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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자애는 머리가 나쁘니까
히메노 가오루코 지음, 정수란 옮김 / 연우출판 / 2020년 11월
평점 :
품절

“나만 참고 나만 욕구를 숨기면 온 집안이 평온하다는 것을 경험으로 깨달으면서 버릇이랄까 습관이 되어버렸다.” (21)
이 소설은 2016년 도쿄대 남학생 5명이 타학교 여대생을 상대로 벌인 성추행 (Gang Style Sexual Assault) 사건을 픽션으로 재구성한 소설이다.
전에 언급한 바 있지만, 나는 실제의 사건이 소설로 쓰여지는 것에 좀 복잡한 마음이다.
하지만 이 소설은 작가의 노력이 드러날 만큼 섬세히 쓰여졌고, 많은 것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게다가 작가가 어디까지나 픽션의 부분은 눈에 띄게 구성해놓아 실제 사건과 별개의 울림과 무게감을 심어 준다.
특히 일본 대중문학에서 그리 흔치 않은 사회파적인 요소를 담은 것에도 끌렸다.
소설을 통해 일본의 사교육, 편차치, 스펙, 입학제도, 대학랭킹 등에 대한 인식들을 새로이 알게 됐다.
도쿄대가 대단한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인 줄은 몰랐다. 그러니 그것이 무너지는 것엔 그만큼의 충격과 파란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작가는 그들의 자부심을 ‘두바이의 부르즈칼리파 빌딩처럼 높은 프라이드’라고 냉소하기도 한다.
“<카페본나>의 테이블을 에워싼 도쿄대생들의 손이며 손목이며 팔이며 어깨며 목의 모공, 두피의 모공, 전신의 모공에서 자신감이 뿜어져 나온다. 나는 우수하노라는 자신감은 올곧고 평온하다.” (241)
‘도쿄대인 내가 만나자는데 미즈대 따위가 감히 비싼 척을…….' (315)
“나 도쿄대야 라고 말하면 여자들은 앞다투어 팬티를 내리고 다리를 벌려요.” (473)
도쿄에서 농림수산성 공무원 집안에서 태어나 부속고, 도쿄대 이과1류로 진학한 엘리트 남자.
그의 삶은 어릴 적부터 오직 도쿄대에 향해 있었다. 도쿄대와 관련 없는 것들은 모두 버리며 살아왔다. 인간성도, 감정도.
‘그는 대개 타인의 정서의 동정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성격이 아니다. 그는 올곧고 건전한 수재다. 건전한 인간은 내면을 돌이켜볼 필요가 없다.’ (138)
한편, 가나가와 현립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편차치가 낮은 도쿄의 여대에 진학한 여자.
그녀는 세탁소를 하는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여동생 남동생을 둔 평범하고 따스한 가정에서 자랐다.
양보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겼고, 친구들과 건강한 학창시절을 보냈다.
두 사람의 대조되는 고교 시절이 교차하며 그들의 인생이 어떻게 주변에 의해 영향을 받고 종래엔 얽히고 마는지, 작가는 그들의 이야기를 각각 그려내다가 어느 한 인연을 기점으로 연결한다.
건전하고 사랑스럽게 보였던 장면이 일그러지는 것은 한순간이다.
한순간. 그러나 이미 오래전부터 서서히 예견됐던 괴물이 드디어 탄생하면서부터다.
책을 덮고 나서 든 생각은, 이 소설은 소설로 읽고 사건의 진상은 따로 알아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사건은 사건대로 객관적으로 보고, 작가가 덧붙인 소설적인 픽션 부분은 그저 픽션으로 말이다.
두 개를 동일시해서 이 여학생 속마음은 이랬을 것이다, 남학생들은 이렇게 느꼈을 것이다... 등의 추측을 하는 건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소설만으로는.
소설에 그려진 사건의 상황을 보면, 그 자리에 남아 있던 여학생의 태도가 가해자들이 주장하듯이 오해의 소지가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다. 목격한 동행인도 있었다. 물증으로는 불리할 수 있는 상황이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심증으로는 또는 인간적으로는, 그런 공포 속에 꿈쩍할 수 없는 인간의 마음, 저항할 수 없는 두려움 때문에 어떤 행동도 취할 수 없다는 것을.
게다가 여학생의 마음이 누군가에게 기울어져 있었다면 더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피해자가 가해자들에게 원한 합의 또는 요구는 단 하나였는데, 그것이 실제 사건과 같았는지는 알 수 없다.
작가는 가해자들이 그녀에게 성욕을 느꼈거나 성폭력을 행사한 게 아니라고 말하면서 그보다 더한 인격의 유린, 인간성의 말살을 높이 비판한다.
“그들이 하고 싶었던 것은 편차치가 낮은 대학에 다니는 생물을 크게 비웃어주는 것이었다. 그들에게 있었던 것은 그저 ‘도쿄대가 아닌 인간을 짓밟고 싶은 욕구’뿐이었다.” (500)
이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가 내게는 가장 큰 아픔과 슬픔으로 남았다.
끝까지 인간성을 상실한 인간에게도 하늘은 똑같이 푸르게 빛나고 코스모스는 흩날린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