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형수 042 2
코테가와 유아 지음 / 세주문화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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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확 당기더란 말이다. 원래가 젊은 청춘은 이런 충동적인 것을 견딜 수 없기 때문에, 당기면 봐야 하고 마음에 들면 내 책장에 고이 모셔야 직성이 풀리는 법이다.

사형수042는, 그야말로 사형수다. 본명은 타지마 료헤이. 이런 저런 눈물 나는 사정으로 7명의 사람을 죽인 후, 장기 복역하다가 얼마 후면 사형을 당하게 될 사람이다. 아니, 그럴 예정 이었다. 머릿속에 칩을 박아 분노를 억제할 수 밖에 없도록 하는(억제 하지 않으면 그야말로 죽음이다. 머리가 터져버리기 때문이다)그 실험에, 료헤이가 뽑혀나가기 전까지는 말이다. 이야기는, 료헤이가 이 실험의 실험체가 되면서 시작한다. 사회의 축소판이라고 할만한 학교에서 여러 잡일을 하면서 격게되는 일들은 그로하여금 대단한 분노를 느끼게 하고, 그리고 그렇게 느끼는 분노보다 더 큰 감동과 인간애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자신에게 아무런 저항없이 다가오는 학생, 시각 장애자인 유메를 만나서 친구를 얻게 되고, 실험의 담당자라 할 수 있는 시이나 박사와도 점점 '실험자'와 '피실험자'를 떠난 그 무엇이 되기 시작한다. 이 시이나 박사라는 인물은, 굉장히 차가운 듯 하면서도 때로는 굉장히 감정적이고, 자유분방하면서도 무책임한 면도 있다. 료헤이와 술을 마시며, 감시당하는 오디오를 생각해 '커피나 마셔, 커피나!' 라고 하질 않나, 술취한 다음날에는 '커피를 과하게 마셔서 그렇습니다' 라고 한다. 유메와는 또 다른 의미로, 료헤이의 좋은 친구라고 할 수 있다.

사형수를 다루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생명의 존귀함에 대해 다룬다는 말이 된다. 게다가, 인간 본연의 분노가 그들에게는 곧 죽음으로 직결되기 때문에 상황은 수없이 많은 위험과 직면하게 된다. 잔잔한 이야기지만 무거운 주제를 잊지 않았고, 그렇지만 어둡지 않아서 좋다. 지극히 일본적인 스타일 같지만, 이야기 하고있는 것들이 워낙 일반적인 것들이라서 저항감은 없다. 추천할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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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대생은 바보가 되었는가 - 지적 망국론 + 현대 교양론
다치바나 다카시 지음, 이정환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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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학을 공부하는 학생으로서, 처음에는 단순히 텍스트이기 때문에 읽었다. 다카시라는, 초유의 독서광에 의해 쓰여진 책인데, 얼마전에 읽었던 국내 도서 <서울대가 없어야 나라가 산다>라는 책과 비슷햇다. 다만, 이 책이 서울대를 중심으로 하는 학벌 중심 사회에 대한 비판이라면, 다카시의 <도쿄대생은 바보가 되었는가>에서는 도쿄대를 중심으로 일본의 교육제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다카시 말에 따라 결론을 내리면 도쿄대 생은 바보가 되었다. 그들이 잘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암기 뿐이다. 인터넷 사회에서는 더 이상 큰 득이 되지 못할 재주를 가지고, 그들은 일본 최고의 인재라는 대단한 명예를 쥐었다. 우리가 흔히 도쿄대생이라는 이름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이미지(대장성 관료 같은 것들. 우리로 치면 서울대생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이미지가 될 것이다)에 대한 것들을, 그의 그 방대한 자료에서 찾아낸 따끈한 그래프와 표로 정리하여 보여주고 있다. 몇명의, 몇퍼센트의 사람들이 고관대작이 되고 대기업의 간부가 되는지를 말이다.(그의 다른 책 <나는 이런 책을 읽어왔다>를 보면, 그의 그 놀라운 서재를 알 수 있다)

그들은 찾잔으로, 모두 같은 모양에 같은 내용물을 같은 양만큼 담고 있다. 그들은 자신의 분야에서는 그 대단한 암기력으로 스폐셜리스트가 될지는 몰라도, 전공 분야를 한 발자국만 벗어나면 다시 바보가 되어 버린다. 그나마도, 의대를 지망하는 학생이 생물을 공부 하지 않는 등의 말도 안돼는 기초 학력 저하로, 그 대단한 도쿄대가 신입 재학생을 놓고 교수들이 과외를 한다는 믿지 못할 이야기다.

