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뷰티풀 마인드>와 칼 구스타프 융(Carl Gustav Jung)③

 

3. 사람들은 언제나, 필연적으로 ‘나’를 오해한다

   
 

 나는 ‘침묵의 탑’에 버려져 썩어가는데, 프로메테우스를 공격한 독수리들이 나의 내장을 파먹는 듯하다.
 - 존 내쉬, 1967년.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이해받지 못할 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받곤 한다. 가족이나 연인, 친구로부터 오해받는다는 것은 극복하기 어려운 상처를 남긴다. 그런 일이 오랫동안 매일 반복하여 일어난다면 아무리 건강한 영혼을 지닌 자라도 우울증에 걸리기 쉽다. 천재의 경우 주변 사람들의 오해는 거의 상습적으로 일어날 때가 많다. 존 내쉬의 경우 사람들의 오해는 더욱 지속적이고 파괴적으로 진행되었다. 존 내쉬 스스로가 그 오해를 가속화한 측면도 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상습적으로 무시하곤 했으며 누군가 질문을 하면 인상을 찌푸리며 ‘너 정말 그것도 몰라?’라는 식으로 반응할 때가 많았기 때문이다.
    노년의 존 내쉬는 그토록 오만방자했던 젊은 시절을 후회하기도 했다. 자신의 천재성은 그런 오만함을 덮어줄 만한 가치가 있다고 믿었다는 것이다. 천재의 재능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면 그런 오만쯤은 슬쩍 눈감아주는 것이 좋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교성이 뛰어났던 여동생 마사조차도 ‘오빠와 놀기’를 극도로 꺼려한 것을 보면 존을 ‘오해의 청정구역’에 격리시키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주변 사람들의 일상적인 오해보다 더욱 치명적인 것은 스스로 ‘자기만의 세계’를 만드는 과정에서 천재 스스로 세계의 작동 원리를 오해하는 것이다. 이러한 오해는 트라우마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하고 잊을 수 없는 공포의 체험으로 각인되기도 한다. 존 내쉬에게 있어 이러한 원형적인 공포의 체험은 고등학교 1학년 때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정신분열 증세가 ‘냉전 시대의 사회적 희생물’이기도 했다는 점은 어린 시절 겪었던 전쟁의 공포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그는 유년기부터 전쟁의 위험에 노출되었으며 청년 시절에도 징병을 피하기 위해 무던히 애쓴 흔적이 보인다. 

   
 

1941년 12월 7일, 일본이 하와이의 진주만 해군기지를 공격했을 때 조니(존 내쉬)는 고등학교 1학년생이었다. 며칠 후 조니와 마사는 아버지에게서 22구경 소총 사용법을 배웠다. (……) 잿빛 구름 아래 낮게 엎드린 마을을 가리키며 아버지는 여느 때처럼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일본은 이곳 웨스트버지니아의 마을을 점령할 때까지 공격을 계속할 것이다. 이곳이 비록 외지고 산에 둘러싸여 있지만, 막강한 미국의 전력을 무력화하는 유일한 방법은 석탄 열차를 폭파하는 것뿐이기 때문이었다. (……) 정말이지 총을 들지 않을 수 없다. 일본은 열차를 폭파하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을 테니까.
 그들은 이 도시를 산산조각 내고, 남자들을 죄다 잡아가고, 양민을 학살할 것이다. 너희들 같은 학생도 죽일지 모른다. 너희가 이 총을 쏠 수 있다면, 잡으려고 달려드는 사람을 물리치고 멀리 달아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아군이 구해주러 올 때까지 숨어 있으면 된다. 후일 내쉬가 도처에서 외계 침략자의 비밀스러운 흔적을 발견하고 오직 자기만이 세상을 구할 수 있다고 믿게 되었을 때, 그는 불안에 떨고 진땀을 흘리며 몇 날 며칠이고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12월 오후의 이날만큼은 소총을 만지작거리며 흥분했고 행복해했다.  


 - 실비아 네이사, 신현용 ·이종인·승영조 역, <뷰티풀 마인드>, 승산, 2002, 60~61쪽.

 
   

   ‘오직 나만이 세상을 구할 수 있다’는 환상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이후 존 내쉬가 겪게 될 ‘빅 브라더’ 윌리엄 파처(에드 해리스)의 환상은 냉전체제가 학습시킨 이데올로기 교육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어린 시절과 깊은 연관성을 보인다. 보통 사람들은 넘볼 수 없는 뭔가 중요하고 비밀스러운 일을 하고 있다는 환상, 그런 어려운 일은 나만 할 수 있다는 긍지는 존 내쉬의 성정에 어울리는 환상이었다. 우주전쟁이 일어났을 때 지구를 지켜내야 한다는 소년들의 환상처럼 부풀어 오르는 ‘냉전 시대의 영웅’을 향한 불타는 의지는 언제나 혼자였던 존 내쉬에게 ‘이 사회에 꼭 필요한, 아무나 할 수 없는 어려운 일을 해야 한다’는 강박을 불러일으켰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최고의 인간이라는 신념을 유지하고 싶어 했던 존 내쉬의 내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사랑받지 못한 존 내쉬의 환경은 시너지 효과를 일으켰다. ‘당신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나만의 미션, 나만의 세계가 있다’는 것은 그에게 주변 사람들의 끊임없는 오해를 잠재울 만한 초인적인 힘을 지니게 했을지도 모른다. 항상 최고의 인간에게 ‘인정받기’를 원했던 존 내쉬의 천성도 중요한 변수다. 영화 속에서 ‘빅 브라더’ 윌리엄 파처는 그의 천재적 재능이 이 사회에서 꼭 필요한 것이라는 신념을 ‘완성’시키는 인물이다. 그의 인정을 받아 소련의 암호 해독 프로젝트에 투입된다는 것은 존 내쉬에게 자신의 지식을 ‘이 사회를 지키는 데’ 사용할 수 있다는 긍지를 심어준 것이다. 

