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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지니아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3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07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분명히 내 손으로 직접 엎어 놓고 시작한 퍼즐이었는데 완성시켜 놓고 보니 전혀 다른 그림으로
완성되어 있다. 원래 그림과 닮은 듯하면서도 어딘가 미묘하게 달라진 듯한 느낌. 온다 리쿠의
"유지니아"를 다 읽고 난 후 느낌이 딱 그랬다.
나를 향해 말을 걸어 오듯이 시작되는 이야기는 여느 소설과는 달리 이제 시작될 이야기에 대한
기본적인 단서조차 주지 않은 채, 마치 내가 사전에 정보를 다 알고 있는 것처럼 시작된다.
그래서 처음엔 이 뜬금없는 시작을 받아들이는 일이 낯설게도 느껴지지만 조금 읽다보면 이것이
지금 한 인터뷰어가 과거에 있었던 사건에 대해 조사하면서 만나게 되는 사람들과의 인터뷰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지금으로부터 20년 전 호쿠리쿠 지방의 K시, 대대로 영향력을 행사해오던 아오사와 가의 잔칫날.
축제에 들떠있던 그들에게 음료가 배달된다. 워낙에 선물이 많은 집안이라 별의심없이 받아들지만
선물로 배달된 음료에 독이 들어 파티에 참석했던 아오사와 일가족은 물론 이웃들까지 죽는 사건이
일어난다. 일가족이 모두 죽은 가운데 단 한명만이 그 끔찍한 아비규환 속에서 살아남는다.
이야기는 그곳에서 살아남은 눈 먼 소녀 히사코 아오사와와 사건에 연루되거나 사건을 아직 기억하는
이들의 회상으로 채워져 나간다. 하지만 한 사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건을 기억하는 관점과 증언들은
인물에 따라 차이를 보이며 갈수록 그 사건의 진위나 범인의 존재가 희미해져간다. 아니 오히려 범인이
누구인지 짐작하는 건 쉬웠다. 갈수록 모호해지는 건 왜 그런 짓을 저질렀나?하는 것이었다.
"유지니아"는 추리 소설로서도 충분히 긴장감을 자아내는 작품이었지만 그보다는 수많은 인터뷰 속
사람들의 이야기가 더 마음이 끌렸다. 자신만의 세상을 꿈꾸며 모든 것이 고요해진다는 천사가 지나가는
시간을 기다리는 소녀, 다른 이의 삶을 갈망하는 소녀, 살아남았다는 자책과 죽음을 막을 수 있지 않았을
까하는 후회 속에 무시무시했던 독살 사건이 아프게 다가왔다.
어떤 형태로든지 간에 그 여름에 있었던 비극은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어떤 이에게는
기억하고 기록해야만 할 일로, 어떤 이에게는 죄책감으로, 어떤 이에게는 분노 또는 풀어야 할 숙제처럼
그들의 삶을 지배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아팠다.
결국 그 비극으로 인해 등장인물들은 자신들이 소원했던 혹은 욕심냈던 삶을 온전히 살아내지 못하고
묶여버린다. 그런 감당하기 힘든 비극에 지배당하는 이들을 보며 느끼는 애잔함, 안타까움같은 것이 이
작품이 나를 사로잡는 또 하나의 힘이 아닐까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