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달리는 소녀>와 질 들뢰즈 ②

  

2. 어제의 나는 과연 오늘의 나와 같은 존재일까

   
 

헛되이 보내버린 이 시간 안에 진실이 있다는 것을 마지막에 가서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배움의 본질적인 성과이다. 
  

- 질 들뢰즈, 서동욱 · 이충민 역, <프루스트와 기호들>, 민음사, 2004, 47쪽. 

 
   

    고층빌딩이 조각조각 찢어버려 토막 난 하늘에 익숙해진 관객의 눈은 문득 <시간을 달리는 소녀> 속의 시리도록 푸르른 하늘이 한없이 낯설다. 우리가 저토록 아름다운 하늘을 머리에 이고 살았던가. 하늘뿐만이 아니다. 그저 평범한 고등학교 교정으로 보이는 공간 구석구석이 문득 고풍스러운 유물처럼 신비한 아우라를 뿜어내고, 칠판에 적힌 글씨에 드리운 석양의 그림자조차 우주의 비밀을 간직한 듯 느닷없는 애수를 자아낸다. 인물의 액션과 대사가 그려내는 눈부신 역동성의 배경이 되는 시공간은 ‘학원물’ 특유의 명랑함이 아니라 애잔한 정적으로 가득하다. 이 흥미로운 애니메이션은 ‘분명한 현재’를 마치 오래전부터 그리워해오던 머나먼 옛날처럼 ‘노스탤지어의 시간’으로 역전시킨다.   

   영원히 되돌아오지 않을 찰나의 순간이 0.1초만 지나도 아득한 과거로 사라질 듯한 조바심. 관객은 마코토와 치아키와 고스케의 학창 시절을 보여주는 단 몇 개의 장면만으로 이미 ‘교복을 입고 건들거리던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가 있다. 관객이 마코토와 동년배라면 그녀와 실시간으로 겪고 있는 이 생생한 현재가 왠지 문득 그리울 것이다. 관객이 마코토보다 더 어리다면 그는 아직 겪어보지도 못한 미래를 그리워하게 될 것이다. <시간을 달리는 소녀>는 분명 아득한 과거가 아닌 동시대의 현재를 그려내지만, 그 선명한 현재를 아련한 과거처럼 못 견디게 그립도록 만드는 힘이 있다.

   덜렁이 소녀 마코토가 ‘머피의 법칙’에 제대로 걸려든 어느 날, 7월 13일. 특별한 걱정이나 엄청난 고민 없이 그럭저럭 즐겁게 학교생활을 하고 있던 마코토에게 정말 되는 일이라곤 하나도 없는 날이 찾아온다. 아침부터 그토록 자전거 페달을 밟았는데도 지각을 했으며, 아무런 준비도 안 했는데 갑자기 쪽지 시험을 보질 않나, 가정 실습 시간에 실수를 해서 불을 낼 뻔하질 않나, 모르는 남자아이와 호되게 부딪쳐 우당탕탕 넘어지질 않나……. 그런데 바로 이날 마코토는 과학실에서 갑자기 넘어져 호두처럼 생긴 신기한 물체를 만나게 된다. 이 호두껍데기가 마코토의 뒤통수 아래서 깨지는 순간 그녀의 인생은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에 휘말린다.
    같은 날 마코토는 칠판 위에 마치 계시처럼 박혀 있는 문장을 보게 된다. Time waits for no one. 이 문장을 바라보는 말괄량이 소녀 마코토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진다. 마코토는 친구 유리와 대화를 하며 문과에 갈지 이과에 갈지 고민한다. 아직 자신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는데 문과와 이과 중 반드시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바로 그 순간. 그토록 어린 나이에 운명의 지형도를 완전히 바꿀 수 있는 엄청난 결단을 내려야 했던, 그 당혹스런 시간 속으로 우리는 함께 빨려 들어간다. 우리의 뒤꽁무니를 맹렬히 추적하는 시간을 뒤로한 채, 우리는 어느새 이곳까지 흘러 왔다. Time waits for no one. 시간은 망설이고 주저하는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았으니까.

   하루 종일 좌충우돌했던 하루를 마감하고 이제 집으로 가려는 마코토에게 또 한 번의 끔찍한 ‘머피의 유령’이 도사리고 있다. 기찻길까지 내려오는 급경사 길에서 신나게 질주하던 중 자전거 브레이크가 고장 나버린 것이다. 이 순간이 마치 영원히 이어질 듯, 마코토의 몸은 하늘 높이 떠올라 정지된다. 죽기 직전의 마코토는 생각한다. “오늘이 만약, 오늘이 만약 평소와 다름없었다면 아무 일도 없었을 텐데. 하지만 잊고 있었어. 오늘은 최악의 날이란 걸. 설마 했는데 죽는구나. 오늘이 마지막이구나. 이럴 줄 알았으면 더 일찍 일어날걸. 늦잠을 안 잤으면 지각도 안 했을 테고 튀김도 더 잘 튀겼을 거고 어리바리한 남자애한테 부딪히지도 않았을 테지…….”
    그런데 눈을 떠보니 이상하다. 난 이미 죽은 줄 알았는데, 벌써 유체이탈에 성공한 것일까. 아니다. 그게 아니다. 이 아줌마와 꼬마는 아까 사고 나기 직전에 봤던 그 사람들인데. 왜 나는 몇 분 전의 시간으로 돌아간 것일까. 꿈일까. 현실이라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지? 고민을 미처 다 마치기도 전에 아줌마의 엄청난 핀잔이 날아온다. “야! 눈을 어디다 달고 다녀! 사과해. 사과하란 말이야!” 마코토는 이모에게 달려가 이 모든 괴상한 정황을 미주알고주알 설명하며 흥분한다.

