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꽃 한 송이의 생명조차 이해할 수 없다. 

다만 아는 것이라고는 나 자신조차 파악하지 못한 채 죽는다는 사실이다."(182쪽)


요코 여사가 만년에 쓴 에세이집이다. 그녀가 사십 대에 쓴 에세이집 『열심히 하지 않습니다.』도 재밌게 읽었던 터라 설렁설렁 가벼운 마음으로 읽으려고 샀다. 그때도 그랬지만, 설렁설렁 읽으면서 자주 멈춰섰다. 유쾌하고 씩씩한 기풍은 그대로이고 삶의 철학은 더 익었다. 아, 단순히 '더 익었다'는 말은 어폐가 있겠다. 고된 삶의 전선 한 가운데 있었던 사십 대의 그녀와는 달리, "예순여덟은 한가하다. 예순여덟은 찾는 이가 아무도 없다."(191쪽)고 말하는 그녀는 이제 훨씬 더 관조적이고 대담하다. 너무 잘 익어버린 홍시같은 철학을 보여 준다. 찾는 이가 없다고 해서 노년의 삶이 청춘보다 덜 고된 것은 아니다. 독거 노인으로 혼자 살며 치매에 걸린 아흔 살 넘은 어머니까지 요양소에 모시면서 유방암 판정과 수술을 받은 후에도 사유와 쓰기를 멈추지 않았던 사람. 사람들이 원하는 감동적인 인간극장류의 이야기를 하는데는 관심이 없던 사람. 인간의 하찮고 결함 많은 본성을 정직하게 드러내는데 탁월했던 예술가가 늙음, 죽음, 기억, 청춘, 도시와 세상, 변화, 몸, 감정,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작가 본인은 유쾌하고 씩씩한데, 읽는 나는 짠하고 서늘하다. 인생이 결국 그런 것이구나. 


"사람은 나고 자란 원점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벗어났다고 생각해도, 보이지 않는 물질이 몇 십년 전부터 몸에 밴 냄새처럼 주변으로 뭉개뭉개 퍼져나간다."(207-208쪽)

아아, 싫다. 연필을 실로 묶어 실끝을 한 점에 고정하고 원을 그릴 때, 마치 그 연필처럼, 아무리 힘껏 도망쳐도 결국엔 '나'라는 원점에 묶여 살 수 밖에 없는 인생이라니. 게다가 냄새처럼 뭉개뭉개 퍼져나가는 아우라라니! 으으, 싫다. 싫으면서도 공감한다. 공감이 간다는 사실이 더 싫다. 그나저나 나는 어째서 읽는 내내 나보다 두 배나 길게 산, 세대도 국적도 다른 일본인 할머니의 사색에 공감하는가. 휴대전화를 쓸 줄 모르는 그녀의 푸념조차도 공감의 재료가 된다. 

"나는 원리 따윈 모른 채 버튼을 누르는 방법만 외웠다.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지도 모르면서 쓴다. 기분이 언짢다. 원리를 알려고 들면 살 수가 없다."(156쪽)

사실 대부분이 이렇게 산다, 꼭 휴대전화가 아니더라도, 원리 따윈 모른 채,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지도 모른 채, 인생의 메뉴얼 따위는 있지도 않고, 원리를 알려고 들면 우울증에 걸린다. 대충 사는 인생이 더 편하다고 말하는 요코 씨지만 실은 원리도 모르고 살아야하는 삶에 언짢았을 것 같다. 그래서 더 삶의 자질구레하고 구린 모습에 눈길을 주었던 게 아닐까. 


"살아 있는 인간을 이렇게 가까이서 일일이 보고 있자니 정신이 이상해질 것 같다. 오랜만에 탄 전철에서 녹초가 되었다. 생판 모르는 남들을 투명 인간이라고 여기지 않는 한 전철 같은 건 탈 수가 없다."(156쪽)

맞다, 맞다.


"세상이 못마땅하다. 내가 모르는 장소에서 점점 못마땅하게 변하고 있다. 조그만 반딧불이 무수히 모여든 것 같은 불빛을 매달고 여기저기 서 있는 거대한 빌딩 속에서, 내가 모르는 세상이 움직이고 있다. 그것으로 나는 살아간다, 살아가긴 하지만 곤란하다."(151쪽)

그렇지, 곤란하다.  


"오빠, 이 세상에서 오빠를 기억하는 사람은 예순다섯 먹은 나 밖에 없어. 나 혼자뿐이야. 내가 죽으면 오빠를 추억할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남지 않게 돼. 하지만 대머리에 주름투성이인, 예순일곱 먹은 오빠 모습을 보지 않아도 되는 건 다행일지도 몰라. 

오빠, 오빠는 모르는 채 죽었지만 사는 것도 정말로 고단해. 차라리 죽고 싶을 정도로 힘든 적도 몇 번이나 있었는데 사는 동안은 죽을 수가 없어. 오빤 고작 감기 따위로 죽어버렸지만 요즘 세상이었다면 죽지 않았겠지. (……) 어릴 적부터 사람은 때가 되면 죽는다고 믿어왔지만, 요즘은 때가 되어도 죽지 않는 듯하다. 나는 점점 소신이라는 걸 가질 수가 없다."(63쪽)

11살에 죽어버린 오빠를 떠올리며, 이른 죽음보다도 늦은 죽음이 문제가 되는 사회를 살아가는 속내를 털어놓기도 한다. 그러면서 컴퓨터와 팩스도 제대로 다루지 못해 원고청탁에도 제대로 응수하지 못하는 자신을 보며 시대에 뒤쳐짐에 자조하기도 한다.

