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뷰티풀 마인드>와 칼 구스타프 융(Carl Gustav Jung) ⑩

 

10. 내 안의 메피스토펠레스를 만나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무의식이 함께 살고 있는 것이다. 비판적 이성이 우세할수록 인생은 그만큼 빈약해진다. 그러나 무의식과 신화를 의식화할수록 우리의 인생은 그만큼 통합을 이루게 된다. 과대평가된 이성은, 그것이 지배하면 개인이 궁핍해진다는 면에서 독재국가와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무의식은 우리에게 뭔가를 알려주거나 영상으로 암시하면서 하나의 기회를 준다. 무의식은 어떤 논리로도 이해되지 않는 것들을 우리에게 때때로 전해줄 수 있다. 


 - 칼 융, 조성기 역, <기억, 꿈, 사상>, 김영사, 2007, 536쪽.  

 
   

   내가 차마 가지 않은 길이 나의 발목을 잡고 놓아주지 않을 때가 있다. 우리는 그때 가지 않은 길 때문에 우리 인생의 모든 것이 바뀌었음을 알고 있다. 내 앞에 놓인 길이 매끄럽고 탄탄한 도로이며 모두가 걷고 싶어 하는 대로(大路)인 줄로만 알았는데, 그 길이 생각처럼 평탄하지도 않으며 게다가 어느 날 문득 그 길 위에 나 혼자 서 있음을 깨달을 때도 있다. 우리는 그제야 깨닫는다. 몇 번의 기회가 주어진다 해도 여전히 그 길을 선택했을 것임을.
   내 앞에 분명히 믿음직한 길잡이가 있다고 생각하고 그 길로 접어든 경우, 우리의 절망은 더욱 깊어진다. 분명 그 사람을 믿고 따르면 외롭지도 두렵지도 않으리라 믿었는데, 알고 보니 우리는 ‘다른 길’을 ‘같은 길’이라 생각하며 걸었던, 서로를 향한 철저한 이방인이었다. 융이 프로이트와 결별했을 때도 그랬다. 융은 가장 존경하는 대상에게 가장 깊은 실망을 느껴야 했고, 자신이 ‘아버지를 따르는 아들’이 아니라 아직 아들조차 낳아본 적이 없는‘새로운 아버지’가 되어야 함을 깨달았다. 

   프로이트와 인연을 끊은 후 융은 절망적인 방향상실 상태에 빠진다. 아무 것도 붙잡을 것이 없는 상태에서 텅 빈 허공에 떠 있는 듯한 느낌, 생의 나침반을 영원히 상실한 듯한 아찔함, 환자들을 돌보다가 스스로 정신이상이 되어버린 것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던 융은 차라리‘계속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진보의 욕망을 떨쳐버린다. 그는 그동안 공부했던 모든 것이 ‘내가 아는 것’이 아니라는 느낌에 사로잡힌다. 바로 그때 그는 내면에서 속삭이는 또 하나의 목소리를 듣는다. 이토록 아는 것이 아무 것도 없으니 그저 마음이 시키는 대로 내버려두자. 융은 의식적으로 자신을 무의식에 충동에 맡겨버린다. 

   
 

나에게는 해방이란 것이 없다. 내가 소유하지 않고 내가 행하거나 체험하지 않은 그 어떤 것들로부터 나를 해방시킬 수 없다. 진정한 해방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행했을 때, 내가 온전히 나 자신을 헌신하여 철저히 참여했을 때 비로소 가능한 법이다. 내가 참여하지 않고 물러서면 거기에 해당하는 영혼의 부분을 그만큼 절단하는 셈이 된다. (……) 자신의 열정의 지옥을 통과하지 않은 사람은 결코 그것을 극복하지 못한다. 그러면 열정은 집 가까이 있게 되고 그가 미처 대비하기도 전에 불길을 일으켜 바로 그의 집을 덮칠 것이다. 사람들이 너무 많이 포기하고 내버려두고 겉으로 잊어버린 체하고 있을 경우, 그 포기한 것과 내버려둔 것이 두 배의 힘으로 되돌아올 가능성과 위험이 상존한다. 


