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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이야기
미아키 스가루 지음, 이기웅 옮김 / 쌤앤파커스 / 2019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본 리뷰는 출판사 경품 이벤트 응모용으로 작성하였습니다.>
어떤 꿈은 실존보다 생생하고, 죽을 만큼 아프다.
꿈이란 것이, 경험의 조각인지 혹은 가공적으로 만들어낸 기억의 편린인지 알 수 없을 때가 있다.
만약 그 기억이 누군가가 일부러 설계해두고, 현실의 경험과 똑같아지도록 프로그램된 거라면 우리는 그 기억의 진실을 어디까지 믿어야만 할까.
그런데 여기 그 기억을 마치 레코드의 A면 B면처럼 서로 공유하고 있는 이들이 있다.
미아키 스가루의 신작 ‘너의 이야기’의 주인공, 아마가이 치히로와 나쓰나기 도카이다.
"진짜 사랑도 가짜 사랑도 알지 못한 채 자란 나는 당연하게도 누군가를 사랑하는 법이라든가 누군가로부터 사랑받는 법도 같은 걸 전혀 모르는 인간으로 자랐다. 자신이 타인에게 받아들여지는 상태가 어떤 것인지 쉽사리 상상하지 못하고 처음부터 커뮤니케이션을 포기해버렸다." (p. 12)
아마가이 치히로는, 무기력하고 삶에 대한 기대나 희망, 혹은 애정은 없는 대학생이다.
그는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고, 애착할 것도 없는 자신의 인생을 비관하고 있으며, 추억 따위 없이 텅 비어 있는 그 시절을 잃고 싶어 6세부터 15세 때의 기억을 소거하기로 한다.
"아무것도 없는 인생이라면 차라리 전부 잊어버리자고 생각했다." (p. 14)
그래서 ‘특정 시기의 기억을 제거해주는 나노로봇’인 레테를 구입한다.
그 약을 복용함으로 완전한 상실에 이르고자 하지만 사라지기는커녕 오히려 풍성하고 달콤한 기억을 갖게 된다. 즉 그가 복용한 것은 ‘레테’가 아니라 ‘그린그린’ (가공의 청춘 시절을 제공하는 나노로봇)이었던 것이다.
치히로는 그린그린에 의한 ‘의억’ (나노로봇에 의한 기억 개조 기술이 만들어낸 가공의 기억)을 통해 '의자'(의억 속 가공의 등장인물)를 만난다. 그녀가 바로 소꿉친구 나쓰나기 도카이다.
물론 현실에서 그는 나쓰나기 도카를 만난 적이 없다. 그는 소꿉친구 하나 없는 인생이었다. 하지만 도카는 의억이 심어준 가상의 소꿉친구를 완벽하게 재현한다.
나쓰나기 도카는 치히로가 그려왔던 백 퍼센트 완벽한 여성이었다. 궁극의 여성이라 할 정도로, 의뢰자의 필요에 꼭 맞춰진 존재 같았다. 하지만 치히로는 그런 달콤한 환상에 맹목적으로 빠져들 수만은 없었다.
"내 머릿속에 존재하는 가장 아름다운 기억이 타인이 만든 가공의 이야기라니, 너무 허무하지 않은가." (p. 20)
그럼에도 불구하고 따스한 기억을 쫓아 끊임없이 그녀를 떠올리게 되어 버리는 치히로.
의억 속에서 그들은, 현실로는 그토록 외롭고 쓸쓸했던 시간을 가장 따뜻하고 행복하게 보낸다. 나쓰나기 도카는 부모의 사랑도 받아보지 못한 치히로를 아껴주고 소중히 해 주는 단 한 사람이었다.
그는 그녀를 사랑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인정하자.
나는 나쓰나기 도카를 사랑하고 있다." (p. 60)
단지 ‘의억’의 가공인물일 뿐인데.
오직 ‘의억’에서만 사는, ‘의자’일뿐인데.
그런데 어느 날 그녀가 현실에서 불쑥 나타나면서 치히로는 혼란에 빠진다.
진실과 허구 사이를 넘나들고, 그녀에게 상처를 내면서 치히로는 점차 진실에 다가서게 된다.
그리고 그 진실 너머엔 상상하지 못할 비밀과 사연이 숨겨져 있는데…….
책의 3분의 2는 치히로의 관점으로, 나머지 3분의 1은 도카의 관점으로 진행된다. 같은 시간, 같은 상황에서 각자 느끼는 감정이 다르다.
하지만 두 사람은 기억의 조각을 나눠 가진 만큼 서로의 영혼도 거울처럼 맞닿아 있다. 시간의 어긋남은 있지만 궁극적인 목적지는 같았다.