"이를 어쩌나.Y씨, 미안해요. 나는 시대에 뒤떨어지고 말았어요. 내다 버리세요. (……) 가마쿠라시대의 평균수명은 스물넷이었다고 한다. 부럽다."(145쪽)


그리고 살아서 견뎌온 칠십년 가까운 세월에 지친 기색을 숨기지 않는다. 항암치료 때문에 빠지는 머리카락이 귀찮아 머리를 밀어버린 날 어머니를 찾아간 에피소드는 그녀가 의도하지 않았어도, 뭉클했다. 

"점심 무렵이 지나서 엄마 요양원에 갔다. 민머리에 모자를 쓰고 갔다. 엄마는 쿨쿨 자고 있었다. 이제 내가 누군지도 모르는 것 같았다. 나도 피곤해서 엄마 침대로 파고들었다. 엄마는 내 민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여기에 남잔지 여잔지 모를 사람이 있네.'

'엄마 남편은 사노 리이치지?'

'아무것도 안 한 지 한참 됐어.' 아무것도라는 건 뭘까. 설마 엉큼한 그것일까? 하지만 아무 생각이 없는, 왠지 투명하게 느껴지는 엄마가 그런 소리를 하더라도 엉큼하게 들리지 않는다.

내가 큰 소리로 웃자 엄마도 소리 내어 웃었다.

'엄마, 인기 많았어?'

'그럭저럭.' 정말일까?

'나 예뻐?'

'넌 그걸로 충분해요.'

또다시 웃음이 터져버렸다. 

엄마도 따라 웃었다.

갑자기 엄마가 희미하게 중얼거렸다.

'여름은, 발견되길 기다릴 뿐이란다.'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엄마, 나 이제 지쳤어. 엄마도 아흔 해 살면서 지쳤지? 천국에 가고 싶어. 같이 갈까? 어디 있는 걸까, 천국은.'

'어머, 의외로 가까운 곳에 있다던데.'" (108-109쪽)


한참동안 책장을 넘기지 못하고 머물러 있었다. 

치매를 오래 앓으셨던 외할머니 생각이 났고, 그때가 아니라 지금 옆에 계신다면 나는 좀더 다른 이야기를 들려드릴 수 있을까 싶었다. 꼭 할머니가 "넌 그걸로 충분해요."라고 말해주신 것 같았고, 그래서 여름이 발견되기를, 의미도 모르면서 바라게 되었다. 



그리고 다시 설렁설렁 읽어나갔다, 나이 든 그녀와 그녀의 친구들과 친구들의 가족들과 이웃들의 소소한 이야기가 펼쳐지는 것을, 공감하면서, 재밌어하면서, 씁쓸해하면서, 초조해하면서. 

그런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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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분야의 대가라고 해서 토론에도 능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대가일 수록, 자신을 비롯해 수많은 영민한 동료들이 자신이 헌신해 온 분야의 상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문제들을 발견하고, 상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방법으로 해결하거나 혹은 실패하는 것을 오랫동안 경험해 왔으므로 최소한 어떤 문제가 해결 가능한지 아닌지에 대해서 만큼은 자신만의 철학이 공고해지게 마련인 듯 하다. 다만 그 철학이란 것이 자신의 전문분야에 한정된 이야기라는 데 대한 인식이 부족한 경우가 종종 있단 것이 흠이라면 흠이랄까.    


사피엔스의 미래는 "인류는 정말 진보하는가?"라는 질문을 두고 알랭 드 보통, 스티븐 핑커와 같은 스타 지성인들의 격돌로 화제가 된 2015년도 멍크 디베이트의 내용을 그대로 책으로 옮긴 것이다. 멍크 디베이트는 캐나다의 금광 재벌 피터 멍크가 세운 오리아 재단이 2008년부터 해마다 두 차례씩 열어온 국제 현안 및 공공 정책에 대한 세계 정상급 지식인들의 토론 대회이다. 금광으로 번 돈을 인류의 지적 진보를 위해 사회 환원하는 부자라니. 금광으로 벌었든 기업활동으로 벌었든 돈을 번 것은 어쨌거나 사회의 유무형의 자원과 용인과 도움이 없이는 불가능했다는 인식을 가진, 나아가 그 사회는 인류 구성원의 일부이므로 지구적 차원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인류의 지적 힘을 모으고 향상시키는데 일조하고자 하는 뜻을 가진 부자. 그리고 그런 부자들이 있는 사회. 부럽다.  


토론의 주제인 인류의 진보에 대해 "인류는 분명 진보해왔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라는 입장에 선 두 명의 토론자는 모두 과학자로, 실험심리학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인지 및 언어에 관한 저술로 유명한 심리학자 스티븐 핑커와, 동물학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과학, 환경, 경제 분야의 저널리스트로 활약 중인 매트 리들리다. 이들의 반대편에서 "인류는 분명 변화해 왔지만 진보해왔다고는 확신할 수 없으며 앞으로의 미래 역시 그러하다."라는 입장에 선 두 명의 토론자는 설명이 필요없는 작가 알랭 드 보통, 그리고 (나로서는 이 책 이전엔 알지 못했지만) 2005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에 선정되었던 영국 출신 저널리스트 말콤 글래드웰이다.


