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빠일기
오샤레 지음 / 이야기마을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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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된것 중에 '요즘은 별 책이 다 나오네!' 라고 생각되었던게 두개있었는데, 하나는 '엽기적인 그녀' 였고, 다른 하나가 이 '호빠일기' 라 이거였지. 물론, 두개 다 내용을 읽어보기 전, 그러니까 책을 딱 손에 든 그 순간에 바로 들어버린 생각이긴 하지만 말이야.

여기서 하나 집고 가자면, '호빠' 란 뭐냐. 사실, 나도 뜻은 잘 몰라. 남자 접대부가 있는 호스트바, 정도라고만 대충 알고있는것이니까. 이 책은 '오사례' 라는 남자 접대부가 호스트 생활에서 일어나는 에피소드들을 적어놓은거야.

금남지대 호스트 바, 그 유쾌하고도 흥미진진한 사건들. 이라는 타이틀을 건 이 호빠일기는 미안한 얘기지만 유쾌하지도 흥미진진하지도 못했다. 그저, 남자 호스트가 호빠일기를 냈다. 그것뿐. 그냥 그것 뿐.

뭐, 각 언론사에서 올린 문구들도 웃기는 빤쓰다.
'상상을 초월하는 호빠 안의 풍경묘사 - 스포츠투데이' <- 상상을 초월하긴! 개뿔! 너네들도 룸쌀롱가서 여자들 끼고 그렇게 놓았잖아 -_-; 여자가 남자끼고 너네랑 똑같이 노니까 충격이냐?
'술과 쾌락이 넘치는 호스트 생활 7년의 참회록 - 스파크' <- 참회록이라니? 마지막에 두페이지 아버지 쓰러지신거에 대한 얘기가 이 책을 참회록으로 만들어줬나부다 -_-;
'유부녀들, 바람난 여자들의 놀라운 이중생활 보고서 - 우먼센스' <- 유부남들, 바람난 남자들의 이중생활 보고서는 나오질 않아서 섭하신가 보군요 -_-;

포르노도 나름대로의 문학성이 있고, 야한 이야기도 뭔가 담고 싶은게 있고, 섹스일기장도 뭔가 느끼는게 있을 것이라는 평소 내 기대가 완전히 무너졌다고 해야할까. 작가 딴에는 뭔가 이야기를 하고자 함이었던것 같은데 (머릿말을 보면) 읽다보면 그런것은 전혀 안느껴지고, 이것은 작가가 이해할 수 없게 너무 은유를 섞어줬거나, 내 이해력이 딸리거나 기대가 너무 컸던지도 모를 일이긴 하다.

이 책은, 쓴 사람이 여자가 아닌 남자라는 사실 빼고는 별로 놀라울 것도 충격이랄 것도 재미있을 것도 없다. 재미를 추구할 계획이었으면 화끈하게 재미있는 맛이라도 있어야 할터인데, 그런것도 아니고 어줍잖게 뭔가를 이 책으로부터 전하고자 말은 그럴싸하고, 그렇다고 호스트들의 슬프고 힘든 생활이 적절하게 묘사되었냐? 그것도 아닌것 같다. 그 어디에도 충실하지 못한 그냥 '호빠' 라는 소재에 온갖 구색을 끼워다 맞춰 책으로 보이게 만든 책?

그저, 다 아는 이야기, 남자가 접대부 입장에서 썼다, 그것뿐. 여자가 썼다면, 어떻게 이야기 하였을까? 그 잘난 언론사들은? 출판사는? 책으로 낼 생각을 했을까?

화려한 생활을 꿈꾸며 호스트계에 접어들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이 책을 꼭 읽어주었으면 한다고 머릿말에 나오던데, 반드시 그런것만 같지도 않다.