 - 칼 융, 조성기 역, <기억, 꿈, 사상>, 김영사, 2007, 490쪽.

 
   

   계속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욕망을 내려둔 채 무의식에게 길을 묻자 무의식은 이렇게 대답했다. 어린 시절 가장 좋아했던 놀이를 떠올려보라고. 학문과 출세의 길을 거의 동시에 달리고 있었던 30대 후반의 융에게 불현듯 떠오른 이미지는 진흙과 벽돌을 오밀조밀하게 쌓아올려 ‘나만의 집’을 만들던 어린 시절의 자신이었다. 그때 그 시절 열한 살 소년이 이제 성인이 되어버린 나 자신을 부르며 ‘함께 놀자’는 메시지를 보낸 셈이다. 융은 깨닫는다. 열한 살 소년과 지금의 나를 이어주기 위해서는, 쑥스럽고 어색하지만 그때 그 소년의 놀이를 다시 재연해보는 길밖에 없다는 것을. 그 작은 아이는 여전히 벽돌로 집을 지으며 까르르 웃고 있는데, 성인이 된 자신은 인생의 방향타를 잃어 완전히 좌절하고 있음을, 융은 직시한다. 그 소년은 내가 완전히 잃어버린 창조적인 삶을 누리고 있는데, 나만 여기남아 권태의 나날을 보내고 있다니.
   융은 오랫동안 망설이다가 마침내 그때 그 시절 열한 살 소년이 되기로 결심한다. 아이의 놀이를 하는 것밖에는 다른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느끼자 어쩔 수 없는 굴욕감이 덮쳐오기도 했다. 그러나 막상 호숫가와 물속에서 돌을 찾고 흙을 퍼 나르는 동안 그는 놀이의 적합성을 ‘판단하는 의식’을 깡그리 잊고 다만 즐겁게 놀이에 몰두한다. 그는 날마다 조금씩 집을 짓기 시작했다. 환자가 찾아오는 시간을 빼고는 온전히 열한 살 아이가 되는 시간을 기쁘게 누렸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나자 어느새 ‘길 잃은 나’조차 잊어버린 스스로를 발견한다. 그는 그렇게 자신이 차마 가지 못한 길을, 잃어버린 자신을, 늦었지만 생생하게 다시 체험하는 ‘혼자만의 통과의례’를 거친다. 그 과정에서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욕망과 길잡이를 잃어버린 고독과 내 안의 또 다른 나와 싸우는 고통을 선뜻 넘어서버린다. 그는 그때부터 인생의 어려운 고비를 맞을 때마다, 아내가 죽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떠나가고, 전쟁이 일어나고,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고 느낄 때마다, 매번 ‘새로운 아이의 놀이’를 시작함으로써 자신이 억압했던 무의식의 맨얼굴을 만난다. 유능한 정신과 의사이자 학자가 갑자기 모든 연구 활동을 접고 집짓기 놀이에 몰두하는 것은 자칫 어리석은 퇴행이나 부질없는 망상으로 보이지만, 사실 그는 처절한 전투와 망아의 희열을 동시에 경험하는 정신의 리모델링을 감행하고 있었다. 그때마다 기념비적인 저작이 탄생했고, 잊을 수 없는 발견이 잇따랐다. 그에게 어린이 되기는 무의식의 내밀한 무늬와 숨결을 올올이 체험하는 내면의 통과의례였다.   