내용은 매우 간단하다. 인류의 진보를 긍정하는 두 과학자는, 주로 빈곤의 개선, 물질적 번영, 지식의 확산, 성 평등 개선, 전쟁 감소 등에 대한 통계자료를 바탕으로 '전반적으로' 인류는 발전해 왔다고 주장하며, 그 외에 우리가 걱정하는 핵무기나 기후변화와 같은 위협도 빠르게 발전하는 과학기술의 힘과 인류의 지혜로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는 입장을 편다. 한편 진보를 부정하는 두 인문학자는 '전반적'이고 '양적'인 통계자료가 보여 주는 것은 인류 번영의 진실이 아닌 표면적 현상에 불과하다며 '진보'를 논하기 위해서는 양적인 면뿐만 아니라 질적인 면도 함께 생각해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지금 인류 사회가 겪고 있는 어지러울 정도의 변화는 '진보'라기 보다는 말 그대로 '변화'에 가까운 것으로 본다. 알랭 드 보통의 경우, 인간은 근본적으로 어떤 상황에서든 완벽한 만족을 얻지 못하는 '결함 있는 호두(두뇌)'를 가졌으므로 외부 환경(빈곤, 교육, 평등 등)이 변화해도 변화한 환경에 적응해 또 다른 불안과 불만족을 가질 수 밖에 없다고 주장하며, 결국 어떤 형태의 발전도 인류에겐 '또 다른 변화'일 뿐 진정한 의미에서 '행복'에 다가가는 진보라고 볼 수는 없다는 흥미로운 주장을 편다. 그와 같은 편인 말콤 글래드웰은, 하나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꺼내든 방법이 또 다른 문제를 추가로 만들어내는 것은 아닌지를 기준으로 진보를 판단해야 한다는 주장을 편다. 예컨대, 통계상으로 전쟁의 빈도는 줄었지만 대신 전쟁의 형태 및 내용은 더욱 파멸적으로 변했고, 연결성의 증가는 민주주의의 확산과 자유의 증가를 가져왔지만 동시에 전염의 위험 역시 기하급수적으로 증가시켰다는 것이다. 


"저는 오히려 다음과 같은 질문들에 더 관심이 있습니다. '당신이 개인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어떤 진전이 있을 때 그것이 또 다른 문제를 추가로 만들어내는 것은 아닌가요? 새로운 문제들은 뭔가요? 새로 발생하는 문제들은 해결한 문제들보다 더 큰 문제인가요? 아니면 같은 가요, 더 작은가요?'"(본문 161쪽)


여기에 대해 진보론자들은 이렇게 반론한다. 


"낙관론은 자기실현적 예언입니다. 비관론도 마찬가지입니다. (중략) 진보는 우리 자신의 허약함과 핵무기 확산을 포함한 문제들을 보고 암울한 운명을 탄식하는 대신, 문제를 해결하는 데 창의력과 노력을 기울일 때 찾아올 결과입니다."(본문 139쪽)


이것이 전부다. 진보론자들은 인류의 문제해결능력(과학기술)을 믿는다. 반대론자들은 과학기술이 많은 문제를 해결하지만 동시에 같은 만큼의 위험을 내포할 수 있으며, 또한 양적인 지표로 환산할 수 없는 질적인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없으므로 과학만능주의를 경계하고 조금 더 겸손해질 필요가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양측의 주장은 어떤 상호 공감이나 이해에 기반한 건설적인 결론에 도달하지 못한다. 멍크 디베이트 자체가 주제에 대한 찬반양론을 대결시켜 토론 전후에 한 번씩 진행되는 유료 방청객의 현장 투표로 승부를 가리는 형식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제일 재밌는 구경은 불구경과 싸움구경이라 했던가. 해결책이나 상호이해에 도달하는 것이 목적이 아닌, 일종의 쇼비즈니스이므로 양팀은 복식 격투기 선수들처럼 잘 싸워주면 된다. 때문에 토론 참여자 모두가 상대방 진영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기 보다는 시작부터 끝까지 조소와 조롱으로 일관하며 자기네 입장만 늘어놓느라 바빴다. 이럴 바에는 분량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제1장(토론 기록)을 읽을 필요 없이 그 반밖에 안 되는 제2장(사회자와의 토론 전 1:1 개별 인터뷰)만 읽어도 되었을 뻔 했다. 


토론 참여자들이 때때로 이성을 잃으며 전투를 벌이는 와중에 진행자 러디어드 그리피스 (Rudyard Griffiths) 는 종종 상호비난으로 얼룩졌던 토론이 소득없는 언쟁으로 끝나지 않도록 중재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 발언자 자신도 깔끔하게 정리하지 못한 의견을 예리하게 핵심만 추려 내어 분석 정리하며 토론을 이끌어가는 힘이 놀라웠다. 덕분에 그에 대해 찾아보니, 주로 세계 경제, 지정학, 기업 의사결정 등 굵직한 문제들을 다루는 TV 해설자로, 또 인터뷰 및 토론 진행자로 캐나다에서는 매우 유명하며, 연방 선거 토론 때도 진행자로 참여할 만큼 토론 진행에 뼈가 굵은 전문가였다. 그의 진행을 보기 위해서라도 다른 토론 영상을 찾아보고 싶어졌다.


누구나 흥미를 가질만한 주제이고, 통찰력 있는 분석도 일부 볼 수 있었으나, 읽는 내내 불통의 드라마를 지켜보는 것은 상당히 답답했다. 양쪽편 모두 일리있는 주장인데 일부러 이쪽 아니면 저쪽으로 편을 들 수 밖에 없도록 구성한 토론은 나와는 맞지 않는 형식인 것 같다. 개인적인 수확이라면 러디어드 그리피스와 말콤 글래드웰을 알게 된 정도일까. 

마지막으로 알랭 드 보통의 재밌는 '결함 있는 호두' 이론을 인용하며 리뷰를 마치고자 한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사랑하는 이유를 알 것 같은, 지극히 그다운 통찰이다. 사피엔스의 미래를 성찰하기 위해 사피엔스의 부정할 수 없는 본성을 먼저 성찰하는 생각의 깊이가 좋다.


"혹자는 기계, 기술, 인터넷, 아이폰과 더불어 우리가 함께 힘을 모아 완벽할 정도로 지혜롭고 완벽할 정도로 친절한 불멸의 생명체를 만들어낼 거라고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마 그럴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사람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닙니다. 호모 사피엔스는 그것과는 다른 종입니다. (……) 우리 몸의 척수 맨 위에는, 제가 부르기 좋아하는 이름으로 '결함 있는 호두'가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이 호두 머리는 대단히 파괴적인 충동을 갖고 있을 뿐 아니라, 어떤 종류의 교육으로도 바로잡을 수가 없습니다. 많은 경우 도움을 주려고 해도 저항을 합니다. (……) 남을 용서하고 친절히 대하고 서로 공감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 근본적으로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결함이 있는 피조물입니다. 따라서 진정한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의 결함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습니다."(본문 48~5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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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백민석이 오랜 절필 끝에 돌아와 쓴 첫 미술 에세이다. 한겨레의 책 소개는 이러하다.


