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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너리그
은희경 지음 / 창비 / 2001년 4월
평점 :
생각해보면, 한 작가의 작품을 그나마 여럿 접해본 게 은희경의 소설인데, 나는 그닥 은희경을 좋아하진 않았다. 은희경 자체가 싫었다기 보다는 처음 접했던 '새의 선물'이 조금쯤은 내게 우스워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주제에 인기 작가의 소설이 우스워 보인다는 사실이 정말 우스운 것일지도 모르지만, 아이 답지 않은 아이를 주인공으로 쓰는 것보다 아이다운 아이를 주인공으로 쓰는 것이 더 어려운 것을 알고있던 나는, 아이답지 않은 아이 주인공의 전개에 찬사를 보내는 평론에 비웃음을 가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따져보면 내가 비웃은건 은희경이 아니라, 그 평론들이었는데도, 이상하게 은희경이 우스워 보였단 말이다. 나도 첫인상은 꽤 오래가는 편인지라 그 첫인상은 내가 은희경의 다른 소설을 읽을 때도 작품으로 생각하고 느끼기보다는 비웃음을 먼저 자아내게 하였다.
한마디로 은희경은 나에게 매우 우스워 보였고, 나는 같잖게 까불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 같잖은 첫인상을 느낀 지 3년이 넘은 오늘 은희경의 마이너리그의 마지막 장을 넘기면서 깨달은 것이 하나있다. 그렇게 우습게 생각했던 은희경의 소설을 나는 참 많이 읽었다는 점이었다. 우스워 읽을 가치도 없어 하면서 왜 나는 그리도 그녀의 소설을 사 보는데 시간과 돈을 아까워하지 않았던가. 적어도 3년 전보다 철이 들어버린 나는, 내가 은희경의 소설에 너무도 많은 공감을 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어떤 때는 제목이, 어떤 때는 주인공의 상태가, 어떤 때는 서술된 사상이 공감되었다. 소설책을 읽으면서 발췌하는 부분은 보통 좋다고 생각되기보다는 공감되는 부분이 많은 편인데, 적어도 한 책에서 하나 이상을 발췌하는 건 흔한 일이 아니었다.
물론 발췌한다는 것 자체부터가 그렇게 흔한 일은 아니었음에도, 나는 은희경의 마이너리그를 읽으면서 직접 손 뻗어 발췌한 것만 두 번이고, 그 외에도 굳이 발췌하지는 않았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해 발췌할 뻔한 것만 해도 몇 번이 되는지 모른다. 우선, 은희경과 나는 사상이 비슷했다. 생각하는 것도 비슷했고 주위를 보는 시선도 비슷했다. 은희경은 그 생각을 글로 써서 다른 이들도 공감할 수 있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고, 나는 생각을 쓰자면 딸리는 어휘력과 문장력에 차라리 말로 표현하는게 좋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아! 그래서 그녀는 소설가로구나! 나는 새삼 생각했다.
물론 마이너리그에는 내 또래 여자아이에 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마이너리그가 개띠 남성들의 성장을 그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절실하게 공감한 건, 그곳에는 살아오면서 누구나 느끼는, 혹은 너무 일상적이어서 의식조차 못하는 일반론이 숨어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그것들이 일반론이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그래서 그녀의 소설이 사랑 받는지도 몰랐다. 자신의 인생은 고뇌로 가득 차있고, 자신의 인생은 고달프고 힘들다, 라고 생각하는 일반 사람들에게, 바로 이거야! 라는 생각을 갖게 해주는 것이다. 한마디로 느끼기만 할 뿐 표현을 차마 못하는 간지러운 부분을 시원하게 콕콕 글로 표현해주고 있는 것이다. 물론 자기혐오가 강해서 나와 비슷한 사람을 알게되면 끔찍이 싫어하게 되는 일이 태반이긴 하지만, 세상 사람 다 몰라도 저 사람은 이해해 줄 수 있을 것 같은, 같은 편을 얻은 듯한 든든함으로 인해 호감이 생기는 사람도 있다.
물론 그런 사람들은 대게 나와 같은 모습이지만, 적어도 나보다는 더 나은 사람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일테다. 그것은 어쩌면 저렇게 되고 싶은 동경에서 파생된 감정일지도 모르겠다. 어느 면접에서 글 쓰기와 책읽기가 취미인 나에게 면접관이 '언제쯤 윤정원씨의 소설을 서점에서 만나볼 수 있을까요?' 라는 농담 섞인 질문을 했다. 그때 나는 '소설가라는 것이 아는 것도 많고 공부도 많이 해야하고 많은 경험이 있어야 하는 만큼 저에게는 아직 부족하다고 생각하지만, 제가 30대 중반이 되어서 능력이 된다면 시도를 해보고 싶습니다.' 라고 대답했던 적이 있다. 그래, 나는 오늘, 은희경같이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시원한 소설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