순진한 여성들이여, 부디 이 책을 읽으며, 신기하다, 재미있다, 통쾌하다, 나도 여자지만 저 여자들 넘하네, 저 남자들 불쌍해, 놀라웁다, 라는 소리는 하지 말아달라. 그러는 당신네들이 정말 안쓰러워 보일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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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고로 만든 집
윤성희 지음 / 민음사 / 200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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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성희 단편집 『레고로 만든 집』을 읽어보고 싶어진건, 작가의 이름 때문도, 제목이 와 닿아서도, 내용이 흥미로워서도 아니었다.

1973년생. 지금 나이 29살. 등단 1999년. 윤성희의 프로필을 결론 내보면, 27살에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등단하였다는 것인데, 등단이란 것이 서른을 넘은 나이에서도쉽지 않다는 걸 알고 있는 나에게 그것은 충격이었다. 어쩌면 부러움일 수도 있고, 혹은 도대체 어떤 글이길래, 라는 단순한 호기심일 수도 있다.

등단 후 첫 단편집 레고로 만든 집에는 총 10편의 단편소설이 수록되어있다. 신춘문예 당선작이자 제일 앞에 있던 레고로 만든 집을 읽은 하날이는, 사실, 어떠한 설명도 부연도 없이, 그저 주인공의 행동만을 묘사하는 소설의 의미를 찾아내기가 너무 어려워서였는지는 몰라도, 처음부터 이 책이 마음에 다가온건 아니었다. 오히려 이 책을 찌라시에 소개하지 않는게 더 좋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될 만큼 참 별로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한 작품 두 작품, 읽던 나는, 이 단편집에 수록된 주인공들에게 흥미를 느끼게 되었다. 각기 다른 직업의, 각기 다른 사람들이지만, 이상하게도 내 눈에는 다 같은 사람으로 보였다. 이들은 상황은 다르지만, 한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외로움. 혼자. 자신과의 싸움. 그리고, 그 외로운 자신의 모습을, 때로는 다른 사람을 통해, 때로는 자신을 통해, 찾아가고 있었다. 전부 같아 보이는 그들을 보며, 지루하다기보단, 어떤 한 사람을 하나하나 알아 가는 듯한 느낌을 받아, 나중에는 읽기가 매우 즐거워지기도 했다. 그와 동시에, 한편을 읽을 적마다, 나는 프로필을 들춰 윤성희의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기도 했다. 혼자 있는 주인공들, 외로운 주인공들, 그럼에도 버티는 주인공들, 자신의 세계에 빠져있는 주인공들.. 그 모습들이, 너무도 직설적으로 느껴져서, 혹시 작가 당신의 모습 역시 그러한 것 아니냐는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윤성희의 소설을 보면, 어떤 행동에 대한 설명이 거의 없다. 그냥, 가볍게 읽어보면, 약간은 싸이코틱한 행동들의 묘사를 그저 늘어놓은 기분이 들기도 한다. 주인공은 복사기에 자신의 얼굴을 프린트하고, 종이 비행기에 동전을 올려놓고 날려보기도 하고, 자동차를 멀리서 보면서 손으로 조종하기도 한다. 그 행동을 읽다보면, 그 행동을 왜 하게 되었는지 뭔가 설명을 원하게 되는데, 문제는 그런 설명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더 이상한 것은, 이 단편집을 읽으면 읽을수록 그런 설명이 필요가 없어진다는 점이다. 결국은 그 주인공이 다른 사람도 아닌, 결국엔 혼자여서 외로운, 우리들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생활에 혹은 자신의 가면에 가려져 스스로도 때때로 망각하는 원초적인 인간의 모습을, 이 소설의 주인공들은 자아를 찾는 행위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나뿐만이 아니라, 읽어본 사람들은, 이 소설의 주인공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지 않을까.

나는 앞으로도 윤성희의 소설을 더 찾아보게 될 것 같다. 소설을 읽음으로서 스스로를 찾아가고, 위로 받음은 내가 버틸 수 있는 힘이 됨과 동시에 내 스스로가 인간임을 즐기는 일이 될테니까 말이다.