"<리플릿>은 백민석 작가가 수집한 리플릿을 펼쳐놓고 미술을 통해 세상을 들여다 본 책이다. 백 작가는 1995년 등단 이후 신선하고도 기괴한 문학의 새로운 경향을 이끌었던 소설가다. 그는 8년간 왕성하게 작품활동을 하던 때에도, 돌연 10년간 절필했던 기간에도 미술관을 다녔다. 책은 그가 복귀한 이후 2015년 3월부터 1년간 <한겨레>에 연재했던 ‘백민석의 리플릿’ 26편을 묶어낸 것이다." (한겨레/문화/책과 생각, 2017-01-19) 



내가 그의 소설을 처음 접한 건 무려 16년 전 『목화밭 엽기전』(문학동네, 2000)을 통해서였고, 그 경험은 충격이었다. 내용의 엽기성은 둘째 치고 몹시 낯설고 차가웠던 작가의 묘한 쿨함(혹은 냉정함) 때문이었는데, 그런 '긴박하고 쌈박 담백한' 글은 처음이었다. 그는 한국 소설가로서는 (당시에) 이례적으로 SF소설 『러셔』(문학동네, 2003)를 썼고, 나는 그 책을 못 해도 다섯 번은 족히 읽고 또 읽었던 것 같다. 그 외에 『장원의 심부름꾼 소년』(문학동네, 2001), 『16믿거나말거나박물지』(문학과지성사, 1997) 등 그의 초창기 작품들을 꽤 본 편이다. 그래서 확신컨대 백민석 작가는 잘 쓴다. '잘 쓴다' 에는 '잘 본다' 와 '잘 묘사한다' 가 필요한데, 잘 쓰는 소설가가 '잘 보는' 눈으로 본 미술 전시회 감상기이니 기대감이 높았다. 


그러나 너무 기대했던 탓인지, 책은 쉽지 않았고, 몇 부분은 끝까지 다 읽지 못했다. 중간에 집중이 자꾸 달아났다. 이유는 몇 가지 있으나, 우선 전시를 직접 가 보지 않은 사람이 글만 읽고 전시와 작가, 작품을 이해하기엔 설명이 다소 부족했다. 내용 중 많은 분량이 현대미술을 다루는데, 현대미술의 스펙트럼이 다양하기도 하거니와 대중들에게는 까다로운 감상 대상이어서 더 그러했던 듯. 도판이 부족한 것도 한 몫 했다. 아마 기사 연재분을 모아 책으로 엮은 것이라 그런 듯 하다. 이해를 도울 수 있는 살을 충분히 붙이는 편이 좋지 않았을까 싶어 약간 아쉽다.  


나는 운이 좋게도 1부 1장 <콘크리트 아틀라스>에서 다루어진 강영민의 <가위눌림>과, 1부 3장<고통은 아주 어두운 빛깔이다>에서 다루어진 케테 콜비츠를 관람했었다. 그래서 관련 내용을 읽을 때는 전시장에서 느꼈던 개인적 감상과 작가의 감상을 비교할 수 있어서 "아, 소설가의 미술 읽기란 이런 것이구나." 하고 감탄했었다. 


<가위눌림>의 작가 강영민은 “불평등에 분노하지 않는 나의 아들은 엘리트로 성장할 것이다”라고 선언한다. 백민석 제공

  강영민 <가위눌림-자본주의적 건설과 파괴의 딜레마>,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2015 

(출처: 한겨레에 연재되었던 백민석의 리플릿 원문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683122.html) 


예컨대, 강영민의 <가위눌림-자본주의적 건설과 파괴의 딜레마>는 방 하나를 가득 채울 만큼의 대형 설치작품으로, 작품의 삼면을 돌아가면서 보면 "불평등에 분노하지 않는 나의 아들은 엘리트로 성장할 것이다.", "조기 교육은 인류를 진보시킬 것이다.", "글로벌화는 우리의 운명이며 후퇴는 없다.", "대출의 노예로 사는 것이 나의 선택이다.", "오락산업은 사회적 강박으로부터" 등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무한경쟁 구조속에서 성공신화의 캐치프레이즈에 세뇌되어 노예의 위치를 획득한 대중의 처지를 노골적으로 보여주는 표현들을 여기 저기서 발견할 수 있다. '가위눌림'이란 의식이 있으면서도 신체를 움직일 수 있는 상태를 일컬으니, 알면서도 꼼짝없이 사회 구조의 희생양이 되고 있는 개인의 처지를 비유한 것일 게다. 나의 '보기'는 여기까지였고, 백민석의 '보기'는 아래와 같이 나아갔다. 


"작가 강영민은 자기 작품 앞에 선 관람자에게 대놓고 '불평등에 분노하지 않는 나의 아들은 엘리트로 성장할 것이다'라며 엄숙하게 선언한다. 이 간명한 문장에 관람자가 읽기 쉽게 몇 단어를 채워 넣으면 '불평등에 분노하지 않는 (처세를 지닌) 나의 아들은 (체제 순응적인) 엘리트로 성장할 것이다'가 된다. 

하지만 읽어보니 아직 몇 단어는 더 들어갈 틈이 있다. '체제 순응적인' 앞에는 '이 사회가 바라는'이 들어갈 수 있겠고, '불평등' 앞에서는 '정치적'이라는 수식이 어울릴 것이다. 만약 '정치적'이 모호하게 느껴진다면 '정의의 원칙에 반하는'이라고 한마디 더 덧붙일 수 있다.