   한편 내쉬는 서른 살 이후 거의 30여 년간 자기 안에서 타오르는 메피스토펠레스의 속삭임과 씨름했다. 때로는 메피스토펠레스의 달콤한 유혹에 정신을 잃기도 하고, 오직 메피스토펠레스만이 창조력의 고갈에 신음하는 자신을 구원해줄 수 있다고 믿기도 했으며, 그에게 메피스토펠레스를 빼앗아 가려는 정신병원과 가족과 친구들에게 저항하며 모든 사회관계로부터 단절되기도 했다. 그는 정신분열증의 회복과 재발을 반복하며 자신의 좌절된 무의식과의 힘겨운 조우를 계속했다.
    ‘신의 왼발’을 자처하는 내쉬의 사명감은 너무 거대해진 나머지 교수직도 버리고 아예 미국을 떠나버렸으며, 미국 시민권을 포기하기 위해 전대미문의 소동을 벌이기도 했고, 생의 전부였던 수학도 버린 채 정치에 뛰어들어 ‘세계정부’를 구성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낡은 정체성을 훌훌 벗어던지면 자신의 무의식이 인도하는 우주적 깨달음에 이를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것 같다. 융은 무의식을 의식화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무의식에 ‘잡아먹힐 수도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신중함과 조심성을 잃지 않으려 노력했다. 무의식의 광휘에 사로잡히거나 무의식의 난폭 운전에 의식이 희생될 가능성은 언제나 열려 있기 때문이었다. 

   무의식은 ‘선악을 넘어서’ 존재하는 거대한 영혼의 마그마다. 무엇으로 부활할지 모르는, 그 무엇도 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의 덩어리. 이 무의식을 예술로, 학문으로, 또 다른 소중한 그 무엇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것은 의식의 힘이었다. 그 의식이 ‘통제’로만 기능하면 강박증에 사로잡히고, 거꾸로 의식이 무의식에 사로잡히면 광기로 치닫기 쉬웠다. 무의식의 바다 위에서 출렁이면서 의식에 고삐를 놓지 않는 것, 의식의 고삐를 잡은 것조차 잊고 무의식의 창조적 상상력에 몸을 맡기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런 면에서 칼 융과 존 내쉬의 과제는 같았다. 인간 무의식의 극한을 실험하면서 그 무의식의 광휘에 눈멀거나 그 불길에 타버리지 않는 것. 무의식의 무한한 가능성을 한 줌이라도 더 의식의 차원으로 불러내어 창조적 작업에 영감을 불어넣는 것. 

   내쉬는 오랫동안 무의식의 광휘에 압도되어 자신의 의식과 평범한 일상을 완전히 폐기처분하는 극도의 모험을 감행했다. 이혼과 실직의 고통보다 더 아픈 것은 둘째 아들마저 자신처럼 정신분열증에 시달리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때로 ‘강제 입원’과 ‘강제 치료’로 인해 증상이 ‘호전’되는 기미가 보일 때마다 내쉬는 안도하기보다는 오히려 분노했다. 그에게 ‘치료’는 우주와 교통하는 듯한 신성한 체험의 행운을 빼앗는, 거대한 폭력이었다. 아무도 모르는 무의식의 통찰을 간직할 수 있게 되었는데, 그것이 더 이상 ‘내 것’이 아니게 되었음을 알았을 때의 걷잡을 수 없는 상실감. 그것이 그가 ‘치유’될 때마다 느끼는 고통이었다. 동료들이 그의 ‘명석한 판단력’이 돌아왔다고 안도할 때마다 내쉬는 스스로 ‘타락했다’고 느꼈다. 아직 완전히 정신분열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던 그의 고백은 ‘부분적으로’ 무의식에 대한 빛나는 통찰을 담고 있었다. 그는 합리적 사고를 할 때, 우주와 개인과의 소통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고 했으며, 증세가 완화되는 것은 ‘강제된 합리성의 막간극’이라고도 했다.
   정신질환 자체는 고통스러웠지만 내쉬는 일상생활보다 훨씬 고차원적인 정신활동을 하고 있다는 ‘향유’의 유혹을 버리기 힘들었다. 그 향락이 끝나는 것이 곧 ‘치유’였기에, 그는 정상으로 회복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 안의 신비한 기운, 고차원적인 사고 능력이 박탈되었다고 느꼈던 것이다. 게다가 정신의학이 아직 고도로 발달되기 전의 미국 주립정신병원은 거의 ‘모든 검증되지 않은 치료법의 실험실’이나 마찬가지였기에 내쉬 또한 스스로를 끔찍한 실험대상 중의 하나라고 느낄 만했다. 위험천만한 인슐린 요법과 전기 치료는 그에게 도움이 되기보다는 모멸감과 수치심을 남겼다. 증세가 잠시 호전될 때마다 내쉬는 ‘아름다운 망상’ 대신 ‘참담한 삶’과 마주해야 했다. 그는 투약을 거부했으며 ‘왜 약을 먹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이렇게 대답했다. 약을 먹으면 내면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아요.

