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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올렛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2001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신경숙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의 글을 읽어본 적 한번 없는데도 나는 그냥 싫었다. 그의 책을 읽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의 책 제목들을 접하며, 그의 책 서평들을 보며, 그의 책 광고카피들을 보며, 나는 한번도 접해본 적 없는 그의 글이 싫었다.
내게는 신경숙을 좋아하는 친구가 있다.친구는 언제나 눈물이 많다. 알고 지낸지 햇수로 4년이 되가는 그 친구는 옆에서 내가 지켜보기에도, 어쩌면 저렇게 일이 꼬일까, 싶을 정도로 안좋은 일만 생기는 친구다. 언제나 연인에게 희생하고 헌신하는 친구는 그 연인들로 인해 일은 항상 꼬이고 눈동자는 눈물로 가득하다. 친구를 볼때면 가끔씩 뻔한 드라마의 비련의 여주인공을 바라보는 기분이고, 그것은 이야기가 아닌 친구의 실제상황이라 슬프다.
어느날인가 친구는 말한다. 너나 나나 도화살인가봐. 이제는 그렇게 웃고 넘기는 친구는 연인에게 헌신하지 않은 후부터, 아니, 더 정확히는 연인보다는 TV에 집착하면서부터 조금쯤은 더 당당해 보이고 슬프지 않아 보인다. 똑같은 노래도 그 친구가 부르면 애절하고 슬프게 들렸었는데 이제는 그 친구와 노래방에서 Run To You를 부르며 깔깔 거리고 뒤집어 질 수가 있다.
내가 신경숙의 글을 싫어하는 이유는 그것이다. 제목부터 여리디 여린 비련의 여주인공이 항상 떠오른다. 나는 가냘퍼, 나는 불쌍해, 날 좀 불쌍하게 봐줘, 나는 여려터졌어, 나는 약해. 내가 간접적으로 접한 신경숙의 글들은 그런것들 뿐이라, 나는 별로 내키지 않는다. 인간은 누구나 가냘퍼, 누구나 불쌍해, 누구나 여려터졌어, 누구나 약해. 왜? 인간의 심장은 원래 약해 빠져서 어쩔 수 없는거야. 그런데 왜 나는 유독 신경숙의 책들에게서 구걸을 느껴버린 것일까. 약함을 숨기지는 않되, 구걸은 하지 말 것. 그것은 스스로가 더 비참해 지는 일이므로.
나는 신경숙의 바이올렛을 오늘 다 읽었다. 글을 제대로 읽어보지도 않고, 그렇게도 끔찍히 싫어한다는 건 말이 안된다고 생각해서 구입했다. 소설이라면 환장하는 내가 싫어하는 소설이 있다면 이유가 있어야 스스로에게 타당했다. 그래서 바이올렛을 집어들었다. 나는 신경숙의 글을 아무 생각 없이 읽어보기로 했다. 왜 하필 바이올렛이었냐면, 그때 당시 신경숙의 최근작이 그것이였기 때문이었다.
첫장부터 주인공의 불행한 탄생을 이야기 한다. 주인공의 어머니는 예상대로 창백한 피부에 슬픈 눈을 가진 가냘픈 사람이다. 단지 그런 설정을 빼더라도, 표현 자체부터 나는 진부함과 구걸을 느껴버린다. 잘생긴 남자를 표현할때 '뚜렷한 이목구비' 라고 하는 것과 흡사하다. 소설은 끝날때까지 주인공이 연약함을 직설적으로 강조한다. 역시 내 취향은 아니다. 어차피 현실에서 연약한 사람, 그 연약함을 강조 하고 싶었다면 강하지만 연약한 사람을 표현하는게 더 효과적이지 않았을까 싶다. 어차피 연약한 사람, 그렇게 연약해 죽겠어, 직설적으로 표현해주시니 오히려 반감이 일어난다. 다른 사람은 어떻게 느끼던 어쨌든 나는 그렇게 느끼므로 내 취향이 아니다.
소설을 다 읽고 뒤에 해설이라고 나온 부분은 나를 더 기가 질리게 한다. 워낙에 소설에 대한 해설이라는 것 자체를 별로 좋아하진 않는데다가 (소설 작가도 제대로 모를수도 있는 소설에 대한 해석을 감히 그 누가 '추측'이 아닌 '그렇다' 라고 결론내릴 수 있는가!) 해설에서 여성성과 남성성을 비교하는 점에서 끝까지 나를 불쾌하게 한다. 마치, '나는 여자여서 연약하고 불쌍한 사람이야' 라고 말하는 효과를 해설은 주고 말았다. 읽으면서도 읽고나서도 역시 싫어진다. 그의 다른 소설 역시 마찬가지로 내키지가 않는다. 하지만, 기회가 된다면 신경숙의 다른 소설들을 읽어볼 것이다. 신경숙의 그 많은 작품들 중에서, 나는 고작 하나, '바이올렛' 하나만을 본 것이므로. 하지만 어쨌든 '바이올렛' 이라는 소설은 싫다.
이제 연인도 없고 TV가 더 좋고 고양이에게 헌신하는 내 그 슬픈 친구는, 아직도 신경숙의 소설을 좋아하는지 문득 궁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