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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테아 2.2 ㅣ 을유세계문학전집 108
리처드 파워스 지음, 이동신 옮김 / 을유문화사 / 2020년 10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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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날레는 없다네. 여기서는 절대적으로 중간만 다루거든.” (25)
어떤 책은 읽는 것만으로도 그 수많은 단어와 문장들의 격류에 힘이 부쳐, 아주 단순한 언어로만 간결히 기억하고 싶을 때가 있다.
이 소설은 U라는 동네로 돌아온 소설가 (이자 본인 리차드 파워스) P의 회고에서 시작한다.
P는 U에 있는 모교의 방문 교수가 되어 이곳을 다시 찾은 것이다.
오래전 U의 대학원생으로서 C를 가르치며 그녀와 연인이 되었던 P.
우연의 장난처럼 네덜란드 이민자의 딸로 출생한 C에게서, 자신과 닮은 혹은 자신이 결핍한 상실감과 유대감을 느끼며 두 사람은 젊은 시절을 함께했다.
혈통과 정체성의 유령에 끌려다니며 생존자의 가책으로 불안정했던 C, 아버지의 만류에도 과학도의 길을 버리고 소설가가 된 P.
남의 인생의 조각을 끌어모아 제 것인양 글을 써야 하는 작가의 숙명과 동시에 이상적인 연인으로 사는 것은 불가능한 공존이었다.
P는 U의 센터에서 괴짜 박사 필립 렌츠를 만나는데, 그는 복잡계를 연구하는 신경과학 엔지니어다.
렌츠는, 인공지능을 인간만큼 발전시켜 스스로 책을 읽고 해석하여 영문과 석사 시험을 치를 수 있는지를 시험해보는 프로젝트를 시작하고, 거기 적임자로 영문과 교수인 P를 끌어들인다.
P는 과학의 가능성을 의심하면서도, 매일 컴퓨터에 다양한 지식들을 읽어 준다. 문학 작품, 시, 소설, 아주 사소한 세상 얘기, 그리고 자기 자신의 얘기들도.
임플리멘테이션 A에서부터 시작해 시행착오 끝에 H에 도달.
인공지능 ‘헬렌’이 탄생하는데.
이 프로젝트는 결국 무엇을 위한 것일까.
갈라테아는 단지 기계와 인간의 애틋한 교감을 말하는 소설이 아니다.
P라는 인물에 대한 얘기다.
'그런 것 같았지만, 그렇지 않았다' (9)로 소설이 시작하듯이.
‘불확실함’에 어디에도 도달하지 못했던 P, 어딘가 갔지만 찾지 못한 C, 헬렌의 모습을 투영한 A, 그럼에도 현실을 살아나가는 주변 인물들, 그들의 아픔과 슬픔들을.
소설은 과학도였던 작가답게 빈틈이 없다.
마치 헬렌을 길들였던 방식대로, ‘연상, 패턴, 순서' (444)의 작업처럼, 한 인간의 기억의 조각에서 시작해 현실과 과거를 교차하는 패턴, 그리고 이상적인 배열을 통해 여러 인물들의 다양한 이야기를 네트처럼 잇고 있다.
거기에 작가의 지식은 상상을 초월한다.
영문학, 영문법, 언어학, 물리학, 수학, 공학, 심지어 이 작가의 장기인 클래식 음악까지 연결한다.
벌레스크 (부를레스카), 멜리스마 등의 클래식 텀을 과학 소설에서 볼 줄은 몰랐다.
과학에 무지한 나도 재밌게 읽을 수 있던 이유는, 이런 고도의 지식을 굉장히 우아하고 아름다운 문체로 표현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의 단어 혹은 의미를 위해, 수많은 은유와 추상적 표현을 쓰고 있는 그의 글이 왜 국내에 쉽게 번역될 수 없는지 이해가 될 만했다. 그 점에서 역자의 유려한 번역과 정성에 감사한다.
‘불확실함’은 이 소설의 모든 것이다.
“확실한 건 떠나는 것에 대해 쓰고 싶다는 거였다. 다음 소설은 이렇게 시작할 거다.
”남쪽으로 향하는 기차를 상상해보라. 하지만 이 첫 줄을 받아서 시작할 수가 없었다. 그처럼 완벽한 첫 문장으로 시작하면 결국 그걸 망칠 수밖에 없다는 자명한 이유 탓에 난 출발지에서 맴돌고 있었다.“ (p. 43)
천천히, 느리고 정적인 문체로, 아직 다가오지 않은 어떤 불확실함에 목이 조여드는 소설.
그러면서 가슴 한켠이 먹먹하고 아프고 쓸쓸하다.
어디로 가야 하느냐고. 소설은 내내 묻고 있었다.
그것은 헬렌도, 렌츠도, 그 누구도 답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P는 자신이 품은 이 불확실한, 정체 모를, 무국적 상태의 정신의 미아를 떨쳐내고 다시 소설을 쓸 수 있을까.
"남쪽으로 향하는 기차를 상상해보라.”
이 근사한 첫 줄로만 끝났던 그의 모호한 여행은 헬렌을 만남으로 그 어딘가에 도달할 수 있을까.
“나는 A가 내 위치를 측량해 주고 말해 주기를 원했다. 이 세상에서 살아남기에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여기 사는 것이라고 동의해 주기를.” (526)
‘인생은 환유를 배우는 것이다’ 라는 에머슨 (252)의 말 한마디를 위해,
작가가 들려준 534 페이지의 아름답고도 불확실한 변주곡.
나는 이 소설을 이렇게 기억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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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날레는 없다네. 여기서는 절대적으로 중간만 다루거든. (p.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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