   내쉬의 고통을 바라보는 또 다른 고통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해 떠나간 아내 앨리샤. 그녀가 오랜 방황 끝에 다시 내쉬에게로 돌아온 것이 결정적인, 진정한 ‘치유’의 시작이었다. 발병 이후 거의 20년 만에 내쉬는 그토록 원하던 자유와 안전과 우정을 되찾게 되었다. 어머니와 여동생이 그를 또다시 입원시키려 하자 겁에 질린 내쉬는 이혼한 전처 앨리샤에게 구원요청을 했던 것이다. 앨리샤는 내쉬와 헤어진 이후 스스로도 심각한 우울증을 앓으며 ‘공격적인 치료’가 진정한 치유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앨리샤는 지난 날 여러 차례 그를 강제 입원시켰던 것은 그의 치료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회고한다. 앨리샤는 오갈 데 없는 전남편을, 한때 천재로 명성을 날렸으나 이제 변변한 직업도 없이 옛 친구들의 도움에 의지해 살아가는 그를, 다시 받아들이기로 한다. 고통을 배제하려고 몸부림칠수록 고통의 늪에 빠지게 된다는 것을 그녀 스스로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고통으로부터 한사코 도망치다 고통의 올가미에 사로잡히느니 차라리 당당하게 고통과 더불어 살기로 마음먹는다. 태연하게 고통과 동거하기 시작하자 고통은 더 이상 예전의 압도적인 카리스마를 발휘하지 못했다. 30년 이상의 고통스런 견딤의 시간이 지난 후 앨리샤는 내쉬가 치료된 원인을 이렇게 멋지게 해석했다. 그래요. 내 남편은 정신분열증을 앓다가 치유되었지요. 회복의 원인은 구구하지 않습니다. 그는 그저 고요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뿐입니다. 

   물론 그 고요한 삶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수많은 동료 수학자들의 우정과 아내의 사랑, 그리고 빛나는 지적 성찰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려는 내쉬 스스로의 노력이었다. 이례적으로 수학자에게 노벨경제학상이 돌아갔을 때, ‘정신병자에게 노벨상을 줄 수는 없다’는 편견을 관철한 반대파도 존재했으며, 설사 그에게 노벨상을 준다할지라도 ‘그 엄청난 스포트라이트를 과연 내쉬가 감당할 수 있을까’하는 걱정들도 있었다. 내쉬의 평전인 <뷰티풀 마인드> 원작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영화로 각색될 때 명장면으로 꼽힌 ‘만년필 세러모니’. 이 장면은 내쉬를 둘러싼 동료들의 우정을 형상화한 멋진 알레고리다. 존경하는 학자에게 자신이 늘 쓰는 만년필을 헌정하는 아름다운 세러모니. 그것은 실제 존 내쉬의 재능을 아끼고 그를 포기하지 않았던, 그가 아무리 미국 시민권을 포기하려고 몸부림쳐도 끊임없이 미국 대학에 일자리를 주선하고 병원비를 모금해주었던 수많은 동료들의 우정과 기대를 압축한 상징적 장면이 아닐까.

