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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의 세계
온다 리쿠 지음, 권남희 옮김 / 북폴리오 / 2009년 5월
평점 :
절판
초등학교 때 글짓기 발표 시간 때의 일이다. 평소부터도 글 쓰는 것을 좋아했던 나는 그 날도 신나게
빠른 속도로 글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고 글쓰기를 마치자마자 얼른 교단 앞으로 나가서 친구들에게
이 멋진 글을 들려주고 싶었다. 그래서 얼른 손을 들어 나가서는 내 작품을 "낭독"하기 시작했는데
발표가 끝나자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길 글을 잘 썼는데 처음에 높임말로 끝맺음을 하더니 끝으로
갈수록 반말로 끝을 맺었다고 하는 게 아닌가. 과연 다시 보니 그랬다. 순간 어찌나 창피하고 후회
스럽던지.. 너무 신나게 글을 써내려 간대다가 얼른 자랑이 하고 싶어 미처 내가 쓴 글을 재검할 기회를
놓쳤다는 사실이 엄청나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정말 오랜 만에 잊고 싶은 기억이 떠오른 건 오래 간만에 집어든 온다 리쿠의 작품이 그 때의 기억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자신있게 '나의 작품의 집대성이다'라고 공언했다는 온다 리쿠에겐 미안하지만
<어제의 세계>을 읽으면서 내내 들었던 생각은 예전에 익히 보여줬던 온다 리쿠의 모든 것의 반복이라
정정해주고 싶다. 온다 리쿠 역시 자신의 글 솜씨에 반한 너무 감탄한 나머지 온갖 오류들을 쉽게 눈감아주고
익숙한 이야기의 전개에서 느껴지는 기시감 따위는 지나친 자아도취감과 맞바꿔버린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마저 든다.
한 남자의 죽음을 다루면서 너무 많은 장치들을 풀어놓는 바람에 온다 리쿠, 이 분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이야기들이 참 많으신가 보다하는 생각이 들었을 뿐 아니라 열심히 이것저것 모아놓긴 했는데 서로의 유기성이
그다지 많지 않아 한 사람의 죽음을 다각도에서 지켜봤다는 짜임새 있는 구성보다는 순식간에 그 장치들이
중구난방에 잡동사니가 되어버렸다.
개인적으로 가슴 한 켠을 내리누르는 듯한 은유는 좋아하는 편이지만 온다 리쿠의 <어제의 세계> 속에
등장하는 은유와 직유는 괜한 지면 낭비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다작을 했고 미스터리와 노스텔지어를 많이
다룬 작가라면 이제쯤은 독자에게 한차원정도는 업그레이드된 작품 세계를 보여줘야 하지 않을까.
아멜리 노통브에 이어 또 한 명의 작가가 내 리스트에서 방출되어야 하는 건 슬픈 일이지만 너무 제자리에만
머물고 있는 작가까지 끼워놓기엔 재능있는 작가들이 너무 많고 내 리스트의 용량은 너무 부족할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