다카시가 가장 열을 올리며 이야기 하는 부분은, 교양에 대한 이야기다. 입시제도가 변하면서, 학생들은 좀처럼 깊지도, 넓지도 못한 교양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사실, 다카시의 어조를 몸으로 느낀다면, '과연 그것도 교양이라고 지니고 있는가'라는 말을 내뱉는 기분이다. 굉장히 차갑고 또 날카롭다. 그들이 치르는 입시가, 폭넓은 사고를 가진 사람이 여러가지 정보와 자료를 찾아 답을 적는 시험과는 거리가 먼 것 또한 비판의 대상이다. 무조건 외워서 통과하고, 그 시험을 높은 점수로 통과한 사람에게 대학 입학의 자격을, 그것도 명문대라고 첫손에 꼽히는 도쿄대의 입학 자격을 주는 것을 그는 용납하지 않으려 한다.

하지만 진짜는 앞에서도 말한 교양에 대한 문제다. 그는 문과대학에서는 스폐셜리스트인 사람이, 이공계로 오면 중학생의 수준도 못되는 현실을 한탄하고 있다. 이공계 학생에게 '셰익스피어를 읽었는가'라는 한심한 질문을 해야 하는 것에 질려 하고 있다. 이 부분은 나를 굉장히 고무시켰다. 인문사회계열의 공부를 하고 있다는 이유로, 나 역시 열역학이라든지 푸코의 원리 따위는 전혀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주재에, 이과대학에 다니는 친구(물론 열역학과 푸코의 원리를 아는 친구)가 백년의 고독도 읽지 않았고, 사무엘 베케트도 모른다는 사실에는 말도 안된다며 소리를 쳤었다. 다카시가 말하는 '제너럴리스트'와는 너무나 동떨어져 있는 것이다.

결국, 전공 분야에서는 스폐셜리스트가 되는 것이 당연하고, 전공하지 않는 것에서도 제법 심도있는 스키마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변화하는 시대가 원하는 사람이라는 건데, 말은 족족이 다 맞지만 그것은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라는 데에 문제가 있다. '현실적으로는 절대 무리야'라는 말을 하면서도, 자꾸만 부끄러워지는 것은, 분명 찔리는 곳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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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가 없어야 나라가 산다 - 학벌주의의 뿌리를 찾아서
김동훈 지음 / 더북(The Book)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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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행실은 방자하기 그지 없으나, 그래도 일단은 교육학을 공부하는 학생인지라 이런 책들을 접할 기회가 많다. 개인적인 관심도 물론이지만, 학과에서 주어지는 텍스트로도 많이 쓰이기 때문이다. 책에 대한 감상을 축약하고 시작한다면, 책에 쓰인 말은 모두가 골백번 옳은 말이지만 나처럼 줏대 없는 사람에게는 그야말로 독인 이야기다. 서울대가 가지고 있는 숫한 폐단과 함께 어느새 그 금자탑을 우러르게 되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나라의 대학은 교육부라는 관공서에서 거의 모두 쓸다시피 하여 주관하고 있다. 대학 뿐만 아니라 사립 초, 중, 고도 마찬가지다. 이런 형태의 교육은 선진국이라는 구라파에 비교하면 굉장히 이상한 것이긴 하다. 우리나라 교육계는 교육부를 마치 왕처럼 모시는 구조가 되었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군림하는 행정부, 그 행정부의 한 부서일 뿐인 교육부가 우리의 대학교육을 비롯한 모든 교육을 총괄한다는 것이 못마땅했는지, 어느날 부터 그 '왕좌'에 반역을 꾀하는 '반동분자'가 나타났다. 사람들은 그 존재를 일컬어 '최고 명문 서울대'라고 했다. 국가에서 쑥쑥 키워주고, 졸업한 동문들이 온갖 양분을 쏟아부어 우량의 우량으로 키워낸 대학이다. 대한민국의 모든 대학을 지배하는 듯한 곳이기 때문에 사실은 '서울대'가 아니라 '한국대'같은 이름이어야 하지만,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은 '서울공화국'의 애칭이기 때문에 별 수 없다.