만일 한나 아렌트의 『전체주의의 기원』 을 읽었다면 '불평등'이라는 단어 아래 이렇게 메모를 달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평등하게 태어나지 않았다. 우리는 상호 간에 동등한 권리를 보장하겠다는 우리의 결정에 따라 한 집단의 구성원으로서 평등하게 되는 것이다.'"(p.22)


과연 소설가다운 해석이다. 그는 작품의 규모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관람자는 결코 그 전체의 규모를 한 눈에 파악할 수 없다. 우리가 지난밤 악몽의 전모를 결코 알 수 없는 것처럼, 가위들의 집합 혹은 전체 구조가 또 하나의 가위로 작동하는 것이다."(p.23)


작품을 관람할 때 왜 굳이 이런 구조와 크기로 설치했나 내심 궁금해 했었으나 그것으로 끝이었던 나로서는 생각지도 못한 깊숙한 해석이다. 그가 시간을 들여 충분히 꼼꼼히 여러 번 감상하고 느끼고 참고자료를 찾고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고 의미를 재구성 한 것을 읽고 있으면 감탄이 절로 나온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정도의 이해와 공감은 내가 알고 있는 전시 혹은 작가에 한해서만 가능했다. 나머지 내용을 제대로 이해 못한 것은 미술과 미술사에 대한 나의 부족함 탓이 크다! 다시 말하면, 독자의 입장에서 모르는 작가와 작품을 이 책을 통해 곧바로 알게 되고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배경지식을 따로 공부하지 않으면 백민석 작가 특유의 간결하고 밀도 높은 문장으로 압축적으로 설명한 내용을 따라가기 어렵다. 각각의 전시에 대한 이해에 중점을 두지 않고 각 전시에서 작가가 읽어 낸 '주제의식'에 방점을 두고 읽는다면 괜찮다. 그는 미술사와 역사, 사회학, 철학, 문학 등을 아우르는 방대한 인문학적 배경지식으로 무장한 훌륭한 가이드이다. 



참고로, 이 책을 읽는데 혹은 현대미술을 조금 쉽게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다른 책들을 추천해 본다. 



우선은 박상미의 『나의 사적인 도시』이다. 큐레이터이자 갤러리운영자이자 작가이자 번역가인 저자가 뉴욕에 거주하며 블로그에 올렸던 뉴욕과 현대미술에 관한 에세이집이다. 뉴욕이라는 세계 문화예술 트렌드의 중심지에서 미술 뿐만 패션, 음악, 문학에 이르기까지 (주로 현대)예술 전반을 아우르는 폭넓은 감상과 소개를 내용으로 한다. 통찰력이 있으면서도 독자에게 친숙하고 편안한 문체로 전달해 읽기에 부담이 없다. 혹시 『리플릿』을 읽고 어렵고 아쉽게 느껴진다면 이런 스타일의 책을 시도해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리뷰를 쓴 적이 있기에 링크를 건다(http://blog.aladin.co.kr/chocopresso/9269189)





서양미술사 개론서의 고전인 에른스트 H.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는 아주 전형적인 입문서에 해당할 것인데 분량이 만만치 않고 전체 미술사를 다루므로 읽기 전부터 질려버릴지도 모르겠다. 이 책은 아직 읽지 않아서 개인적 평가는 못 내리겠지만 리뷰들이 이구동성으로 매우 훌륭하다는 평이다. 이 책보다 더 추천하고픈 책은 윌 곰퍼츠 Will Gompertz 의 『What Are You Looking At?』인데, 국내에는 『발칙한 현대미술사』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나왔다. 저자는 7년간 영국의 Tate 갤러리에서 디렉터로 활동하다 현재 BBC 에서 arts editor 로 일하면 예술과 관련된 프로그램을 만드는 일을 하고 있다. 예전에 번역본이 있는 줄 모르고 원서를 샀었는데 발견한 김에 번역본도 사야겠다.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가 전체 윤곽을 잡아준다면, 이 책은 현대미술을 각론으로 볼 수 있는 책이다. 저자는 서문에서 "내 야심은 사실에 기반한 현장감 있는 책을 쓰는 것이었다. 학술적인 의도는 아니다. My ambition has been to write a fact-filled and lively book; it is not intended as an academic work." 라고 밝히는데, 그 동력은 Tate 미술관에서 디렉터로 일하면서 세계 유수의 갤러리와 박물관을 여행하고, 일반인들에게는 덜 알려진 개인 소장품들을 접하고, 예술가들을 직접 방문하고, 수백만 달러가 오가는 현대미술 경매를 지켜보면서 쌓은 경험이라고 말한다. 거기에 더해 BBC에서 아트에디터로 일하면서 대중과 예술의 교점에 대해 쌓은 철학이 또한 이 책을 쓰는 동력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마지막으로, 안규철 작가의 사물에 관한 에세이집 『그 남자의 가방』을 추천한다. 안규철 작가는 주로 깊이 있는 철학적 사유를 매우 정제된 형태의 사물 혹은 건축적 구조로 표현하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추천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 사물에 대한 탁월한 성찰의 모음으로써 그 자체로 완결성 있는 책이기도 하고, 또 이 책을 통해 다양한 표현형식과 해석의 자유를 갖는 현대예술에 있어 작가의 사유의 방식 그리고 그것을 작품으로 표현해 나가는 과정을 엿볼 수 있는 좋은 샘플이기 때문이다. 언젠가 따로 짧게 리뷰를 쓸 수 있으면 좋겠지만, 간단히 예를 들자면, <서랍>에 대한 사유는 다음과 같은 식이다. 