   실제로 노벨상 수상보다 더욱 감동적인 것은 내쉬가 그 화려한 월계관에 안주하지 않고 자신의 전집조차 출간을 거부한 채, 과거의 성공을 뛰어넘는 ‘미래의 저작’을 준비하고 있다는 점이다. 전집을 발간한다는 것은 곧 ‘평생의 연구가 완료되었음’을 인정하는 꼴이기에, 자신의 마지막 가능성을 열어놓고 싶다는 간절한 의지였던 것이다. 내쉬는 자신의 최고의 작업이 20대에 이미 완성한 게임이론이 아니라 ‘앞으로 살아가는 나날 동안’ 만들어질 미지의 작업이 되기를 바랐다. 물론 그의 병이 언제 다시 재발할지도 모르고, 그가 평생 게임이론을 뛰어넘는 연구를 해낼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노벨상을 받은 천재 수학자의 드라마틱한 삶’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저 조용히 지속되는 학자의 삶’을 살고 있다. 그는 자신이 정신분열증 환자와 의사들에게 ‘희망의 상징’이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 희망에 부응하는 달콤한 대답을 준비하진 않았다. 그는 자신의 노벨상이 ‘발병 이전의 성과’가 아니라 ‘발병 이후, 병을 극복한 후 낸 성과’였다면 훨씬 감동적이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정신과의사들을 향한 강연에서 내쉬는 이렇게 말한다.

   
 

비합리적이었다가 합리성을 회복한다는 것, 정상적인 삶을 회복한다는 것, 그것은 멋진 일입니다. (……) 그러나 그것은 그리 멋진 일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여러분의 환자 중에 화가가 있다고 칩시다. 그는 합리적입니다. 그러나 그림을 그리지 못한다고 칩시다. 그는 정상적으로 활동합니다. 그것이 진정 치료가 된 것입니까? 그게 정말 구원입니까? 나 또한 모범적인 회복 사례일 수가 없다고 봅니다. 내가 앞으로 훌륭한 연구를 해내지 못한다면 말입니다. (그리고 아쉬워하는 듯, 거의 들리지 않는 낮은 음성으로 덧붙였다.) 내가 좀 늙었기는 하지만.  


 - 실비아 네이사, <뷰티풀 마인드>, 707쪽.

 
   
   융은 무의식의 속삭임에 한껏 귀 기울이면서도 현실에 발 딛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에게 ‘이승의 발판’은 가족과 직업이었다. 의사 면허를 가지고 환자를 도와주어야 하고, 다섯 아이의 아버지와 한 여자의 남편이어야 한다는 사실은 그가 내면세계의 목소리에 완전히 점령당하지 않을 수 있는, 소중한 일상의 무게중심이었다. 그러나 ‘일상의 중심’과 ‘세속적 열망’은 구분되어야 했다. 그는 무의식의 탐험을 좀더 적극적으로 감행해야 한다는 내면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 학문적 출세의 길을 버리기로 마음먹었다. 교수직을 버린다는 것은 융에게도 힘든 일이었다. 자신의 숙명에 분노하기도 했고, 상식적인 삶에 만족하지 못하는 자신을 원망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평생에 걸친 ‘마음 만지기’ 끝에 무의식에 대한 어떤 믿음에 다다른다. 우리 안의 내적 인격이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말하는지 진심으로 귀를 기울인다면 마음의 고통은 사라진다고. 그는 열정과 분노에 몸이 달아오르다가도 조금만 흥분을 가라앉히면 자기 안의 ‘우주적인 고요’가 차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모든 세속적 열망을 되는 대로 다 추구해서도 안 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그때부터 만다라 그림을 연구하고 연금술과 신화를 본격적으로 연구하며 아프리카 탐험까지 감행하여 ‘개인의 무의식’을 넘어 ‘인류의 집단 무의식’을 탐구하는 기나긴 여정을 시작하게 된다. 물론 생의 막다른 골목에 다다를 때마다 가뿐하게 ‘어린이 되기’ 하는 내면의 통과의례도 잊지 않았다. 그리하여 시간이 곧 어린이임을, 어린이처럼 놀며 주사위를 던지고 체스를 두는 것이 바로 시간임을 깨닫는다. 그는 어린이의 놀이에 몸을 맡겨 ‘아직 아무 것도 아니었기에 그 무엇도 될 수 있었던 자신의 무한한 잠재성’을 발견한다.  