인간은 결국 혼자라는 걸 알고 있는 넘들은 한번 읽어봐라. 이 소설을 읽는 동안,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혹시, 또 아는가, 이 외로운 세상에서 동지를 얻은 기분이 들지도. 반드시, 혼자라고 생각하고, 외로움을 느끼는 넘들만 읽어봐라. 그렇지 않은 넘들은, 공유하긴커녕 지루함을 느낄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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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올렛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200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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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숙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의 글을 읽어본 적 한번 없는데도 나는 그냥 싫었다. 그의 책을 읽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의 책 제목들을 접하며, 그의 책 서평들을 보며, 그의 책 광고카피들을 보며, 나는 한번도 접해본 적 없는 그의 글이 싫었다.

내게는 신경숙을 좋아하는 친구가 있다.친구는 언제나 눈물이 많다. 알고 지낸지 햇수로 4년이 되가는 그 친구는 옆에서 내가 지켜보기에도, 어쩌면 저렇게 일이 꼬일까, 싶을 정도로 안좋은 일만 생기는 친구다. 언제나 연인에게 희생하고 헌신하는 친구는 그 연인들로 인해 일은 항상 꼬이고 눈동자는 눈물로 가득하다. 친구를 볼때면 가끔씩 뻔한 드라마의 비련의 여주인공을 바라보는 기분이고, 그것은 이야기가 아닌 친구의 실제상황이라 슬프다.

어느날인가 친구는 말한다. 너나 나나 도화살인가봐. 이제는 그렇게 웃고 넘기는 친구는 연인에게 헌신하지 않은 후부터, 아니, 더 정확히는 연인보다는 TV에 집착하면서부터 조금쯤은 더 당당해 보이고 슬프지 않아 보인다. 똑같은 노래도 그 친구가 부르면 애절하고 슬프게 들렸었는데 이제는 그 친구와 노래방에서 Run To You를 부르며 깔깔 거리고 뒤집어 질 수가 있다.

내가 신경숙의 글을 싫어하는 이유는 그것이다. 제목부터 여리디 여린 비련의 여주인공이 항상 떠오른다. 나는 가냘퍼, 나는 불쌍해, 날 좀 불쌍하게 봐줘, 나는 여려터졌어, 나는 약해. 내가 간접적으로 접한 신경숙의 글들은 그런것들 뿐이라, 나는 별로 내키지 않는다. 인간은 누구나 가냘퍼, 누구나 불쌍해, 누구나 여려터졌어, 누구나 약해. 왜? 인간의 심장은 원래 약해 빠져서 어쩔 수 없는거야. 그런데 왜 나는 유독 신경숙의 책들에게서 구걸을 느껴버린 것일까. 약함을 숨기지는 않되, 구걸은 하지 말 것. 그것은 스스로가 더 비참해 지는 일이므로.

나는 신경숙의 바이올렛을 오늘 다 읽었다. 글을 제대로 읽어보지도 않고, 그렇게도 끔찍히 싫어한다는 건 말이 안된다고 생각해서 구입했다. 소설이라면 환장하는 내가 싫어하는 소설이 있다면 이유가 있어야 스스로에게 타당했다. 그래서 바이올렛을 집어들었다. 나는 신경숙의 글을 아무 생각 없이 읽어보기로 했다. 왜 하필 바이올렛이었냐면, 그때 당시 신경숙의 최근작이 그것이였기 때문이었다.

첫장부터 주인공의 불행한 탄생을 이야기 한다. 주인공의 어머니는 예상대로 창백한 피부에 슬픈 눈을 가진 가냘픈 사람이다. 단지 그런 설정을 빼더라도, 표현 자체부터 나는 진부함과 구걸을 느껴버린다. 잘생긴 남자를 표현할때 '뚜렷한 이목구비' 라고 하는 것과 흡사하다. 소설은 끝날때까지 주인공이 연약함을 직설적으로 강조한다. 역시 내 취향은 아니다. 어차피 현실에서 연약한 사람, 그 연약함을 강조 하고 싶었다면 강하지만 연약한 사람을 표현하는게 더 효과적이지 않았을까 싶다. 어차피 연약한 사람, 그렇게 연약해 죽겠어, 직설적으로 표현해주시니 오히려 반감이 일어난다. 다른 사람은 어떻게 느끼던 어쨌든 나는 그렇게 느끼므로 내 취향이 아니다.