   이모는 태연히 웃으며 마치 아무 일도 아니란 듯이 설명한다. “마코토, 그건 타임  리프야.”  “타임 리프?”  “전철에 치일 뻔했다며? 자전거 채 날아가서? 그런데 정신이 들고 보니 사고 나기 직전으로 돌아와 있었고. 그게 타임 리프야. 시간이란 건 불가역이거든. 시간은 돌아오지 않잖아. 그러니까 돌아온 건 마코토 너 자신이야. 네가 시간을 뛰어넘어 과거로 되돌아온 거야.” 마코토는 마치 이미 겪어본 일을 이야기하듯 술술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는 이모의 반응에 또 한 번 놀란다. 이모는 여유롭게 웃으며 덧붙인다. “그렇게 특이한 건 아냐. 네 또래 여자애들한테는 종종 있는 일이니까.”
    마코토는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절대 그럴 리 없다고 말한다. 이모는 장난스레 웃으며 말한다. “타임 리프는 나한테도 있었는걸?”(알고 보면 마코토의 이모는 원작소설에서 타임 리프를 경험했던 바로 그 소녀다) “예를 들어 일요일에는 늦잠을 자잖아. 그냥 누워만 있고 싶다는 생각도 하고. 그러다 정신이 들면 날이 이미 저물었어. 화들짝 놀라지. 내 소중한 일요일은 어디로 간 거지?” 이모는 타임 리프를 마치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일상적인 일인 것처럼 세련되게 얼버무린다.

   소녀는 이모의 말이 농담인지 진담인지 헷갈리며 더 큰 혼란에 빠진다. 어제의 나는 정말 오늘의 나인가. 아까 죽을 뻔했던, 아니 죽은 줄로만 알았던 나 자신과 지금 멀쩡히 살아 있는 나는 과연 같은 존재인가. 과거가 지나면 현재가 되고 현재가 지나면 미래가 되는 것이 시간의 규칙이 아니었던가. 천만다행으로 죽기 전의 나로 돌아왔지만 아까와 다른 또 다른 시간에 도착한 나는 과연 과거에 있는 걸까, 미래에 있는 걸까. 내가 한 것이 정말 타임 리프가 맞는다면 태어나서 가장 운 나쁜 날이 될 뻔했던 날이 불과 몇 초 사이에 태어나서 가장 신기하고 흥미로운 날로 변한 셈이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나라는 존재는 과거→현재→미래를 향해 순차적으로 달려온 것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비논리적으로 공존하는 알 수 없는 시간에 와 있는 것이 아닌가. 

   시간이 그저 쏜살같이 흐르는 정도가 아니라, 마치 드라이아이스처럼 고체에서 액체를 거치지 않고 바로 기체로 승화해버린 듯한 느낌. 그것이 우리가 초능력 없이도 겪는 타임 리프 아닐까. 내 소중한 10대는 어디 간 걸까. 왜 나에겐 어린 시절의 좋은 추억이 없는 것일까. 아, 왜 나는 연애의 추억도 없이 이별만 해댄 걸까. 이 모든 지나간 시간에 대한 덧없는 상실의 감정, 돌이킬 수 없는 것에 대한 절박하지만 때늦은 그리움. 이것이 우리에게 매일매일 일어나는, 초능력 없이도 가능한 영혼의 타임 리프 아닐까.

   
 

 오후만 있던 일요일 눈을 뜨고 하늘을 보니
 짙은 회색 구름이 나를 부르고 있네
 생각 없이 걷던 길 옆에 아이들이 놀고 있었고
 나를 바라보던 하얀 강아지 이유 없이 달아났네
 나는 노란 풍선처럼 달아나고 싶었고
 나는 작은 새처럼 날아가고 싶었네
 작은 빗방울들이 아이들의 흥을 깨고
 모이 쪼던 비둘기들 날아가 버렸네
 달아났던 강아지 끙끙대며 집을 찾고
 스며들던 어둠이 내 앞에 다가왔네
 나는 어둠속으로 들어가 한없이 걸었고
 나는 빗속으로 들어가 마냥 걷고 있었네
 오후만 있던 일요일 포근한 밤이 왔네
 오후만 있던 일요일 예쁜 비가 왔네
 

 - ‘어떤 날’의 노래, <오후만 있던 일요일>

 
   


댓글(5) 먼댓글(0) 좋아요(4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맨손체조 2009-10-08 14: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부산한 사무실 창문을 뚫고 <오후만 있던 일요일>이 울려퍼지는 듯. 일손을 놓고 갑자기 평온해진 느낌.

meanwhile 2009-10-08 15: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아직 겪어보지도 못한 미래를 그리워하는 그 나이로 한 번 돌아가보고 싶어지는 오후입니다. 오후마저 없는 목요일, 꾸벅꾸벅 졸다가 번쩍 깸.^^

냠냠 2009-10-09 14: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드라이아이스처럼 휘리릭 사라져버린 내 시간은 어디로 간 것일까. 가져보지도 못한 걸 상실한 느낌은 왜 이리도 매번 아린지. 쿠울럭~^^

sotkfkd 2009-10-10 1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어떤날, 이병우님 어제 텔레비젼에서 뵜는데요.

어떤 날이 그리운 2009-10-11 0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이병우의 기타와 함께 듣는 오후만 있던 일요일, 소름이 쫙 끼쳤슴다. 넘 좋아서, 흑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