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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의 구
김이환 지음 / 예담 / 2009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어느 날 갑자기 지구가 멸망했다. 하지만 그 멸망의 원인은 외계인의 침공도 아니고,
무시무시한 핵 전쟁도 아니고, 세기말이면 빈번하게 등장했던 세상이 꺼지는 종말도
아니다. 단지 미지의 구 출현이 그 이유다.
남자는 어느 날 가게에 담배를 사러가던 도중 커다랗고 검은 색으로 된 정체불명의
구를 목격한다. 그 구는 그 정체를 사람들이 알아차리기도 전에 옆에 있던 아저씨를
빨아들여 흡수해버린다. 너무 놀란 남자는 경찰에 신고할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부모님이 계신 곳으로 향하지만 구의 출현에 놀란 사람들어낸 혼잡과 군의 발빠른
통제로 인해 남자의 귀향길이 막혀버리고 이어 남자의 기나긴 도주 이야기가 시작된다.
<절망의 구>는 제목만큼이나 암울하다. 가까이에 있는 사람을 닥치는 대로 흡수시켜
버리는 구의 존재는 사람을 가리지않고 덮쳐버리는 자연재해를 연상시키기도 하고 많은
사람이 구에 흡수되버려 황량하다 못해 으스스해져버린 도시의 풍경은 <로드>의 회색빛
도시를 떠올리게끔 만든다.
큰 줄기만 보자면 미지의 구에게 쫓기게 된 남자의 이야기지만 그 속에는 작은 사회의
자화상이라 할 만큼 많은 군상들을 담아내고 있다. 원인 모를 재앙에 국민들을 버리고
제일 먼저 도망가버리는 정치인, 종교의 힘에 의지한 채 전혀 논리적이지 않은 나름의
규칙을 이미 만들어낸 종교인들, 돌고 도는 헛소문에 떠밀려 다니는 평범한 사람들까지.
예고없이 찾아온 절망적이고 종말적인 상황에 대응하는 갖가지 사람들의 모습은 흥미롭기도
하지만 어떻게 보면 그간 나왔던 종말 영화나 하다 못해 좀비 영화만 하더라도 익숙히
보아왔던 설정들에다가 모두가 원인도 알지 못한 채 구에 빨려들어가는 수동적인 모습은
<눈먼자들의 도시> 속 그들과도 닮아있다.
그러니까 뭐랄까 무엇인가에 늘 쫓겨 허둥거리고 불안해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담고자
했다면 그 전개가 조금 식상하고 사건 자체도 시작을 칭찬할만 하지만 시작을 조금 지나서는
진부해지고 결과적으로는 뭔가 뒷맛이 아쉬운 작품이 되어버린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