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매트릭스>와 미르치아 엘리아데 ②

 

2. ‘문턱’을 넘는 순간, 내 안의 신화는 시작된다 (2)

   
 

인간은 망가진 채로 태어나 수리를 받으며 살아간다. 그리고 신의 은총이 바로 그 접착제이다.  


 - 유진 오닐

 
   

   옛사람들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각자 자기 문화에 어울리는 성소(聖所)를 찾아 기도를 드림으로써 하루를 시작했다. 현대인은 ‘로그인’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우리의 일상을 알기 위해서는, 우리의 대략적인 ‘뇌 구조’를 분석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의 컴퓨터를 켜서 ‘즐겨찾기’ 리스트를 살펴보면 된다. 컴퓨터는 우리의 관심사와 우리의 욕망의 좌표를 알려주는, 너무도 노골적인 꿈의 ‘검색 히스토리’를 내장하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고 해서 애꿎은 컴퓨터를 탓할 필요는 없다. 신화학자 나카자와 신이치의 연구에 따르면 인간의 인지구조는 신석기 시대 이후로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았다. 다만 인식의 ‘미디어’가 바뀐 것이다. 옛사람들이 ‘자연’을 미디어로 하여 사유의 패턴을 만들어나갔다면, 현대인은 컴퓨터를 비롯한 각종 기계적 미디어를 통해 정보를 수합하고 사유의 그물을 짠다. 관건은 그렇게 얻은 정보를 어떻게, 어디에, 언제 활용할 것인가를 ‘선택’하는 문제다. 어쩌면 이제는 컴퓨터야말로 우리 존재의 ‘문지방’일지도 모른다. 컴퓨터는 현대인의 새로운 ‘성소(聖所)’다. 
 


   영화 <매트릭스>는 컴퓨터를 통해 사고하고 사랑하고 창조하게 된 인간이 재구성해낸 현대사회의 새로운 신화 텍스트가 아닐까. 영화 <반지의 제왕>처럼 <매트릭스>는 일종의 ‘인공 신화’의 요소들을 간직하고 있다. <매트릭스>의 스토리와 배경은 SF영화의 패턴을 따르고 있지만 등장인물의 이름(네오, 트리니티, 모피어스 등등), 영웅 신화의 전형적 스토리텔링을 간직하고 있는 시나리오는 <매트릭스>의 신화적 성격을 증언한다. 네오는 컴퓨터를 통해 자신의 신성한 임무를 최초로 깨닫게 된다. 컴퓨터가 부르는 그의 이름 ‘네오’를 통해 그는 ‘현실이라는 꿈’에서 깨어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는 지금까지 컴퓨터를 통해 ‘이 세상이 뭔가 잘못된 것 같은 막연한 느낌, 내가 잃어버린 알 수 없는 무언가를 찾아야한다는 맹렬한 환상’을 추격해왔다. 컴퓨터는 그에게 있어 성전이자 성소이자 성경인 셈이다.

   그런데 컴퓨터를 통해 세계의 비밀과 무한 접속할 수 있는 토마스의 ‘능력’만으로는 ‘성’과 ‘속’ 사이에 놓인 문턱을 뛰어넘을 수 없다. 세속의 인간 토마스 앤더슨이 신성의 이름 ‘네오’를 향한 문턱을 넘기 위해서는 세속의 집착을, 신성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내야 한다. 그는 매력적인 여성의 몸에 새겨진 문신으로 형상화된 ‘하얀 토끼’의 유혹은 쉽게 따르지만 전화기 저편으로 들려오는 모피어스의 목소리를 따라 목숨을 걸고 고층건물의 옥상 문턱을 넘어서지는 못한다. 휴대폰 너머로 모피어스는 다급하게 외친다. “비계를 타고 옥상으로 가!” 아직 ‘네오’가 되지 못한 ‘토마스’는 영문을 알 수 없는 이 미궁의 추격전을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말도 안 돼! 이건 미친 짓이야!” 모피어스는 다그친다. “방법은 두 가지다! 비계를 이용해서 옥상으로 올라가든가, 아니면 놈들한테 잡히든가. 선택은 네 마음이야.”
   토마스는 까마득한 죽음의 골짜기가 펼쳐진 발아래를 내려다보며 두려움에 떤다. “미친 짓이야! 이게 다 뭐야? 내가 뭘 어쨌기에? 난 아무 짓도 안 했어. 죽겠군, 젠장! 난 못해!” 자신을 추격하는 정체 모를 선글라스 신사들(스미스 일당)의 시선을 피해 달아나고는 싶지만 떨어지면 바로 죽을 것이 확실한 고층건물의 옥상을 향해 맨몸으로 올라갈 용기를 내기는 쉽지 않다. 신성을 찾아 헤매기는 했지만 막상 신성의 미션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용기와, 그리고 ‘내가 바로 그’라는 믿음이 필요한 것이다. 토마스는 끝내 스미스 일당에게 붙잡히고 만다. 토마스는 스미스에게 붙잡혀 심문을 당하고 나서야 모피어스와 트리니티의 말을 ‘믿지 못한’ 자신의 선택을 후회한다. 스미스는 모피어스와 네오가 동시에 경계하고 있던 ‘매트릭스’의 수문장이었던 것이다.


