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계자들
김언수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김지운 감독의 <달콤한 인생>을 봤던 기억이 난다.
스산한 바람과 함께 낮게 깔리듯 시작되는 이병헌의 나레이션. 마치 이어지는 총소리들과 난자하게
펼쳐질 피의 향연 따위는 자신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듯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이 나무인지 나의 마음인지
조용히 물어오며 시작되는 오프닝이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영화를 보고 있는데도 왠지 시 한 편을 읊조리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몇 년 후, 지금 <설계자들>을 만났다.

 
킬러들, 비정한 그들의 피도 눈물도 없을 것 같은 세계, 탄생만큼이나 흔하게 존재하는 죽음들의 행진이
펼쳐 질 거란 기대와는 달리 <설계자들>은 설계자들 뒤에 존재하는.. 아니 설계자들 앞에서 그들이 (얼마
전에 읽었던 컨설던트와는 거의 정반대 선상에 서있는 이야기이다.) 만들어낸 끔찍한 죽음을 실제로 그려
내는 킬러들의 너무나 소소한 일상을 이야기한다.


비정하면서도 소박하고, 치열하면서도 유머러스한 모순. <설계자들>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모순이 된다.


수녀원 쓰레기통에 버려졌던 래생은 도서관의 주인인 너구리 영감 손에 맡겨져 성장한다. 말이 좋아 맡겨진
것이지 래생은 학교는 근처에도 못가봤을 뿐만 아니라 몰래 책을 읽다가 너구리 영감에게 들켜 칭찬은 커녕
혼만 나는 어린 시절을 보내다가 열일곱살때부터는 킬러로 활동하기 시작한다. 킬러계(?)에서는 나름 베테랑
축에 들지만 워낙 숫기없는 성격에 항상 자신을 무시하는 너구리 영감을 시작으로 한 래생의 간소한 대인
관계 탓에 대체 무엇이 래생을 살아가게 만들까하는 궁금증을 유발시키기에 충분하다.

그렇게 오늘이 어제같고 어제가 내일같던 어느 날 전직 장군이었던 노인을 원래 설계와는 달리 처리하면서
너구리 영감의 제자이자 라이벌인 한자의 뜻을 거슬린 래생, 한술 더 떠서 킬러계에서 독보적인 위치에 있던
추 역시 설계를 어기고 목표물을 살려주는 잘못을 저지르고 한자가 고용한 킬러 이발사에게 죽임을 당하는
일이 발생하며 래생 역시 살해 위협을 받게 된다. 이렇게 1년이 되풀이되던 오늘 같았던 래생의 삶이
송두리째 흔들리기 시작한다.

 
<설계자들>을 읽고 있으면 많은 기억들과 수많은 모순된 감정들이 고개를 들이민다.
래생 來生. 이름부터 다음 생을 기약해야할 것만 같아 왠지 슬픔이 밀려오다가도 전작 <캐비닛>에서 보여
졌던 작가 특유의 유머러스함이 턱 하니 나타난다. 아슬아슬한 래생의 삶이 그 유머에 오버랩되자 웃고
있지만 눈에서는 눈물이 날 것만 같은 아이러니한 상황을 만들어낸다.


그리 긴 래생의 여정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리 스펙터클한 래생의 삶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긴
호흡을 한 번 하고 책을 읽어나가야만 했다. 길게 숨을 쉬지 않으면 이미 너무 깊게 래생에게 동화되어
버린 내가 책을 다 읽지도 못하고 무너져버릴 것 같았다.

그것이 김언수 작가의 힘이다.
몇 마디하지 않고도, 화려한 미사여구를 쓰지 않아도 미약하지만 강한 몸짓, 유머러스하며 가볍듯 하다가도
어느 순간엔 묵직하게 가슴을 내리 누르듯 철학적인 물음을 던지는 것이다.


<캐비닛>이 워밍업이었다면 <설계자들>은 김언수의 힘찬 도약이라 말하고 싶을 만큼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지만 어디서도 들어보지 못했던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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