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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호로 역 광시곡 ㅣ 마호로 역 시리즈
미우라 시온 지음, 권남희 옮김 / 은행나무 / 2021년 12월
평점 :
품절

#마호로역광시곡 (2013, 2021) by #미우라시온
“난 아무도 기억해주길 바라지 않아. 아무리 예쁜 여자라도. 미안.” (91)
아무도 기억해주길 바라지 않는 남자, 교텐 하루히코.
“나는 너를 가능한 한 기억할 거다. 네가 죽더라도. 내가 죽을 때까지.“ (470)
끝까지 기억해주겠다는 남자, 다다 게이스케.
마호로역 다다심부름집의 콤비 다다와 교텐은 그런 사이다.
두 사람의 티격태격 동거가 어느덧 2년이 흐르고, 3부 ‘마호로역 광시곡’이 시작된다.
3부는 2부의 복선 회수라고 보면 된다. 2부와 합본해도 될 만큼 연장선에 있다. 2부에 나온 인물 대부분이 재등장한다.
마약상 일명 ‘사탕장수’ 호시, 매춘부 루루와 하이시, 요코하마 중앙 버스 노선 시간표를 의심하는 노인 오카, ‘키친 마호로’의 미모의 여사장 아사코, 교텐의 전처 나기코, 당돌한 초등생 유라 도련님 등.
작가는 이미 설정된 인물들 사이에 굵직한 에피소드 하나를 던지는데, 바로 2부 말미에 소개된 ‘가정과건강식품협회 (HHFA)’이다.
이들은 남쪽 출구 로터리에서 어린 자녀들과 함께 밭에서 직접 재배한 유기농 채소를 팔고 있다.
아이들을 동원한 공격적인 마케팅으로 수효가 급증하는 가운데 호시를 비롯한 뒷골목 패거리들은 이들의 자리 점거를 못마땅해하면서 야쿠자와 손잡기 시작한 정황을 포착해 방해 공작을 펼친다.
여기에 우리 다다 심부름집도 끼게 되고, 거기에 오카 노인도 끼고, 유라 도련님과 그 친구 유야도 끼고.
이 작품에서 미우라 시온은 등장인물들이 무의미하게 소비되지 않게 이런 큰 골자에 치밀하게 엮어 둔다.
거기에 교텐까지 엮은 채로.
겉보기엔 건강한 유기농 채소 판매 단체 같지만 옛날부터 이어진 어떤 사이비 종교의 잔재였음이 밝혀지고, 교텐의 암울했던 어린 시절도 드러난다.
3부의 큰 줄기는 아마 두 개일 것이다.
유기농 채소 단체 HHFA와 교텐.
하지만 전자는 오직 후자를 뒷받침하기 위해서 미우라 작가가 준비해둔 포석이라 봐도 될 것 같다.
나는 그런 것들이 이 작가의 특별한 재능이라고 여겨졌다.
공들여 정교한 큰 그림을 그린 후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방향이 적확하다는 것이다.
사실 에피소드 자체는 생각보다 신선하거나 현실적인 생생함은 없었다.
마지막 장면은 부성애의 어떤 전형을 보는 것 같아서 김이 빠지기도 했다.
명랑만화적인 설정에다 일본 소설 특유의 교훈적이고 긍정적인 희망을 말하는 것,
즉 곱게 발린 말을 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는 듯해서, 비록 내가 그런 것을 좋아하긴 해도, 이 소설에서는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
교텐의 행동이나 언동에서 보이는 모습은 상당히 사이코패스적이라고 전에 언급한 적이 있다.
그런 그가 주변 사람들의 관심과 애정으로 변하는 모습은 의미 있고 기쁜 일이 분명하다.
하지만 작가가 묘사한, 혹은 가장 애정을 쏟으며 만들어낸 히어로 교텐은 여러 의문점을 남긴다.
교텐은 아이를 '그것‘ 혹은 ’애새끼‘로 부를 만큼 혐오한다.
하지만 자신의 정자를 레즈 커플에게 주는 것에는 관대했고, 태어나지 않은 아이에 대한 기대감도 보인 것으로 묘사된다.
작가는 교텐의 내면을 꺼내는 데에 굉장히 신중한 흐름을 따른다.
따라서, 그의 변화 혹은 성장이 ‘아이를 대하는 태도’에만 집중되어 있고, 그리고 그것이 자신의 아이를 통해서만으로 결정적으로 입증된 것에는 아쉬움이 남는다.
“애정을 아는 자와 모르는 자는 눈에 비친 세계가 전혀 다르니까. 확실히 사랑이 갖는 위력은 잔혹하다.” (144)
교텐이 결국 그토록 혐오하던 ‘아이’ 그것도 자신의 ‘아이’를 통해 구원받게 된다는 설정은 작가가 쳐둔 미덕의 전철을 밟는다.
그럼에도 (내게는 상당히 부담스럽게 읽혔던), 원하는 남자의 정자를 받기 위해 계약 결혼 후 곧바로 이혼한 레즈, 씨 그까짓 것 줄게 하는 남자 등은 ‘미덕’의 탈선을 보이기도 한다.
깊은 것을 얕게, 얕은 것을 깊게, 이런 균형의 모호함이 내게는 장벽이었다.
대개, 해결을 제시하려는 소설은 여러 모순을 안고 있고, 누가 정의라 단언할 수 있을까마는,
미우라 작가의 미덕과 선과 악의 모호한 경계에서 나는 여전히 헤매고 있다.
마무리로 말하자면 산뜻하고 깔끔한 3부다.
작가의 에피소드 엮는 재능은 정말 기막히다.
이런 매력 때문에 작가의 책들을 줄줄이 구입했다.
애정을 아는 자와 모르는 자는 눈에 비친 세계가 전혀 다르니까. 확실히 사랑이 갖는 위력은 잔혹하다. (144)
나는 선의만으로 하루를 맡기로 결심한 게 아니다. 사실은 마음 한편으로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다시 아이를 대하며 나도 무언가를 다시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가슴에 둥지를 튼 두려움과 절망을 다른 것으로 바꿀 수 있지 않을까, 희미한 기대를 안고 있다. (204)
매달 임대료를 고박꼬박 내기만 하면 이상이고 이념이고 채소고 아무 상관 없다. (49)
이번에는 내가 말할게. 무서워하지 않아도 돼. 하루를 봐. 저렇게 작고 우리를 의심할 줄도 모르는 존재를 너는 정말로 멍투성이로 만들 수 있을까? (259)
나를 심심하게 하면 곤란한 일이 생겨요.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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