   한편, 어린 시절 융 또한 자신이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할 운명이라는 것을 예감했던 사건들이 많았다. 그중에서도 융이 특히 괴로워했던 사건은 자신이 오랜만에 공들여 쓴 작문이 너무 훌륭한 나머지 선생님이 도저히 자신이 쓴 것이라고 믿어주지 않았던 일이었다. “아주 잘 썼기 때문에 나는 융의 작문에 최고 점수를 주어야겠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작문은 거짓이다. 너는 이것을 어디서 베꼈느냐? 진실을 자백해라!” 융은 자신이 쓴 것이라고 항변하지만 선생님은 절대 믿어주지 않았다. “네가 이것을 어디서 베꼈는지 내가 알게 된다면 너는 학교에서 쫓겨날 거야!” 이 일로 인해 융은 깊은 상처를 받고 선생님에 대한 복수를 맹세하게 된다. 하지만 존 내쉬와는 달리 사람들의 눈에 띄기를 원치 않았던 융은 자기 안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을 모색하게 된다.
    그는 이 일뿐 아니라 선생님과 친구들로부터 ‘이해하기 어려운 아이’라는 낙인이 찍히면서 오히려 타인을 이해하는 방식을 깨닫게 된다. 아, 선생도 너와 마찬가지로 의심 많은 사람이구나. 인간은 이해하지 못하는 사실에 부딪히면 분노하고 흥분하면서 ‘그건 사실이 아니야’라고 믿고 싶어 하는 존재구나. 그는 이때부터 제1의 인격(일상의 인격)과 제2의 인격(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없는 나만의 세계)을 분리하여 사물을 바라보기 시작한다. 제1의 인격이 ‘인간의 유한성과 세속’에 발 딛고 있다면 제2의 인격은 ‘우주의 무한성과 존재의 신비’에 발 딛고 있었다. 그는 ‘제1의 인격’만으로는 친구를 가지기 어려웠지만 ‘제2의 인격’을 위한 친구로서 ‘죽은 사상가’들을 초대했다. 책 속에 파묻혀 살았던 열여섯 살에서 열아홉 살 사이, 그는 자신의 내면에서 샘솟는 영감이 철학자들의 생각과 역사적인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기독교적 스콜라철학은 나의 흥미를 끌지 못했고, 성 토마스의 아리스토텔레스적 주지주의는 나에게 사막보다 더 생명력이 없는 것처럼 여겨졌다. (……) 나에게는 그들이 코끼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소문으로는 알고 있지만 한 번도 본적이 없는 사람들처럼 보였다. (……) 헤겔은 난해하고 거만한 문체로 나를 겁먹게 해서 나는 노골적인 불신감으로 그를 대했다. 그는 마치 언어구조 속에 갇혀 그 감옥에서 거드름을 피우는 몸짓으로 돌아다니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런데 나의 탐구가 가져다준 큰 소득은 쇼펜하우어였다. 그는 눈에 보이도록 여실히 우리를 둘러싼 세계의 고통, 그리고 혼란과 고난과 악에 대해 처음으로 이야기한 사람이었다. (……) 비로소 세계가 어쩐지 가장 좋은 것만을 기초로 세워진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직시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철학자가 나왔다. 그는 가장 선하고 지혜로운 창조의 섭리나 피조물의 조화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그 대신 인류 역사의 고통스러운 과정과 자연의 잔인성에는 일종의 결함, 즉 세계를 창조하려는 창조 의지의 맹목성이 그 밑바닥에 깔렸다고 솔직하게 토로했다. 


 - 칼 구스타프 융, 조성기 역, <기억 꿈 사상>, 김영사, 2007, 132~134쪽. 

 
   

   융은 자신의 고통에서 시작된 복수의 방향타를 돌려 어느새 타자의 고통을 이해하기 위한 포석으로 삼기 시작했다. 그는 병들어 죽어가는 물고기, 옴에 걸린 여우, 얼어 죽거나 굶어 죽은 새, 개미에 둘러싸여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지렁이, 서로를 갈기갈기 찢어놓는 곤충들처럼 인간 또한 그렇게 서로의 불완전함에 의지하고 영향 받으며 서로를 공격하는 것이 ‘자연스러움’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사람들이 자신을 꺼리는 이유가 바로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일에 관해 조용히 발언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학교 과목에는 전혀 들어 있지 않았던 칸트나 쇼펜하우어, 고생물학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 자체가 친구들에게는 엄청난 ‘잘난 척’처럼 보였던 것이다.
    그가 영혼의 친구를 찾으려 발버둥칠수록 그는 더욱더 오해받고 고립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아무리 평범해 보이려 애를 써도 어디서나 튈 수밖에 없었던 융은 자신의 고민을 ‘아예 말하지 않는 편’이 낫겠다는 서글픈 결론에 이른다. 그는 제1의 인격과 제2의 인격을 끊임없이 통합하려 하지만, 제1의 인격에서 좌절당한 자신이 어쩔 수 없이 제2의 인격으로 침잠해가는 것을 느끼며 고통스러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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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os 2009-09-23 18: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아, 저도 살다가 저런 엄청난 오해 한 번 받아봤으면 좋겠네요 ㅋㅋ >.<

sotkfkd 2009-09-23 19: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제2의 인격으로 침잠해 가는 것. 때로 고통을 초월한 환희!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