"사소하고 무해한 것으로부터 엄청난 결과를 동반하는 정치적 결정에 이르는 <일>들, 세계에 대한 온갖 판단과 개입과 변형은 누군가의 책상 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서랍은 그 밑에 들어 있다. 그 위치가 이미 말해주듯이 그것은 책상과는 반대로 어둠에 관계된다. 어둠은 서랍의 본성이다. 어린 시절에 한동안 나는 빛 대신에 어둠이 나오는 전등은 왜 없는 것인지 궁금해했던 적이 있었는데, 서랍이야말로 바로 그런 네거티브한 등불이다. 서랍을 포함하여 모든 상자는 만들어진 어둠이며, 잘게 분할된 인공적인 밤이라 할 수 있다. (……) 서랍이 스르륵 닫히는 순간 그것은 우리의 시야에서 일시에 사라진다. 우리가 이 일에 너무 익숙해 있어서 그럴 뿐이지 이 사라짐은 감탄할 만한 마술적인 사건이다. (……) 서랍은 우리가 넘겨주는 사물을 우리 시야 밖으로 데리고 가서 자신이 갖고 있는 어둠 속에서 잠을 재운다. 서랍을 다시 열기 전에는 그 잠든 사물을 깨울 수 없고 다른 상태로 변화시킬 수 없다. 세계를 변화시키는 우리들의 <일>은 서랍이 닫히면서 유보된다. (……) 모든 상자는 단절된 두 개의 시점 사이를 이어주는 다리이며 타임머신인 것이다"(p.120)


미술작품을 좋아하지만 현대미술은 해설이 없으면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기가 거의 불가능한, 뭔가 답을 예상하고도 이게 맞나 싶고 괜히 틀린 것 같고 왠지 다른 정답이 있을 것만 같은 어려운 시험문제와 같이 느껴져서 제대로 즐기고 있는 건지 매번 확신할 수가 없었다. 미술관에 가는 일이 놀랍고 즐거운 경험이 아닌 불가해하고 불편한 일이 되기 일쑤였는데 이 책을 읽은 후 한 예술가의 작업 방식을 들여다 봄으로써 오늘날 미술이 행해지고 존재하는 과정을 좀더 이해할 수 있게 되었었기에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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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믿어선 안 될 것은


삶을 부정하는 인간의 나 자살할 거야, 란 떠벌림이다. 그런 인간이 가야 할 길은 알콜릭 정도가 적당하다. 삶을 인정하지 않고선 실제로 자살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뭐랄까. 결혼을 한 인간만이 이혼을 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닐 수 없다. (중략) 물론 이것은 험담이 아니다. 그들은 그저


살아갈 수 있는 인간들이다, 라는 얘기다." 

(박민규, <아침의 문>, 2010년 이상문학상 작품집, 문학사상, 2010, p.16)


오랜만에 박민규의 <아침의 문>이 생각나서 재독하다가 문득 나는 "살아갈 수 있는" 쪽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세상에는 

"살아갈 수 없는" 자들도 있다. 안심하기도, 아니기도 했다. 아직 살아갈 수 있으므로 나는 삶을 인정하지 않은 것 같았다. 


삶은, 


수면제를 한 사발 먹고도 자살에 실패한 자의 끊임없는 구토같고, 

극심한 구토의 끝에 따라 나올 것만 같은 내장처럼 징그럽고,  

어떤 우아함이나 예의와도 어울릴 수 없으며, 

서로를 괴물이라 부르기엔 너무 적나라하므로 예의상 만들어낸 인간이란 단어처럼 기만으로 가득 찬데다,

제 아이를 벤 여자의 아랫배를 칼로 누르며 여기서 지워줄까 하고 속삭이는 남자처럼 폭력적인데, 

아무에게도 아무 것도 말할 수 없이 아무도 없는 상가 건물 옥상에서 혼자 엎지르듯 아이를 낳고 도망치는 여자처럼 미련하기까지 하나, 

싸늘한 콘크리트 바닥에서 탯줄을 몸에 감고 우는 버려진 아이처럼, 

누군가 안아들고 달래줄 수 밖에 없는, 

그러나 그 이상은 누구도 어떤 것도 해 줄 수 없는,

그런 것이다. 


라고 박민규는 말한다. 그런 것임을 인정해야 그것을 떠날 수 있다 한다. 아니, 그런 것임을 인정해 버리면 살아갈 수가 있나?



아이를 잉태시킨 애인에게 구타를 당하고, 임신을 들키지 않으려고 배에 압박붕대를 두르고 계산대를 지켜야 하는 만삭의 알바생처럼, 누구나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생각지도 못한 사람으로부터 삶의 민낯을 잠시 보게 되는 경우가 있다. 저들의 경험처럼 최악은 아닐지라도 인간의 지리멸렬함을 맛보기엔 충분한 경험. 그것은 "오랜 시간 부패한 온갖 욕들이"(p.31) 끊임없이 솟구치도록 몸서리쳐지는 것이다. 그래서 죽다 만 인간이 비스킷과 우유를 먹고 토할 때, 미련하고 불쌍한 미혼모가 난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어 하고 울부짖을 때, 어떻게든 죽어보고자 다시 자살을 시도할 때, 누구의 축복도 받지 못한 채 단지 실수로 만들어진 생명이 태어날 때, 편안히 책 읽던 자세는 흐트러지고, 책장을 넘기던 손은 나도 모르게 입을 가린다. 


