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원고
트래비스 홀랜드 지음, 정병선 옮김 / 난장이 / 2009년 6월
평점 :
품절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 당연히 사람을 화려하게 피었다가도 금세 시들시들해버리는 꽃에 견주는
것 자체가 가치가 없는 일이겠지만.. 그러나 한 때 (혹은 지금까지도) 사람이 사람을 귀히 여기지
않고 아무 것도 아닌 사상의 차이때문에 사람이 타인의 생명을 짓밟는 일도 서슴치 않았던 시대가
있다. 2차 세계 대전이라는 무시무시한 전쟁이 온 유럽을 휩쓸고 다녔던 그 시대도 그랬다.
스탈린 취하에서 소련 국민들은 자신들의 의견을 마음껏.. 아니 한마디로도 편히 내비칠 수 없었고
독재자를 빗댄 농담조차도 징역살이나 심하면 총살의 타겟이 되던 시대.
 
키로프 아카데미의 전직 문학교사였던 주인공 파벨은 무고한 동료교사를 모함하는 사건에 연루되어
학교에서 쫓겨난 뒤 루뱐카 교도소의 문서관리인으로 일하게 된다. 모스크바에 위치에 스탈린에게
반기를 들거나 자유 사상이 조금이라도 깃들어 있는 글을 쓰거나 생각을 비친 지식인들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버렸던 루뱐카 교도소에서 일하던 파벨은 어느 날 이삭 바벨이라는 작가와 인터뷰
하게 되고 이름 높은 문인치고는 너무나 형편없는 그의 처지를 동정하기에 이른다. 이 동정은
즉각 소각장으로 향해야하는 바벨의 원고 중 일부를 숨기게 되는 무척이는 위험한 상황에
처하게 되는 원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사라진 원고>는 전체적으로 우중충한 잿빛 풍경을 아우르고 있고 그 풍경보다 더 우울하고
불안한 상황들에 내던져진 인물들을 보고 있노라면 내가 스탈린 치하에서 태어나지 않았다는
사실하나만으로 다행이다 싶은 생각이 절로 든다. 민중의 답답하고 호소할 곳 없는 심정을
보살피고 보듬어 준 작가의 비참한 행색이 기폭제가 되어 동료와 친구조차 믿을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던 파벨은 자신의 삶과 과거와 미래마져 되돌아보는 계기를 갖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억압적인 시대에 반대해서 뭔가 큰 일을 한 것은 아니다. 그렇게 하기엔 독재의 무게와
감시의 그늘은 너무나 크고 무겁다.
 
그리고 파벨 주위를 둘러싼 인물들의 사정도 그를 결코 자유로운 영혼으로 승화시키지 못하게
발목을 잡고 있다. 갑작스러운 열차 사고도 행방조차 알 수없는 아내 엘리냐에 대한 기억,
갑작스러운 기억 상실 증세를 보이며 나날이 쇠약해져가는 어머니의 존재, 아버지와도 같은
존재였던 이의 위기.. 그렇게 종말로 향하고 있는 듯한 세상과 비극으로 치닫고 가는
자신의 삶 사이에서 파벨의 고민을 단순한 그의 고민이 아닌 독자의 고뇌로까지 이어져온다.
 
<사라진 원고>와 같이 어쩔 수 없는 시대의 비극에 빠져 희박한 공기 속으로 빠져드는 인간의
삶은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만든다. 내가 그곳에 있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 내가 그들을 보는
시선이 아무리 가슴이 아파도 결국엔 동정에 그칠지도 모른다는 생각.. 내가 그 상황이라면
파벨과 같은 용기를 뿜어낼 수 있을까하는 생각까지..
 
그렇게 사라진 원고는 동시대에 살고 있지않지만 그 시대의 고민을 함께 하도록 만들며 그
비극을 결코 잊지 말라는 충고를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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