고통, 행복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구원에의 갈망이 그것이다.
"진실로 두려운 건 행복한 꿈이다. 그 꿈은 현실의 가치를 뿌리째 뽑아버린다. 꿈이 선명하게 채색될 때 현실에서 같은 양의 물감이 뺏겨 사라진다. 눈을 떴을 때 나는 인생의 잿빛을 절감하게 된다. 행복의 부재를 더없이 강렬히 실감하게 된다. 꿈속 행복은 착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여기에 있는 나와는 처절할 정도로 관계없는 것이기에." (p. 176)
한편 도카는 이렇게 말한다.
"딱 한 번이라도 상관없으니 누군가에게 칭찬받고 싶었다. 토닥임을 받고 싶었다. 동정받고 싶었다. 어린아이 대하듯 무조건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다정하게 포옹받고 싶었다. 내 고독을 100퍼센트 이해해줄 100퍼센트의 남자에게 100퍼센트의 사랑을 받고 싶었다." (p. 262)
오직 두 사람만이 공유할 수 있었던 기억, 같은 물질로 이뤄진 듯 서로만이 채울 수 있던 결핍은, 가공의 기억을 초월한 현실의 기적을 이뤄낸다.
미아키 스가루는 글을 잘쓰는 작가다. 이곳에 다 열거하지 않았지만 소설 중간중간 반짝반짝 빛나는 글귀들이 있었다. 예를 들면 치히로가 자신의 아버지를 묘사하는 한 문장 (p.215) 은 의외로 나를 감동케 했다. 간결하고 군더더기 없이 쓰면서도 의미를 퇴색시키지 않고 힘있게 다가오도록 하는 놀라운 필력이었다.
내가 작가를 처음 접한 건 ‘3일간의 행복’이었다. 사실 그의 소설은 남성향에 가까워서 여자인 나는 몰입하기 쉽지 않았다. 그런 소설에서 그리는 여성상은 대부분 비슷해서 약간의 김이 빠지는 부분도 없잖아 있었다.
하지만 이 작품도, 그 작품도, 손에 놓을 수 없었던 이유는 작가의 유려한 필력과 그만의 스토리텔링 때문이었다. 일본 소설 혹은 라이트노벨 애독자라면 이 작가의 작품을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만큼 베스트셀러로 인정받고, 내놓는 작품마다 무언가를 갱신해 나가는 성장을 보여주고 있다. 내 책장에 한 권쯤은 놓아도 될 작가일 것이며, 그것이 이 작품이라고 해도 좋겠다.
미아키 스가루는 과장되거나 허황한 꿈을 얘기하지 않는다. 상황은 처절해도 어떤 초월적이거나 억지스러운 감정을 자아내지 않는다.
그가 하는 것은 지금의 현실을 받아들이며, 그 현실을 조금 다르게 볼 수 있는 눈을 제공하는 것이다. 그것이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내 곁에 있다는 것을, 그래서 살아나갈 수 있다는 것을, 작가는 실패하는 인간들을 통해 설득한다.
매번 삶 앞에 패배하고 방향을 잃는 우리는 치히로이고 또 도카이기에.
그들이 전해주는 ‘너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보자.
"세상 어딘가에 운명의 상대가 있다는 것 -그것이 하나의 진리라고 마음 깊은 곳에서 믿는다." (p. 370)
그 운명의 상대를 만나면 이 세상에서 태어난 의미를 처음으로 알게 될 거라고.
그러니 세상은 살아갈 가치가 있고, 행복해질 이유가 분명히 존재한다고.
그러니까, 우리는 기대할 수 있고, 버틸 수 있다.
미아키 스가루의 '너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100퍼센트의 당신을 만나기 위해.

30퍼센트의 동정이나 40퍼센트의 이해나 50퍼센트의 사랑이라면, 어쩌면 죽을 각오로 노력하면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걸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나를,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는 100퍼센트의 남자여야만 했다.
행복한 착각의 여운에 가만히 온몸을 적셨다. 가슴 깊은 곳에서 따뜻한 무언가가 치밀어 오르더니 나도 모르는 새 눈물이 뺨을 타고 흐르고 있었다. 눈앞이 뿌예지며 여름의 풍경이 흐릿해졌다.
인생에는 이따금 그런 뭔가 이상한 일이 일어날 수도 있는 거야. 행복하기만 한 인생이 그리 흔하지 않듯이, 불행하기만 한 인생도 그리 흔한 게 아냐. 도카는 도카의 행복을 조금만 더 믿어도 괜찮지 않을까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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