박민규는 삶의 더러운 맨살을 그 땀구멍과, 닭살 위로 돋은 시커먼 털과, 흉터와, 피가 덜 마른 상처와, 때까지 그려내는 작가다. 원래 이런 거야 그러니 어쩌겠어 당신도 별 수 없어 받아들여 하고 들이민다. 보통은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이나 <딜도가 우리 가정을 지켜줬어요>처럼 유머를 통해 감동으로 승화시키는데 탁월하지만, 일단 무겁게 쓰려고 마음 먹으면 단편이든 장편이든 거대한 중력의 블랙홀을 만든다. 몇 번을 다시 읽어도 똑같은 힘으로 빨려들어간다. 울 수도 없을 만큼 마음이 무거워진다. 대단한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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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문 작가가 9 만에 내놓은 소설집 『오리무중에 이르다』 는 죽고 싶지 않으나 살아야 이유를 하나도 발견하지 못하는 괴로움에 대하여 편의 소설 모음이다. “ 세계에 반드시 일어나야 같은 것은 없었다.” 출판사의 소개 문구만 보고 덜컥 샀는데, 묘한 기시감에 저자 검색을 보니 2014년도에 백다흠, 백가흠 형제가 기사가 뜬다(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405091932085&code=960100). 오랫동안 알코올 중독과 우울증으로 고생한 하다. 우울의 손아귀에 목덜미를 잡혀 빠져나오지 못한 사람의 앞뒤 없는 중얼거림 같은 느낌. 기시감은 거기에서 오는 것이었고, 그래서 책의 리뷰를 쓰는 것은 내게는 특히 어렵다


개인이 자신의 삶에서 떨어져 나갈 , 너무 멀리 버려 마침내 나의 구체성을 잃고 인간의 으로 추상화되어 버릴 삶이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지” (p.100), “어디를 펼쳐도 막다른 골목 같은 것들이 연속해서 나오” (p.100),  “그리고 모든 것이 너무도 진부”(p.100) 진다. “모든 생각과 감정과 행위와 동작 들이 너무도 오래도록, 수십만 혹은 수백만 반복된 것들이었고, 모든 것들이 낡을 대로 낡은 유물들처럼”(p.100) 여겨져 이상 끝이 없는 무의미한 반복() 참여하고 싶지 않은 욕구, 허무를 끝내고 싶은 욕구로 이어지는 우울에 떨어지는 것이다.

 

책에는 편의 서로 다른 소설이 실렸지만 사실 이러한 구분이 무의미하다. 심지어 하나의 안에서도 서사는 이어지지 않고, 주인공의 정체는 오리무중이다. 배경도, 사건도 일치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애당초 글들을 소설이라 불러야 할지도 의문스럽다. 그에게 소설 쓰기는 이제 일기를 쓰는 것과 몹시 유사한 같다. 비판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어떤 이야기도 작가가 이해할 없는 것을 글로 수는 없으므로 모든 글에는 어떤 면에서든 작가 자신의 이야기가 반영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소설집은 작가의 배경을 알고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매우 자전적이라고 생각하게 만들 만큼 알코올중독과 우울과 그에 따른 여러 증상의 묘사가 생생하다. 생각은 시종일관 맥락 없고 부조리하게 전개되는데, 적어도 소설 쓰기에 대한 작가의 의도만큼은 정확하게 전달된 같다.


자신으로 말할 같으면 갈수록 소설을 쓰는 거의 불가능하게 여겨졌는데 이제는 거의 소설이 써질 없게 구상하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플롯이나 서사나 배경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인물조차 등장하지 않는, 등장한다 해도 인물이 아무것도 생각이 없어 아무것도 하지 않고, 계속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끝내 아무것도 하지 않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그래서 소설 속에서 펼쳐지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소설만을 반복적으로 생각하고 있었고, 그러니 소설이 써질 리가 없었는데, 인물뿐만 아니라 사물조차도, 아무것도 등장시키고 싶지 않았다.”(p.73)


요컨대, 그는 아무 것도 없다는 생각에 빠져 있었고, 실제로 아무 것도 없었고, 아무 것도 없는 <어떤 불능 상태> 빠져 무엇을 써야 할지 이상 없게 되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머릿속에서 끊이질 않는 생각의 잡음을 어떤 형태로든 - 맥락이나 형태나 조리에 상관없이- 토해낼 밖에 없었던 같다


언젠가 이후로, 아무런 맥락도 없는, 아무 얘기도 하지 않은 것이나 마찬가지인 얘기를 하는, 그래서 아무것도 말하는 것이 없는 것에 대해 말하는, 그래서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해 말하는, 그래서 사실 무엇에 대해서도 할말이 없다는 것을 말하는, 그래서 어쩌면 말하기의 끝에 대해 말하는, 그리고 모든 것들에 대해 말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 거의 필사적으로 말하는, 정말로 아무것도 아닌 이런 글들을 쓰며, 삶을 허비하는 삶을 바치는, 그럼에도 다른 삶은 꿈조차 수도 없는, 그럼에도 다른 삶은 꿈꾸고 싶지 않은, 남은 삶은 남은 삶을 허비하는 마저 바칠 것이 분명한 이상한 삶을 살고 있었지만 그런 것쯤은 아무런 상관도 없다고 생각했다.”(pp.99~100)


나로서는 ( 소설이 매우 자전적이라는 가정 하에) 그가 글들을 쓰지 않았다면 심한 우울의 상태로, 어쩌면 삶을 마무리하는 형태이거나 혹은 이상 예전과 동일한 사람이라곤 없는 폐인으로 전락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을까 싶다. 토해내는 행위는 그것이 어떤 형태이든 우리의 시한부 인생을 조금 연장하는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안타깝지만 이제 그에게 인생은 향이 날아가 이상 맛을 느낄 수도 없게 되어버린 오래 차와 같은 것이다.


지금 마시고 있는 차라는 생각을 정신을 가다듬고 단단히 하지 않으면 차라는 것도 모를 만한 맛이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이 차라는 믿음을 잃지 않는 필요한 같았고, 믿음을 잃는 순간 차는 차가 아닌 같았다. 하지만 다시 모금을 마시고 나자 믿음 또한 사라져버렸다. 차이지만 차가 아닌 것을 마시고 있는 같았다.”(pp.67~68)


지금 살고 있는 인생이라는 생각을 마음 단단히 먹고 되새기지 않으면 살아있다는 사실도 모를 만큼 무미건조하고, 이것이 삶이라는 믿음을 잃지 않는 필요한 같고, 믿음을 잃는 순간 삶이 아니게 같은 절박함. 모든 것을 알면서도 막상 하루를 살다 보면 숨쉬지만 살아 있지 않은 듯한 허무. 삶에 대한 같은 시각은 ( 것으로든, 죽은 것으로든) ‘존재함 Being’ 대한 관찰로 이어진다.