책은, 처음부터 서울대에 대한 불편한 마음을 유감없이 서술한다. 일반인이 그저 우러르기만 했던 서울대가, 사실은 우러를 수 밖에 없는 것임을 담담히 말한다. 다만, 그동안 일반인들이 우러렀던 서울대의 특징(그러니까 예를 들면 최고 수재들만 모여서 아주 높은 수준의 연구를 한다는 등) 을 말함이 아니라, 예산의 절반을 쓸어가고, 대기업에서는 너도 나도 돈을 부어 투자해 주려고 하고, 졸업 동문들이 낸 모금액이 단대 별로 몇백억에서 몇천억에 이른다든지 하는 것들을 말한다. 이 부분은, 우러르게 만들었다 놀라게 하고, 결국은 화나게 한다.

쉽게 말해, 과잉투자를 하고 있는 거다. 서울대에 투자할 가치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서울대도 교육부 산하의 국립대 중의 하나라는 것은 엄연한 사실인데 그런 것을 무시하는 처사라는 것이다. 이런 사실이 그 높은 프라이드를 상처낸 것인지, 서울대는 특별법을 제정하려 했었다는 것도 자세히 나와있다. 서울대를 나와서 고시에 합격하면, 결혼정보회사에서 만드는 기준에서는 3,40억을 먹고 들어간다는 이야기를 할 때는, 정말로 한숨이 나왔다.

저자의 다른 책, <한국의 학벌, 또하나의 카스트인가>도 내내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서울대를 '모시는'이런 분위기에 대한 비판을 하려면 당연히 입시제도에 대한 문제가 나온다. 저자 역시 그 부분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다루고 있는데, 이 부분에 대해서는 서울대 중심의 학벌사회를 탓하던 그런 신랄한 맛은 별로 없다. 입시제도 자체가 워낙 난점이라 그렇겠지만, 이 부분은 좀 평범하다. 다만, 국립대학의 운영 문제에 대한 부분이 있는데, 이 부분은 생각해보지 못했던 것이라 신선했다.

내내 흥분하면서 '맞아, 맞아'를 연발하며 읽었는데, 이 책은 중대한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나처럼 줏대 없는 사람은, 책을 읽는 동안에는 분개하지만 책을 다 읽고나서는 '역시 서울대가 좋은거구나'라는 생각에 깊게 빠져버리기 때문이다. 서울대에 다니는 친구를 그야말로 '우러르며' '모시게'되기 때문이다. 끝까지 비판의식을 가지고 읽어야 하는 것이 포인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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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작은 새
에쿠니 가오리 지음 / 문일출판 / 199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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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쿠니 가오리라는 작가에게 반하여, 평소에는 손도 대지 않는 동화풍의 이야기를 읽었다. 무료한 일상 속에 어느날 뛰어 날아든 작은 새가 중심에 있는 이야기였는데, 이 작은 새라는 녀석은, 문조과에 속하는새로서 제법 귀여우면서도 엄청나게 건방지다.