   스미스 : 우린 한동안 자넬 지켜봐왔다. 두 개의 인생을 살고 있더군. 하나는 소프트웨어 회사의 프로그래머인 토마스 앤더슨. 떳떳한 시민으로서 세금도 내고 집주인 아줌마의 쓰레기도 버려주지. 다른 하나는 네오라는 이름의 해커로서 온갖 컴퓨터 범죄는 죄다 저질렀더군. 둘 중 하나는 앞날이 보장돼 있고 다른 하나는 미래가 없어. 아주 솔직하게 털어놓겠네. 우린 자네가 필요해. 어떤 자가 연락해왔지? 모피어스라는 자 말이야. 그에 대해 자네가 아는 건 전부 무시해. 정부에서도 그자를 가장 위험한 인물로 찍었으니까. 동료들은 내가 자네 일로 시간낭비를 한다고 봐. 하지만 난 자넬 믿네. 자네가 새 출발을 하게 도와 줄 수도 있어. 자넨 테러범 체포를 도와주기만 하면 돼.
   네오 : (시니컬하게 미소를 지으며) 귀가 솔깃하네요. 더 좋은 게 있는데 말이죠. (가운데 손가락을 당당히 펴 보이며 엿 먹으라는 제스쳐를 취하고) 당신은 이거나 먹고! 내 전화나 돌려줘!
   스미스 : 이런, 앤더슨. 날 실망시키는군.
   네오 :  그런다고 겁낼 줄 알아? 난 내 권리를 알아! 전화나 내놔!
   스미스 : 얘기도 못 할 텐데 전화가 무슨 소용이지? 좋든 싫든 간에 넌 우릴 도와야 할 걸.
 (갑자기 네오의 ‘입술’이 점점 없어지며 그 어떤 ‘언어’로도 소통할 수 없는 상황이 닥쳐온다. 그들은 우격다짐으로 가재를 닮은 이물질을 네오의 배꼽으로 집어넣어 그를 경악케 한다. 네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기 위한 도청 기계였다. 네오는 이 모든 끔찍한 상황이 악몽이라고 믿고 싶다.) 

   모피어스는 포기하지 않고 네오를 향해 접속을 시도한다. 스미스는 계속 그를 ‘토마스’로 부르지만 모피어스는 줄기차게 그를 ‘네오’라고 부른다. 스미스 일당이 원하는 것은 고분고분한 모범 회사원이자 성공이 보장되어 있는 세속의 인간 ‘토마스’였고 모피어스가 원하는 것은 매트릭스의 음모와 싸울 운명의 전사이자 신성의 인간 ‘네오’였던 것이다. 모피어스는 트리니티를 통해 네오의 몸에 장착된 끔찍한 기계장치를 없애버리게 만들고 네오를 자신의 거처로 초대한다. 트리니티는 모피어스를 향해 네오를 안내하면서 그에게 당부를 한다. “네오, 날 믿어야 해. 그리고 정직해야 돼. 모피어스를 과소평가하지 마.” 그녀의 당부는 <매트릭스>의 중요한 테마 중 하나다. 바로 ‘믿음’이다.
   내가 신성한 세계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믿음, 내가 신성한 가치의 창조에 참여하는 존재라는 믿음, 그리고 내 곁에 일어나는 ‘이해할 수 없는 비논리적 사건들’이 바로 이 세계를 엮어내는 진실의 또 다른 모습이라는 믿음. 모피어스는 두려움에 떨고 있는 네오의 표정을 보며 여유롭게 말한다. “자넨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된 기분이겠지? 토끼 구멍으로 떨어진 것 같지?” 네오는 속내를 들킨 듯 부끄러운 표정으로 대답한다. “그런 것 같아요.” 그들은 이렇게 첫 만남을 시작한다. 

   
 

 거룩한 공간의 계시는 고정점을 획득하고, 따라서 균질성의 카오스 속에서 방향성을 확보하며, ‘세계를 창건’하고, 참다운 의미에서 그 속에 거주하는 것을 가능케 한다. 반대로 세속적인 경험은 공간의 균질성을, 따라서 그것의 상대성을 유지시킨다. 이때에는 고정점이라는 것이 더 이상 유일한 존재론적 지위를 향유하지 못하기 때문에 진정한 방향성이란 불가능해지고 만다. 그것은 나날의 필요성에 따라서 나타났다가 사라졌다가 하는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여기에는 더 이상 어떤 세계도 존재하지 않으며, 단지 부서진 우주의 단편들, (……)무정형의 더미만이 있게 된다. 이 속에서 인간은 산업사회에 편입된 존재로서의 의무에 따라 움직이고, 그것에 지배당하여 조종받게 되는 것이다.  


 -엘리아데, 이동하 역, <성과 속>, 학민사, 1996, 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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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손체조 2009-12-08 15: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색, 계>로부터 시작되어 <굿 윌 헌팅>의 믿음, <쇼생크 탈출>의 믿음, <원령공주>의 믿음, 그리고 <매트릭스>의 믿음. 여울님에게 그리고 나에게 믿음이란???

tnfltnfl 2009-12-08 15: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유진 오닐의 명문장. 가슴 시립니다. 오늘따라 신의 은총으롬 만든 접착제가 왜 이렇게 안붙지? 꼭 오즈의 마법사에 나오는 깡통로봇처럼 몸이 안 풀립니다. 덜그럭덜그럭 휘청휘청 ㅋㅋ

니모 2009-12-09 14: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몇 번을 봐도 그때마다 새로운 신기한 영화. 그러나 볼 때마다 늘 느끼는 거지만, 정말 환상의 캐스팅! 특히 트리니티 역의 캐리 앤 모스 짱 멋있음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