삶은 밤의 껍데기를 벗기고 보니 일곱 일곱 속에 열한 마리 벌레가 들어 있었다. (……) 구멍 속에 죽어 있는 (……) 벌레들을 가까이서 보고 있자 아주 친근하게 느껴졌다. (……) 밤벌레들은 보란듯이 죽어 있었다. 죽어 있는 모든 것은 어떤 점에서는 보란듯이 죽어 있는 것으로 볼 수도 있었다. 그렇게 말고 달리 있기는 어려우니까. 아니, 보이는 모든 것이 어떤 점에서는 보란듯이 있었다. 그와 동시에 대체로 사물들을 아무렇지 않게 혹은 아무렇지 않은 모습으로 있었고, 죽어 사물이 된 사체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물론 무심한 것 같은 사물들이 무정하거나 무참하거나, 암담하거나 참담하게 보이는 순간들이, 평소 감추고 있던 무정함과 무참함과, 암담함과 참담함을 드러내는 것 같은 순간들이 있었다.”(pp.226~227)


아무렇지 않게 보란듯이 존재하는 타인들. 사람들. 죽은 사람들. 사물들. 나만 빼고 아무렇지 않게 보란듯이 존재하는 세상. 어쩜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보란듯이 수백만 되풀이되어 진부한 삶을 계속할 있나 하는 의문을 가지면서도, 동시에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존재의 틈새에서 암담하고 무참한 생의 본질을 포착할 만큼 예리한 정신이 그를 괴롭힌다. 때문에 밤이나 낮이나 잠들지 못하는 불면의 저주에 시달려, 몽롱한 비현실감 속에서, 깨어 있는 것도 잠든 것도 아닌 24시간을 보내야만 하는 우울의 감옥에서 쓰여진 같다.


하루종일 낮도 밤도 아냐, 낮도 밤도 눈도 감은 눈도 아닌 눈으로 보내고 있으니, 눈도 감은 눈도 아닌 눈이 보기엔 밤도 낮도 밤도 아니야, 하고 생각했다.”(p.101)


무의식과 의식의 중간에 붙들려 어디에도 기댈 없는 ()의식 상태에서 스스로에 대한 통제를 잃고 신경을 태우는 듯한 생각의 속도대로 받아 적은 듯한 느낌이다. 불안이나 존재의 위화감, 생의 무의미나 허무의 감정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라면 당황스럽거나 매우 흥미롭거나 하나일 같다. 우울을 모르는 사람에게 이것은 실험적인 글쓰기이고, 아는 사람에게는 죽고 싶으나 죽고 싶지 않다는 울음이다. 자기 존재의 정당성을 인정할 없게 사람의 살고 싶다는 외침. 그래서 공감하고, 때문에 꼼꼼하게 읽어나가는 것이 힘이 든다. 어쩌면 쓸데없이 깊게 읽는 건지도 모른다. 작가가 의도치도 않은, 없는 의미를 읽어내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주인공의 밑도 끝도 없는 주절거림은 비슷한 고통 속에서 어쩔 줄을 몰랐던 과거의 어느 시점을 회상하게 경험으로부터 텍스트를 읽게 만든다.  

 

번째 <개의 >에서 화자는 어린 강아지를 무릎에 올려 놓고 이유 없이 귀를 접었다 펴는 행위를 반복한다.


나는 도리 없이 계속해서 강아지의 귀를 접었다 폈다 수밖에 없었는데, 이제 강아지는 약간 겁을 먹은 같았고, 자신에게 가해지는 일이, 어쩌면 강아지로서도 처음 경험하는 일이 언제 끝날지 없다는 사실에 강아지가 겁을 먹은 것은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었지만, 표정은 겁을 먹은 것만도 아닌 같았고, 어느 쪽이냐 하면 모르겠다는 것에 가까웠다.”(p.15)


한편으로 나는 강아지가 느낌이다. 누군가 귀를 계속 접었다 폈다 하는데 의중도 언제 끝날지도 없는 느낌. 힘겨움과 함께, 저에게 당신의 기나긴 우울과 광기에 대한 지나치게 솔직하며 대중없는 독백을 읽게 만드시는지요 하고 묻고 싶은 기분에 휩싸인다. 아마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아래의 인용이 아닐까 싶다.


어떤 불능 상태에 이르러 무의미한 글쓰기를 반복하는 것이 사실상 있는 것의 전부가 되었을 기대할 있는 것은, 무의미한 글쓰기를 반복하는 또한 가능하지 않은, 완전한 불능 상태에 이르는 인지도 몰랐다. 생각들이 반복되었다. 어떤 반복이 원하는 것은 어떤 상태 자체이므로.”(p.265)


확실히 독특하다. 소설의 주인공이 저자 본인이든 아니든, 적어도 그가 완전한 불능상태에 이르지 않기를 바란다. 아무렇지 않게는 아닐지라도, 이렇게 아니게 달리 존재하기는 어려우니 이렇게 라도 괜찮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면 좋겠다. 오래 되어 본래 무슨 차였는지조차 알기 힘들 만큼 무향무미해 차일지라도 차는 차라는 믿음을 잃지 않으면 좋겠다. 그래서 조금 더 부조리하고, 더 맥락 없고, 더 자신 있게 오리무중이면서도 여전히 예리한 글로, 더 흥미롭게 독자를 매혹해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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