쪼금만 덜 귀여웠더라면 한대쯤 콱 쥐어박지 않았을까 싶을만큼 건방지다. 새 주제에, 굴껍질을 까부숴놓은 영양제는 거들떠도 안보고, 럼주가 들어간 아이스크림을 찾는다. 교회를 가고싶어하길래 이 작은 새를 교회로 데리고 가자, 새는 조용하다. 컨디션이 않좋은가 싶어 물어보지만, 교회이기 때문에 거룩해지고 그래서 조용해지는 거라고 대답한다. 이 부분은, 내 나름대로는 가장 귀여웠던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내내 부드럽고 포근한 이야기들이 가득 차 있지만, 가끔씩, 정말 가끔씩 고독한 기분이 느껴진다. 조금 고독하고 또 조금 쓸쓸해서, 부드럽고 온화한 일상이 사무치게 슬퍼지기도 한다. 나는 동화풍의 이야기를 전혀 읽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에 사실은 좀 실망하기도 했었다. <반짝반짝 빛나는>과 <냉정과 열정사이 - 로소->를 기대하면서 읽으면 실망은 두배가 될 것이다. 하지만 동화풍의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라면 적합할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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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금술사
파울로 코엘료 지음, 최정수 옮김 / 문학동네 / 200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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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치기 산티아고의, 자아의 신화를 찾아나서는 그 여정길을 나도 따라가 보았다. 아니, 따라갔다기 보다는, 그의 여정길을 저 멀리서 지켜볼 수 있는 행운은 얻은 것이다. 이 행운은, 정말로 행운이라는 표현 밖에 쓸 수 없는 것이었다. 이토록 대단하고 아름다운 그의 여정을 지켜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신학교에서 공부를 하다 양치기가 되어 세상을 떠도는 기쁨, 그 속에서 그는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것들을 얻는다. 같은 꿈의 반복 속에서 그에게 주어지는 '보물'을 찾기 위해 피라미드를 향하게 되고, 그 과정은 순탄치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그의 자아를 찾는 과정이고, 자아의 신화를 이루는 길이 된다. 늙은 왕을 만나 피라미드로 떠날 수 있게 되고, 중간에 도둑을 만나 전재산을 털리지만, 그는 다시 크리스탈 가게에서 일하며 떠날 수 있는 준비를 한다. 대상의 무리에 끼어 사막을 횡단 할 때 만난 영국인 연금술사로 부터, 비로서 '연금술사'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되고, 오아시스에서 벌어지는 전투를 예견하여 그는 또 다시 큰 돈을 쥐게 된다.

하지만 그가 오아시스에서 얻은 것은 단지 많은 금화만이 아니다. 그는 그곳에서 그의 연인을 만나 사랑을 하게 되고, 무엇보다 '연금술사'를 만난다. 그는 비로소 자신의 자아로 가는 길에 오르게 되는 것이다. 단지 사막을 횡단하며 피라미드를 향하는 것이 아니라, 만물의 하나로 이어나가는 언어를 알고, 그리하여 자아의 신화로 성큼 다가서게 되는 것이다. 그는 사막과 바람과 그리고 태양과 이야기 하며, 자신이 바람이 되기도 한다. 사막에 떠있는 바람이 되어, 그는 자신의 자아에 더 다가선다.

결국, 그의 모든 여정들은 오로지 한가지 목표 '자아의 신화'에 다가가기 위한 것이었다. 그 여정을 쫒는 길은 지극히 '신'과 대화하는 기분이다. 신과 대화하는 것은, 종교적인 것이 아니라, 만물의 이치가 하나로 모여드는 그 어떤 정기, 혹은 원리에 다가서는 기분이다. 결국 이 소설은 '자아의 신화'라는 이름을 가진, '신'적 존재에 다가서는 이야기다. 고귀하고 거룩한 존재에 다가서는 것이기 때문에, 그만큼 진실된 마음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이 모든 과정에서, 읽는 사람의 세포 하나하나를 일깨우는 듯한 느낌을 받는데,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사막에서 만난 그의 연인이다. 사막의 여자라는 이름을 가진 존재이기에, 사막이 자신에게 사랑을 줄 것임을 알고 있었고 그 사랑이 다시 사막으로 떠나갈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에게 돌아올 것이라는 사실도. 산티아고가 그녀에게 돌아가는 길에 축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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