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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즈의 닥터 - 제1회 자음과모음 문학상 수상작
안보윤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09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괴이하고 어지럽고 무섭고도 이상한 소설.
그리 길지도 않은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몇 번의 이야기가 꼬이고 뒤틀려 있어 어느 순간엔
내가 어디에 있는지조차 헷갈리기 시작했던 <오즈의 닥터>.
오즈의 닥터 "팽"은 처음부터 기묘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검은 색 홈드레스에 어울리지 않게
두꺼운 목과 각진 어깨, 보라색 입술, 드레스 틈을 비집고 보이는 길고 빳빳하게 자리잡은 다리
털까지 부조화의 상징과도 같은 모습으로 등장한 닥터 팽은 저래 보여도 정신과 의사다.
얼마 전 "억울한 일"을 당한 김종수는 법원의 명령으로 정신과 상담을 받게 되는데 그 덕분에
의사같지도 않은 닥터 팽과의 면담을 이어 나가야만 한다. 환각을 겪고 있는 김종수는 자신의
얼룩져 있는 어린 시절과 환각의 원인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이야기를
풀어갈수록 어긋나는 기억들이 드러나고 너무 까맣게 잊고 있던, 그러나 섬뜩하리만치
끔찍한 일들이 조금씩 밝혀진다.
책을 읽으면서 마치 소용돌이나 험난한 미로 속에 휩쓸렸다는 기분이었다. 그렇다고 기분 나쁜
어지러움을 느끼는 게 아니라 머리가 어지럽도록 재밌었다. 현실과 환각이 교차하고 어느 순간에
현실과 환각이 교묘하게 맞물리고 단서 하나 하나를 찾아낼 때마다 숨은 그림이라도 찾은 것처럼
신이 나서 책에 나오는 한 글자 한 글자에 집중하며 읽게 되기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오즈의 닥터> 안에 있는 설정들 자체는 아주 어린 시절만의 추억이 된 것들에 대한
향수를 불러 일으키거나 6~ 70년대를 배경으로 했던 다른 작품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오히려
여태껏 봐왔던 복고풍의 작품들 중에서 가장 아프고 또 구질구질하다 싶을 정도로 익숙한 설정들이
많지만 닥터 팽이라는 초유의 인물의 등장과 곳곳에 즐비한 트릭들로 구질구질해질 수도 있는
설정들을 산뜻하고 기묘하게 바꿔놓았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 중에 하나가 아주 많이 읽고 싶었던 책이 정말 정신없이 재밌게 읽혀질
때인데 <오즈의 닥터>가 참 오랜만에 그 기분을 만끽하게 해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