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빌 브라이슨의 재밌는 세상
빌 브라이슨 지음, 강주헌 옮김 / 추수밭(청림출판) / 2008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어린 시절이 번개처럼 지나간다는 말은 우리 삶에서 잘못 알려진 신화에 불과하다.
키드의 세계에서 시간은 훨씬 느리게 움직인다. 후텁지근한 오후의 교실에서는 시간이 다섯 배쯤
느리게 흐르고, 어떤 자동차로 여행하든 8킬로미터를 넘은 순간부터는 시간이 여덟 배나 느리게
움직인다.
특히 네브래스카나 펜실베이니아처럼 가로로 길쭉한 주를 횡단할 때는 무려 86배까지 치솟는다.
또 생일, 크리스마스, 여름방학 등을 앞둔 주에는 시간이 굼벵이처럼 흘러간다. 따라서 어른의 기준으로
계산할 때 어린 시절은 족히 수십 년은 된다. 오히려 어른의 삶이 눈 깜짝할 새에 끝난다."
어렸을 때 그렇게 왈가닥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난 밖에서 놀다 오면 항상 윗옷과 바지 중에 한 군데는
찢어져 있었고 툭하면 넘어져서 여기저기 긁히고 피가 맺혀 있었다. 9살이나 10살쯤 술래잡기를 하다 돌에
찍혀 생긴 무릎에 상처는 아직까지 남아있을 정도고 공사장 근처에서 놀다가 삐쭉 솟은 못 하나가 운동화를
뚫고 발바닥까지 돌진했던 적도 있었다.
이처럼 내 어린 시절은 여기저기 훈장처럼 남아있는 상처와 함께 기억될 정도다. 하지만 당연히 내 어린
시절을 떠올려보면 그 때 거길 다쳐서 무지 아팠어..하는 기억이 아니라 그 때 거기서 어스름이 지는 저녁까지
친구의 얼굴도 잘 안보일 정도가 되면 집으로 들어가곤 했던 즐거웠던 기억만 떠오른다.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하면 할 얘기가 너무 많아서 도무지 끝이 없지만 여기 빌 브라이슨은 특유의 유머와 재치로
자신의 어린 시절과 당시 미국의 모습까지 버무려 놓았다. 어느 날 지하실에서 선더볼트(번개) 무늬가 그려진
낡은 스웨터를 발견한 여섯 살의 빌 브라이슨은 그것을 입고 망토를 두르면 초능력을 발휘하게 된다고 믿었다.
바로 그 이름도 유명한 ‘선더볼트 키드’라는 이름의 용사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선더볼트 키드의 활약과 (혹여
자신을 어리다고 무시하거나 이상한 말을 지껄이거나 웃기지도 않은 농담을 한 어른에게는 가차없이 선더볼트
광선을 쏘아 처치했다.) 함께 여섯 살 난 아이의 눈으로 보았던 이상한 어른들의 세계와 어쩌면 어른들보다 더
사건사고도 많고 중대한 일도 더 많았던 어린이들의 세상이 펼쳐진다.
참 이상하게도 작가와 내가 놀았던 (어린 시절이었던) 시간과 배경은 거의 천지차이임에도 불구하고 빌
브라이슨이 들려주는 어린 시절 이야기 속에는 내가 아는 부분도 많고 그만큼 공감 가는 부분도 많았다.
가령 예를 들면 무슨 민방위훈련인지 뭔지 한다고 책상 밑으로 기어 들어가 쪼그리고 있어야 했던 일, (작가는
이 현상에 대해서도 원자 폭탄을 과연 책상이 막아 줄까하고 당연한 의문을 제기했지만)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등장해 동네의 아이들 모두를 황홀경에 빠뜨렸던 소독차 등..(난 소독차를 무지 무서워해서 놀다가도 소독차
소리가 나면 빛의 속도로 뛰어 집으로 돌아가곤 했지만) 내 유년 시절의 기억까지 고스란히 떠올리게 만들고
책을 읽는 내내 작가의 추억과 내 추억이 내 머릿 속에 공전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렇게 신나는 빌 브라이슨 어린이의 유년의 추억을 펼쳐놓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막 끝난 전쟁, 그
전쟁으로 인해 아마 유일하게 덕을 봤던 부유하고 윤택한 50년대 미국과 냉전과 반공산주의, 무분별하게 자행
되었던 미사일 시험 발사 등 신나고 즐거웠던 작가의 유년 시절과 대비되어 보이기까지 하는 당시 미국의 모습을
적절히 배치시키고 있다.
이 작품을 반쯤 읽었을 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정말 제목 그대로 자신이 느꼈던 즐거움을 독자에게 고스란히 전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키득키득거리게 만드는
이런 작품을 물론 신나는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해서 다 쓸 수 있는 건 아니겠지만 이 정도쯤으로 쓸 수 있어야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자신만의 추억을 남에게 보일만한 자격이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