멕시칸 고딕
실비아 모레노-가르시아 지음, 공보경 옮김 / 황금가지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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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칸 고딕’은 1950년대 ‘탈식민시대’의 멕시코의 탄광 마을을 배경으로 한, 현실과 환각, 역사와 역설, 과학과 미신, 고딕과 로맨스 등이 혼재한 고딕 소설로,

도일 가에 시집간 후 폐인이 된 사촌 카탈리나를 구하기 위해 도일 가에 뛰어든 노에미가 진실에 접근하면서 알게 된 도일 가문의 무시무시한 비밀과 저주의 이야기다.

*

“사랑을 위해 지어진 집이 아닙니다.... 우린 사랑을 할 수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233)

이 소설은 1950년대의 멕시코. 스페인의 식민지 시대 이후를 배경으로 한다.

1810년 멕시코의 독립 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 활발했던 영국인의 채광 사업이 중단되면서 잔류하게 된 도일 가문은,

엘 트리운포의 산골에 ‘하이 플레이스’라는 영국식 저택에서 모국 영국의 모습과 전통을 그대로 따르며 외부와 고립된 채 살고 있다.

멕시코 여성인 노에미의 사촌 카탈리나는 외아들 버질 도일과 결혼했지만, 거기 살게 된 이후 유령이 보인다면서 정신착란, 몽유병 등 이상 행동을 하고 불길한 기운이 가득한 편지를 노에미에게 보낸다.

멕시코시티에 살던 노에미는 카탈리나를 만나러 도일 가를 방문한다.

주변은 묘지이고 300년도 더 된 대저택에는, 도일 가문의 가주이자 노인 하워드 도일, 그의 조카 플로렌스, 그녀의 아들 프랜시스, 그리고 카탈리나의 남편이자 아들 버질이 세 하인들과 살고 있다.

집안 사람들 모두 무언가를 숨기듯 음침한 기운이 가득하고, 카탈리나의 상태는 갈수록 나빠지고, 형부 버질 (=잘생긴 개자식)은 노에미를 숨막히게 한다.

건강했던 노에미마저 소름끼치는 환각과 환청에 시달리며 쇠약해진다.

“공기가 무거운 집이 있어요. 사악한 기운이 내리눌러서 공기 자체가 묵직하게 느껴지는 집인 거죠. 그 기운은 죽음일 수도 있고 다른 무언가일 수도 있어요."(199)

마을의 민간치료사 마르타에게 기묘한 이야기를 듣는 노에미.

좀처럼 깨지지 않을 것 같은 이 집 사람들의 불안하게 끈끈한 유대감. 그들의 침묵.

빗장처럼 무거운 비밀과 저주가 드리워졌음에도 노에미는 접근조차 할 수 없다.

“주체적인 삶이라. 알아챘는지 모르겠지만, 우리 중 주체적인 삶을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아버지는 내가 여기서 살길 바라셔. 아내는 병이 들었고. 늘 똑같은 이야기지. 우린 여기서 살아야 해. 바꿀 수 없는 상황이라는 걸 모르겠어?” (251)

대체 이 집에는 무슨 일이 있는 걸까.

과연 노에미는 카탈리나를 구하고 함께 무사히 탈출할 수 있을까.

*

이 책의 강점은 ‘재미’이다. 그러나 그게 전부는 아니다.

저자는 과학기술학 석사에 우생학 관련 논문도 쓴 학자이다.

고국 멕시코의 상흔을 꺼내 보이는 역사의식과 서구 열강들에 대한 비판적 태도, 인류학과 역사학에 대한 통찰력도 작품 곳곳에 담겨 있다. 다수의 저자와 논문을 인용하기까지 한다.

파워스의 소설도 그랬지만, 서사를 위한 논리적 자료를 충분히 뒷받침하여 소설의 격을 높인다.

그게 덫이 된 걸까. 탄탄한 배경에도 불구하고 자기모순과 역설을 피하지 못한 것은.

작가가 후기에 직접 쓴 ‘역설적 유산’의 되풀이된 해석이 보인다.

식민지 시대의 유령에 사로잡힌 두 멕시코 여성, 노에미와 카탈리나.

영국인 도일 가문이라는 ‘악의 축’을 내세워놓고 그들에게 희생된 멕시코인들을 대표하는 후대의 소극적인 활약은 실망스럽다.

아마존의 어떤 리뷰어가 지적한 만큼 가장 큰 모순은, 그들이 사랑에 빠진 대상이 하필 식민지 시대 때 착취한 영국인들이라는 거다.

금발 머리에 벽안, 흰 피부, 스페인어 대신 오직 영어만을 쓰는 도일 사람들.

노에미는 카탈리나가 그랬듯이 이들에게 매료되어 간다.

도일 사람들의 입에서 계속해서 우생학 얘기가 나오는데, 그런 그들이 선택한 최고의 여성이 그녀라는 설정은, 모순의 결정판이 아닐 수 없다.

작가가 혐오하는 우생학 이론을 다른 방식의 가능성으로 열어두는 마무리도 영 개운치 않다.

허나, 작가의 숭고한 신념이나 문제의식이 ‘단지 거들뿐’이고, 쫀득쫀득한 고딕 로맨스 소설로 즐긴다면 이런 비판은 무용할 테다.

오랜만에 서구 감성 느끼며 정말 재밌게 읽었다.

그나저나 멕시코의 대표 작물이 할레피노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구먼.



사랑을 위해 지어진 집이 아닙니다.... 우린 사랑을 할 수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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