   
 

나는 고아, 혼자다. 그런데도 어디서나 발견된다. 나는 하나의 존재, 그러나 나 자신과 대립하는 존재다. 나는 젊은이인 동시에 노인이다. 나는 아버지도 어머니도 모른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나를 물고기처럼 깊은 곳에서 끄집어 올려야만 하므로. 아니면 하얀 돌처럼 하늘에서 떨어지므로. 숲과 산에서 나는 두루 쏘다니고 있다. 그러나 나는 인간의 가장 깊은 곳에 숨어 있다. 나는 누구를 위해서도 죽지만 시간의 변화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 칼 융, 조성기 역, <기억, 꿈, 사상>, 김영사, 2007, 408쪽. 

 
   
   융은 프로이트라는 거대한 스승이자 아버지이자 동료를 잃음으로써 세상 전체가 자신을 향해 등을 돌린 듯한 뼈아픈 고독을 경험했다. 하지만 그는 무의식과의 날카로운 조우를 통해, 말하자면 45년 이상의 학위도 수업도 스승도 교과서도 없는 처절한 독학을 통해, 자신의 영혼을, 자신의 무의식을 ‘스승’으로 삼았다. 내쉬 또한 고통스러운 증상의 형태를 띠고 있었지만 결국 자신의 통제되지 않는 영혼의 불수의근, 즉 무의식을 자신의 진정한 스승으로 삼았다. 그들은 이 세상 모두가 자신에게 등을 돌려도, 끝내 살아남는 내 안의 스승, 내 안의 친구, 내 안의 연인이 있음을 자신의 삶으로 증명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성은 소중한 선물이다. 그러나 이성은 러닝머신처럼 이미 알고 있는 범위 안에서 이미 알고 있는 삶만을 살도록 요구한다. 그러나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는 의식의 한계를 훌쩍 뛰어넘으며 살아가고 있다. 믿어지지 않는 사랑에 빠질 때, 엄마가 되고 아빠가 될 때, 아름다운 예술작품을 만들어낼 때, 영혼의 마지막 기름까지 쥐어짜내어 감동적인 연애편지를 쓸 때, 사랑하는 사람의 신변에 생길 위협을 미리 감지할 때, 왠지 이곳에서는 멋진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으로 이사를 할 때, 우리는 무한리필되는 무의식의 연료를 자신도 모르게 마음껏 활용한다. 우리의 영혼은 저마다 아직 알지 못하는 아름다운 노래 가사이며, 아직 지어지지 않은 아름다운 시이며, 아직 그려지지 않은 멋진 그림이며, 아직 인간의 발자국이 닿지 않은 미지의 우주 공간이며, 아직 시작되지 않은 세기의 로맨스인 것이다.    
   
 

무의식의 깊은 곳으로 가는 불확실한 길에 자신을 맡기는 일은 위험한 실험이나 수상한 모험으로까지 여겨진다. 그것은 오류와 불확실의 길, 그리고 오해의 길이라고 간주된다. 나는 괴테의 다음과 같은 말을 생각한다. “외람되게도 저 문을 열어젖혀라. 사람마다 통과하기를 주저하는 저 문을…….” <파우스트> 제2부는 문학적 시도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철학적 연금술과 그노시스파 사상에서 시작하여 니체의 <차라투스트라>에까지 이어지는 ‘황금사슬’의 한 고리다. 
 

 - 칼 융, 조성기 역, <기억, 꿈, 사상>, 김영사, 2007, 345~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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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손체조 2009-10-05 18: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굿 바이 뷰티풀 마인드??? 무한리필되는 여울님의 수다가 기대됩니다^^*

amant 2009-10-05 19: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아직 떠나지 못한 여행, 아직 펼쳐보지 못한 꿈, 아직 사랑받지 못한 연인, 아직 먹어보지 못한 최고의 음식....아, 마구 떠오릅니다. ㅋㅎㅎ

love hurts 2009-10-06 2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외람되게도 저 문을 열어젖히라, 사람마다 통과하기를 주저하는 저 문을...멋진 문장입니다. 아마도 그 문은 못견디게 궁금하면서도 겁이 나서 열어볼 수 없는, 무의식이라는 이름의 판도라 상자겠지요?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