌다. 소파에 누워 하루 종일 텔레비전만 봐도 충분히 ‘하루 분의 경험’을 다 해낸 것 같은 가상의 충족감. 몇 시간의 인터넷 웹서핑만으로도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계’의 진실을 다 알아버린 것 같은 환상적인 착시. 우리는 점점 육체의 생생한 촉각과 멀어지며 규격화된 문명의 언어와 이미지에 길들여진다. 네오는 매트릭스 안으로 들어가 모피어스를 구해내는 과정에서 자신을 길들인 그 미디어 매트릭스의 익숙한 감각과 싸우는 것이 아닐까. 네오는 모피어스를 구하기 위해 매트릭스 최고 정예 요원들과 ‘몸으로’ 싸우면서, 그들의 ‘가상의 신체’와 싸우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통해 평생 동안 한 번도 마음대로 쓰지 못한 자신의 육체를 ‘제대로’ 쓰는 방법을 배운다.

   스미스 : 이곳에 있는 동안 깨달은 사실이 있어. 너희들의 종족을 분류하다가 영감을 얻었지. 너희는 포유류가 아니었어. 지구상의 포유류들은 본능적으로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데 인간들은 안 그래. 한 지역에서 번식을 하고 모든 자연 자원을 소모해 버리지. 그리고 또 이동하는 거지. 지구상에는 똑같은 방식의 유기체가 있어. 그게 뭔지 아나? 바이러스야. 인간은 질병이야. 바로 암이지. 너희는 역병이고 우리가 치료제다. 
   모피어스 : (고문에 지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점점 정신을 잃어간다.)
 

   스미스는 인류 문명의 치명적인 오류를 날카롭게 지적하지만 ‘너희는 역병이고 우리가 치료제다’라는 결론은 그리 만족스럽지 못하다. 스미스는 마치 <파우스트>의 메피스토펠레스처럼 인간의 욕망에 기생하면서 인간의 오류를 들춰내는 존재다. 모피어스와 네오는 스미스라는 강력한 적을 통해 배운다. 네오는 스미스 일당과 몸으로 싸우면서 자신도 모르게 점점 강해지는 것을 느낀다. 트리니티는 매트릭스의 정예요원들처럼 신출귀몰한 속도로 움직이는 네오의 액션에 감탄한다. “어떻게 그랬지? 네가 그들처럼 움직였어. 그렇게 빠른 건 처음 봐!” 네오는 이제 여유롭게 웃으며 으쓱한다. “아직 멀었어.” 

   네오는 적과 싸우면서 진정으로 강해지는 법을 배운다. 자기가 강해지는 것을 몸으로 느끼면서 자신이 아직 멀었다는 것도 동시에 깨닫는 네오의 눈부신 비약. 네오는 지금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 적과 싸우면서 진짜 ‘그’가 되는 중이다. 혹시 내가 ‘그’가 아닐지라도 상관없이 그 길을 가는 것, 내가 선택받은 자가 아닐지라도 내가 아는 최선의 길을 발견하고 그 길로 향해 나아가는 용기. 그것이 네오를 ‘그’로 만든다. 드디어 트리니티와 네오는 천신만고 끝에 모피어스를 구해낸다.

  마지막 의혹을 떨쳐버리지 못하던 트리니티도, 네오의 능력에 반신반의하던 탱크도, 이제는 네오가 ‘그’임을 믿기 시작한다. “네오가 바로 ‘그’였어!” “이젠 믿겠나, 트리니티?” 아직도 자신이 ‘그’라는 것을 믿지 못하는 네오는 모피어스에게 자신은 ‘그’가 아니라고 말하려 한다. 그러자 모피어스는 미소 지으며 말한다. “오라클은 네게 필요한 말을 한 거야. 너도 나처럼 곧 알게 돼. 길을 아는 것과 길을 걷는 것의 차이를.”



   길을 아는 것과 길을 걷는 것의 차이. 그것이 머리와 마음의 거리, 그리고 더 나아가 마음과 육체의 거리가 아니었을까. 네오의 뛰어난 학습능력이나 엄청난 해킹능력이 아니라, 내 목숨이 아니라 너의 목숨을 구하려는 네오의 진심이 그를 진정한 ‘그’로 만들어준 것이 아닐까. 엘리아데는 이 순간을 ‘존재론적 이행’이라 불렀다. 평범한 회사원 토마스 앤더슨이 모피어스의 전화를 받는 순간, 그가 ‘하얀 토끼’를 따라 트리니티를 만나는 순간, 파란 약의 유혹을 뿌리치고 빨간 약을 삼키는 순간, 자신이 죽을지도 모르지만 모피어스를 구하려고 결심하는 순간. 그 모든 순간이 네오의 ‘존재론적 이행’을 위한 ‘세속적인 세계의 파열’이었다. 이 존재론적 이행의 끝자락에는, 나보다 타인이 중요하다는 것을 인정함으로써 스스로가 자신도 모르게 위대해지는 순간이었다. 그것은 네오가 스스로의 평범함을 인정하는 순간이었고, ‘나의 존재’에 가려 미처 보이지 않던 ‘너의 존재’를 끌어안는 순간이었다.  

   
 

   거룩한 것이 공간 속에 자신을 현현시키는 곳에서 실재가 모습을 드러내며 세계가 출현한다. (……) 거룩한 것의 출현은 단지 세속적인 공간의 형태 없는 유동성에 고정점을 투사하고, 카오스에 중심을 부여하는 것으로만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또한 지평의 돌파를 가져온다. 즉 우주적인 여러 차원 사이(지상과 천상 사이)의 교섭을 열어주고, 하나의 존재양식에서 다른 존재양식으로 가는 존재론적 이행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세속적인 공간의 균질성에 이 같은 파탄이 일어남으로써 하나의 중심이 창조되는데, 그것을 통하여 초세계적인 것과의 교섭이 정립되며, 결과적으로 세계가 창건된다.  

 - 엘리아데, 이동하 역, <성과 속>, 학민사, 1996, 57쪽. 

 
   
 


댓글(2) 먼댓글(0) 좋아요(4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love hurts 2009-12-21 15: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길을 아는 것과 길을 걷는 것의 차이....그걸 깨닫는다면 인생의 좌충우돌이 절반 이상 확 줄어들겠지요? ^^

tnsehddl 2009-12-23 0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캬. 김수환 추기경의 말씀이 매트릭스에 어울릴 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