소설을 다 읽고 뒤에 해설이라고 나온 부분은 나를 더 기가 질리게 한다. 워낙에 소설에 대한 해설이라는 것 자체를 별로 좋아하진 않는데다가 (소설 작가도 제대로 모를수도 있는 소설에 대한 해석을 감히 그 누가 '추측'이 아닌 '그렇다' 라고 결론내릴 수 있는가!) 해설에서 여성성과 남성성을 비교하는 점에서 끝까지 나를 불쾌하게 한다. 마치, '나는 여자여서 연약하고 불쌍한 사람이야' 라고 말하는 효과를 해설은 주고 말았다. 읽으면서도 읽고나서도 역시 싫어진다. 그의 다른 소설 역시 마찬가지로 내키지가 않는다. 하지만, 기회가 된다면 신경숙의 다른 소설들을 읽어볼 것이다. 신경숙의 그 많은 작품들 중에서, 나는 고작 하나, '바이올렛' 하나만을 본 것이므로. 하지만 어쨌든 '바이올렛' 이라는 소설은 싫다.

이제 연인도 없고 TV가 더 좋고 고양이에게 헌신하는 내 그 슬픈 친구는, 아직도 신경숙의 소설을 좋아하는지 문득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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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아주 낮은 환상
윤영수 외 지음 / 윤컴 / 199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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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 곳에 올라가면, 나는 몸을 절반쯤 밖으로 내밀고, 창 밖을 통해 아래를 한참 노려본다. 내가 이곳에서 그대로 고꾸라져 떨어지면 즉사할까, 병원에 실려가서 죽을까, 식물인간이 될까, 그냥 다치기만 할까, 를 가늠해 보기 위함이다.

이러한 안 좋은 습성은, 중학교 시절, 전학 온 아이가 12층에서 투신자살한 이후부터이다. 모 중학교에서 전교 1, 2등을 다투다가 부모님의 학구열로 이사온 아이었는데, 전학 후 10등뒤로 떨어지는 성적 때문에, 비관자살을 하였다. 전학 온 후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는게 남 같지 않아, 조금쯤 챙기고 붙어 다녔던 그 아이의 자살에 꽤 충격을 받은 나에게 남은 것은, 나도 뛰어내릴 때 최소 12층 이상에서 뛰어내려야겠다는 막연한 생각과, 차가운 12층의 새벽공기를 가르며 뛰어내릴 때의 그 아이 기분은 어땠을까가 문득 궁금해지는 것과, 높은 곳에 올라가면 이곳에서 뛰어내리면 어떻게 될까를 가늠해 보는 습성이 전부이다.

그러한 내가, 2001년 6월에 맞이한 건 죽음의 시도였다. 단지 그냥 죽고싶다가 아니라, 정말 죽어야 하겠다, 라는 결심으로, 작정을 하고 술에 취해, 흐느적흐느적 아파트 건물을 찾아 12층을 찾아 헤매이다가 어떤 녀석에게 결국은 붙잡혀서 아파트 건물 앞에서 몸싸움을 하고 미친 듯 소리를 지르고 멍이 날 정도로 팔목을 잡히고 뺨도 몇 대 맞고, 결국은 다른 녀석들에게 번쩍 들려 집 앞에 내동댕이쳐지고 만 나는. 나에게 더 이상 열정도 그 무엇도 남지 않았다고 생각했으므로 더 이상 존재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다. 한번 꺾인 결심은 결국, 다른 모든 것과 죽음을 교환하는 타협을 했다. 어차피 살아갈 집도 잃고 일자리도 잃고 애인도 잃고 목숨걸던 것도 잃었으므로 새로 시작하는 것, 내가 마음만 먹으면 되는 거였을지도 몰랐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죽음을 이제 꿈꾸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너 따위는 글을 쓸 자격이 없다며 어머니께 매질을 당하던 중학교 때도 죽고싶었고 세상엔 정말 믿을 사람이 없다는 걸 뼈저리게 느껴버린 고교시절에도 죽고싶었으며 자질부족임을 깨닫고 소설가로서의 꿈을 단념하며 대학을 그만 둘 때에도 나는 죽고싶었다. 아직 절반도 채 못살아온 인생이므로 나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어떠한 시련이 있을 적마다 죽음을 꿈꾸게 되겠지.

