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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공주 해적전 ㅣ 소설Q
곽재식 지음 / 창비 / 2020년 7월
평점 :
#신라공주해적단 #소설Q #창비
“사람으로 태어났다면, 최소한 좋은 노래와 춤을 즐길 줄 알고, 또한 아름다운 시의 멋과 옛 성현의 지혜를 배우는 즐거움을 알아야 한다. 그저 밥 먹을 걱정, 굶지 않을 걱정만 한다면 그것은 짐승의 삶이지, 사람의 삶이라고 할 수 있는가?
너같이 오직 먹을 것 걱정, 재물 걱정만 하면서 짐승처럼 살 바에야 차라리 굶어 죽는 것이 나으리라.” (p. 16)
창비의 소설Q 시리즈로 8월 7일 출간되는 신라공주해적단을 읽었다.
한국의 역사나 신화를 모티브로 한 장르 소설로서, 본격적이고 의미 있는 출발이 될 작품.
선이 굵고 깔끔하고 상쾌한 느낌을 주는 소설이었다.
줄거리는 이렇다.
신라 장보고가 망하고 15년이 지난 때 (서기 861년), 장보고 무리 밑에서 잔심부름을 하며 살던 장희라는 여인은 한주 지방에서 유유자적 살고 있었다. 그러다 제물이 모두 바닥난 것.
타고난 임기웅변과 배짱, 허풍 등 소위 입만으로 먹고 살던 장희는 한수생이라는 잘생기고 허여멀건 선비 청년과 얽히게 된다.
그 청년과 함께 바다를 떠다니던 중 적선(敵船)과 만나고 그때부터 장희와 한수생의 인생은 생사를 오갈 만큼 긴박해진다.
신라인이었던 장희와 수생이 하필 만난 그들은 신라를 철천지원수로 여기는 백제인들.
그 외에도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해적선의 수장 대포고래와 비단잉어 등도 장희와 수생의 생명줄을 쥐락펴락한다.
이 소설의 백미는 바로 ‘제갈량’ 뺨치는 장희의 기지와 입담이다.
물에 빠져도 입만 둥둥 뜰 장희가 여러 생명을 구한다. 그렇다고 장희라는 캐릭터는 마냥 착하고 선하지 않다. 가끔 한 대 쥐어박고 싶을 때도 있다.
장희를 빚어낸 작가 또한 범상치 않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긴장감을 잘 이끌어내고 예측을 비껴가게 하는 이야기로 허를 찌른다.
작가 비공개였기에 남자가 썼을까 여자가 썼을까, 혹시 내가 아는 그 작가분이 썼나... 혼자 질문하기도 했지만, 온라인 서점 들어가서 검색하니 바로 뜨더라.
문체가 시원시원하고 직관적이며 감성적인 구석이 하나도 없어서 남자분 아닐까 생각했다.
어떻게 보면 해학과 여운을 담은 전래동화 같은 얘기라서 다 읽고 나면 그리 남는 것이 없을지도 혹은 있을지도 모르겠다.
한국의 역사에 근거해 창조한 장희, 한수생, 그 외 인물들의 현실성이 너무도 뚜렷해 후대에 사는 우리와 깊이 연대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공감, 이해, 그리고 뼈 깊숙이 파고드는 애처로움.
전투신이나 디테일한 묘사로 분량을 늘리거나, 구구절절한 로맨스를 넣었다면 더 두꺼워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오히려 그런 걸 다 제거한 담백한 간결함이 이 책의 매력이다.
내가 한국소설을 잘 읽지 않던 이유 중 하나는 질질거리는 감정선과, 현실을 관찰하는 데 그치지 않고 평가하고 관철하려는 작가의 의지가 너무 짙게 느껴져서였다.
그런데 장르 소설은 그런 것을 떠나 그냥 사람 대 사람으로 즐기고 접근할 수 있는 벽 없는 편안함과, 현학적이고 지적인 언어유희 없이도 재미와 감동을 준다는 매력이 있었다. 그래서 장르 소설을 많이 읽는데, 거의 일본 책들이었다.
이제 한국의 장르 소설이 조금씩 태동하는 것 같다. 고무적인 일이다.
하지만 여전히 깨뜨릴 수 없는 벽은 내 앞에 존재한다.
같은 언어, 같은 나라 작품이다보니 도피할 수 없는 ‘현실’의 그림자가 떡하니 버티고 있다는 것과, 나의 견해와 다른 것들이 발견되면 괴롭다는 것. 그런 장벽들이 한국소설과 나 사이에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은 기대하게 한다.
앞으로 이것보다 더욱 풍성해질 ‘우리의 장르소설’을 긍정해보도록.
장벽 없이 스며드는 우리의, 우리만의, 우리의 이야기들.
그것이 전 세계에 읽히는
그런 꿈 같은 소설을.
행해만사.
“장희는 목이 좋은 공터에 자리를 펴고 앉은 후에 깃발을 내걸었다. 행해만사(行解萬事) 즉 무슨 문제든지 말만 하면 다 풀어준다는 뜻이었다.” (p. 10)
#신라공주해적전 #한국장르소설
장희는 목이 좋은 공터에 자리를 펴고 앉은 후에 깃발을 내걸었다. 행해만사(行解萬事) 즉 무슨 문제든지 말만 하면 다 풀어준다는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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