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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제국 ㅣ 도코노 이야기 1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국일미디어(국일출판사) / 2006년 12월
평점 :
품절
고등학교 때 제 2외국어로 일본어를 배웠었는데 어쩐일인지 배우면 배울 수록 실력이 떨어졌고 성적이
안 나오자 흥미도 잃게 됐다. '일본어 공포증'이랄까.. 뭔가를 외우고 쓰는 일만은 자신있었는데도
일어의 기본인 히라가나와 가타카나를 어렵게(억지로) 외웠고 일본어는 짧은 단어도 헷갈려하기 일쑤
였다. 그러니 여지껏 일본 소설을 잘 읽지 않았던 데에는 나름 이유가 있었던 거다.
일본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이름이 죽어도 머릿 속에 입력이 안되서 그나마 주인공 두 세 명까지는
커버하지만 그 이상이 넘어가면 또 다시 평소보다 두 배의 집중력을 발휘해야만 하는 경우가 되는 것이다.
온다 리쿠의 도코노 일족에 관한 첫 번째 이야기인 '빛의 제국'은 연작 소설이다. 언뜻 보기에는 10편의
단편으로 보이지만 각각의 이야기들은 도코노 일족이라는 신비한 힘을 가진 사람들을 뿌리에 두고 가지를
뻗어 가듯 교묘하게 이어져있다. 물론 읽다 보면 아.. 이 이야기가 아까 그 얘기에서 이어지는구나하는
생각이 저절로 들지만 미쓰노리, 미야코, 미사키, 아쓰시, 아키코, 아이코... 등등 이렇게 글자로 써놓기만
해도 어지러운 인물들의 이름 때문에 나 혼자 바짝 더 긴장하고 뭐 놓친거 없나?하고 자꾸만 책장을 되돌려
들춰보게 된다. 그런 지극히 개인적인 사정만 빼면 하나같이 정말 멋진 작품들이다.
‘도코노(常野)’란 늘(常) 재야(野)에 있으라는 의미로, 일본 도호쿠 지방에 있는 어떤 마을이자 그 마을에
사는 일족을 의미한다. 방대한 양의 서적을 암기하는 힘, 멀리서 생긴 일을 아는 힘, 가까운 미래를 예견하는
힘 등 여러 가지 특이하고 지적인 능력을 지닌 일족은 지극히 온후하고 예절을 중시하는 성품의 소유자들로,
권력을 지향하지 않는다.
빛의 제국은 도코노 일족 그들의 역사이자 서로 알지는 못해도 이렇게저렇게 얽힌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다.
대개 판타지적인 요소가 강한 이야기들은 재밌지만 아득히 멀고 낯선 느낌까지 동시에 주는 경우가 많은데
도코노 일족이라는 일종의 초능력을 지닌 사람들의 이야기에는 그런 낯선 느낌이 별로 없다. 그건 어쩌면
그들이 여느 판타지 소설 속 주인공들처럼 미지의 괴물체와 싸우고 악마와 대적한다든지 하는 정말 상상에
서나 나올 법한 행동들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소중한 기억들을 담아 간직하고 그 기억이 필요할 때
꺼내어 보여주고, 사람들에게 앞으로 닥쳐 올 불행을 예측하고 함께 버텨주는.. 말하자면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 존재하고 있을 것 같은 친근함을 주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온다 리쿠는 이렇게 자칫하면 굉장히 이질감을 불러 일으킬 만한 소재로도 이렇게 환상적이면서도 친숙하고
때로는 아름답고도 슬픈.. 우리가 느낄 수 있는 희노애락을 모두 담아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