그런데, 요즘 드는 생각은, 죽음이라는 것은, 모든 것을 소진하게 되었을 때 이루어지는 것이고, 그 소진이라는 것은, 기력의 소진일 수도 있고, 열정의 소진일 수도 있고, 오기의 소진일 수도 있다. 자살이 스스로를 살해하는 것이라 해서 자신이 결정한다고 생각한다면 오판이다. 자살도, 때가 되었기 때문에 성공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생각해보게 되었다. 내가 왜 죽지 않았는지를.

하루에도 몇 번씩 죽음을 꿈꾸는, 혹은 갈망하는 사람은, 나 이외에도 매우 많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모두 죽지 않음은, 아직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아직 소진을 다 하지 못한 것이다. 죽을 때가 되면, 스스로 목숨 끊지 않더라도, 재수 없게 사고나서 죽을 것이며, 죽을 때가 아니면, 아무리 죽으려고 약을 먹고 목을 매고 뛰어내려도 운 좋게 살아날 것이다. 아무리 용기 부족으로 죽지 못하던 자살 중독자라 할지라도, 죽을 때가 되면, 어느 날 불끈! 하고 용기가 솟아날지도 모른다.

맨날 죽고싶다 죽고싶다 하던 내가 죽는 이야기뿐인 이 책을 덮으면서 울고 싶어진 건, 내가 왜 죽고싶은지를 생각해 봤기 때문이다. 한번쯤, 진심으로 죽음을 결심했던, 혹은 나처럼 항상 죽음을 염두에 두고 있는 사람이라면, 자신이 꿈꾸는 죽음과 한번쯤 비교하면서, 당신이 왜 죽고 싶은지를 한번쯤 생각해 보는 것도 좋겠다. 정말 절실히 죽고싶다면, 자신이 무엇을 소진해야 죽는지를 빨리 파악해 보는게 좋겠지. 그리하여 소진해라. 그러나 장담컨대 뜻대로 되기란 쉽진 않을 것이다. 왜? 소진하는게 그리 쉽지만은 않은 일이므로. 희망이란 이름의 중독성 강한 마약을 먹고사는 인간에게 소진이 어찌 쉽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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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너리그
은희경 지음 / 창비 / 200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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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면, 한 작가의 작품을 그나마 여럿 접해본 게 은희경의 소설인데, 나는 그닥 은희경을 좋아하진 않았다. 은희경 자체가 싫었다기 보다는 처음 접했던 '새의 선물'이 조금쯤은 내게 우스워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주제에 인기 작가의 소설이 우스워 보인다는 사실이 정말 우스운 것일지도 모르지만, 아이 답지 않은 아이를 주인공으로 쓰는 것보다 아이다운 아이를 주인공으로 쓰는 것이 더 어려운 것을 알고있던 나는, 아이답지 않은 아이 주인공의 전개에 찬사를 보내는 평론에 비웃음을 가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따져보면 내가 비웃은건 은희경이 아니라, 그 평론들이었는데도, 이상하게 은희경이 우스워 보였단 말이다. 나도 첫인상은 꽤 오래가는 편인지라 그 첫인상은 내가 은희경의 다른 소설을 읽을 때도 작품으로 생각하고 느끼기보다는 비웃음을 먼저 자아내게 하였다.

한마디로 은희경은 나에게 매우 우스워 보였고, 나는 같잖게 까불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 같잖은 첫인상을 느낀 지 3년이 넘은 오늘 은희경의 마이너리그의 마지막 장을 넘기면서 깨달은 것이 하나있다. 그렇게 우습게 생각했던 은희경의 소설을 나는 참 많이 읽었다는 점이었다. 우스워 읽을 가치도 없어 하면서 왜 나는 그리도 그녀의 소설을 사 보는데 시간과 돈을 아까워하지 않았던가. 적어도 3년 전보다 철이 들어버린 나는, 내가 은희경의 소설에 너무도 많은 공감을 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어떤 때는 제목이, 어떤 때는 주인공의 상태가, 어떤 때는 서술된 사상이 공감되었다. 소설책을 읽으면서 발췌하는 부분은 보통 좋다고 생각되기보다는 공감되는 부분이 많은 편인데, 적어도 한 책에서 하나 이상을 발췌하는 건 흔한 일이 아니었다.

물론 발췌한다는 것 자체부터가 그렇게 흔한 일은 아니었음에도, 나는 은희경의 마이너리그를 읽으면서 직접 손 뻗어 발췌한 것만 두 번이고, 그 외에도 굳이 발췌하지는 않았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해 발췌할 뻔한 것만 해도 몇 번이 되는지 모른다. 우선, 은희경과 나는 사상이 비슷했다. 생각하는 것도 비슷했고 주위를 보는 시선도 비슷했다. 은희경은 그 생각을 글로 써서 다른 이들도 공감할 수 있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고, 나는 생각을 쓰자면 딸리는 어휘력과 문장력에 차라리 말로 표현하는게 좋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아! 그래서 그녀는 소설가로구나! 나는 새삼 생각했다.

물론 마이너리그에는 내 또래 여자아이에 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마이너리그가 개띠 남성들의 성장을 그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절실하게 공감한 건, 그곳에는 살아오면서 누구나 느끼는, 혹은 너무 일상적이어서 의식조차 못하는 일반론이 숨어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그것들이 일반론이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그래서 그녀의 소설이 사랑 받는지도 몰랐다. 자신의 인생은 고뇌로 가득 차있고, 자신의 인생은 고달프고 힘들다, 라고 생각하는 일반 사람들에게, 바로 이거야! 라는 생각을 갖게 해주는 것이다. 한마디로 느끼기만 할 뿐 표현을 차마 못하는 간지러운 부분을 시원하게 콕콕 글로 표현해주고 있는 것이다. 물론 자기혐오가 강해서 나와 비슷한 사람을 알게되면 끔찍이 싫어하게 되는 일이 태반이긴 하지만, 세상 사람 다 몰라도 저 사람은 이해해 줄 수 있을 것 같은, 같은 편을 얻은 듯한 든든함으로 인해 호감이 생기는 사람도 있다.

물론 그런 사람들은 대게 나와 같은 모습이지만, 적어도 나보다는 더 나은 사람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일테다. 그것은 어쩌면 저렇게 되고 싶은 동경에서 파생된 감정일지도 모르겠다. 어느 면접에서 글 쓰기와 책읽기가 취미인 나에게 면접관이 '언제쯤 윤정원씨의 소설을 서점에서 만나볼 수 있을까요?' 라는 농담 섞인 질문을 했다. 그때 나는 '소설가라는 것이 아는 것도 많고 공부도 많이 해야하고 많은 경험이 있어야 하는 만큼 저에게는 아직 부족하다고 생각하지만, 제가 30대 중반이 되어서 능력이 된다면 시도를 해보고 싶습니다.' 라고 대답했던 적이 있다. 그래, 나는 오늘, 은희경같이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시원한 소설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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