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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와 빈곤 - 산업 불황의 원인과, 빈부격차에 대한 탐구와 해결책 ㅣ 현대지성 클래식 26
헨리 조지 지음, 이종인 옮김 / 현대지성 / 2019년 5월
평점 :



산업 불황의 원인과, 빈부격차에 대한 탐구와 해결책
이 책은 헨리 조지의 토지 공개념에 대해 알 수 있다. 헨리 조지라는
이름은 많은 이들이 들어봤을 법 하다. 부동산 및 토지에 관련된 토론을 하게 되면 어김없이 나오는 이름
중 한 명이기 때문이다. 특히, 최근 부동산 가격 폭등 및
임대료 폭등으로 인해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을 비롯한 다양한 사회적 문제가 대두
될 때마다 통지 공개념 개념을 주장했던 ‘헨리 조지’의 이름이
거론 되곤 한다.
과연 지금으로부터 140여년전 발간된 <진보와 빈곤>이라는 책이 무엇을 주장하였기에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열광을 하고 당시에 파격적으로 여겨졌는지 알아보자. 우선, 간단하게
저자인 헨리 조지에 대해 설명하면 1839년 미국 필라델피아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고 우여곡절 끝에 1879년 <진보와 빈곤>을
발간을 통해 큰 명성을 얻었고, 이를 계기로 유명한 시국 연설가가 되었다. 그는 이후 뉴욕 시장 선거에 두 번이나 도전했지만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1897년 58세의 나이로 소천한다.
책은 당시 주류 사상이었던 임금 기금 이론과 맬서스 인구 이론을 정면 반박 함과 동시에 자신이 가지고 있던 토지
공개념 주장을 펼친다. 쉽게 설명하면 동산의 사유는 인정하지만, 부동산의
사유는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당시 기계의 발달로 인해 차고도 넘치는 생산물이 지속적으로 나왔지만 임금은 그대로 혹은 더 낮아지고 사람들의
일자리는 점점 줄어드는 형상이었다. 당시 임금 이론과 맬서스 인구 이론을 통해 그것을 당연한 이치로
받아들이는 분위기 속에서 헨리 조지는 이러한 현상은 몇몇 기득권들이 가지고 있는 탐욕과 욕심이 불러온 결과라고 주장을 했다.
헨리 조지는 토지를 사유재산으로 인정하고 있는 제도를 비성경적이고 반정의라고 주장했다. 사적 토지 소유는 불로소득을 발생시키고 부의 과도한 집중으로 인해 불평등을 심화시키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렇기에 이러한 불평등의 해결책으로 지대(地代)에 관해 모두 세금으로 거둬들이자는 ‘토지단일세’를 주장을 한다.
헨리 조지의 이러한 주장의 발상은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희년제도이다. “토지를
영영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라 너희는 나그네요 우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레위기 25장23절)”
하나님이 천지를 6일간 창조하시고
7일째 되는 날 안식하셨듯이 7년을 주기로 땅도 안식년을 갖는 것이다. 그렇게 7년 x 7번(성경에선 완전수)이 되는 49년의
다음 해는 땅을 다시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는 것이다.
임금은 대가를 지불 받는 노동에 의해서 생산되는 것이므로, 다른 조건들이
같다면, 노동자의 숫자가 증가할수록 임금은 높아져야 마땅하다. 이자는
임금과 함께 오르거나 떨어져야 마땅하지만, 궁극적으로 지대(地貸)에 달려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물질적 진보와 함께 모든 곳에서 지대가
상승한다는 사실은 임금과 이자가 상승하지 못하는 사실을 설명해준다. 토지 사유제 아래에서 투기적 상승은
막강한 힘을 발휘하여 지대를 증가시키고 임금을 하락시킨다. 토지 사유제가 존속되는 한, 물질적 진보는 인구 증가와 무관하게 노동자를 최저 생계의 임금 수준으로 추락시킨다.
토지를 공동 재산으로 만드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다. 이외의 다른 방법들은
빈곤을 항구적으로 제거하지도 못하고 임금을 기아 수준으로 떨어트리는 경향을 제거하지도 못한다.
부의 평등함이 없는 정치적 민주화는 결국 독재정부나 무정부주의로 흘러가고 만다.
노동과 노동의 생산물에 대한 모든 세금을 폐지하고 대신 토지 개량과는 무관하게 토지의 가치에 대해서만 세금(토지단일세)을 매기자고 제안한다.
19세기의 특징인 엄청난 생산력 증가는 가난을 근절하거나 노동자들의
부담을 덜어주지 않았다. 오히려 부자와 나사로(성경에서 나오는
거지)의 빈부차이를 더욱 심화시키고 생존을 위한 발버둥을 더욱 힘든 것으로 만들었다. 발명으로 인해 상상할 수 없는 생산 능력을 인류는 소유하였지만 그로 인해 많은 이들이 자선, 동냥으로 살아가고 있다.
부가 크게 증가되고 평균적인 안락, 여가, 개선 등의 평균 수준이 높아졌다. 하지만 이러한 혜택은 가장 낮은
계급의 사람들은 누리지 못한다.
임금은 자본에서 나온다고 생각하고 있던 기존 정치경제학에 반기를 든 헨리 조지는 ‘임금은 자본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임금의 대가인 노동의 생산물로부터
나온다’ 라고 주장했다.
생산의 3대 요소는 토지, 노동, 자본이다. 여기서 토지는 물과 공기와 구분되는 지상의 땅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자신의 몸 밖에 있는 모든 물질적 세상을 가리킨다.
그리고 노동이라는 용어는 모든 인간적 노력을 포함한다. 그렇기에 헨리 조지는 자본의 범주에서
토지나 노동에 포함될 수 있는 모든 것을 제외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토지라는 용어는 모든 자연의 기회와 힘을 포함한다. 노동은 모든 인적
노력을 의미한다. 자본은 더 많은 부를 생산하기 위해 사용된 부를 가리킨다.
자연의 기회들을 사용한 대가로 토지 소유주에게 돌아가는 부분은 지대라고 한다.
인적 노력에 대한 보상은 임금이다. 자본의 사용에 대한 대가는 이자이다.
<소비에 대한 수요가, 노동이
생산에 투입되는 방향을 결정한다> 만약 내가 잭나이프를 만드는 노동자이고 받은 임금으로 밀을 사들였다면, 나는 잭나이프를 밀과 교환한 것이다. 소비에 대한 수요가 노동이
생산에 투입되는 방향을 결정하기 때문에, 밀 생산이 한계에 도달하지 않는 한 나는 밀의 재고를 감소시킨
게 아니다. 왜냐하면 잭나이프를 교환 가능한 부의 재고에다 집어넣고 밀을 꺼냈으므로, 나는 일련의 교환 과정 끝에서 밀의 생산에 노동을 투입한 것이다. 이것은
밀 경작자가 밀을 집어넣고 잭나이프를 요구함으로써 노동을 잭나이프의 생산 쪽에다 투입한 것과 마찬가지다.
자본은 노동이 관여하여 부를 만들어내는 원료를 제공하지 않는다. 자본은
임금을 제공하거나 선불하지 않는다. 자본은 노동자의 일이 진행되는 동안 노동자의 생계를 유지해주지 않는다. 자본은 산업을 제약하지 않는다. 사회 전체에 충분한 자본이 있다면, 진정한 제약은 자본의 부족이 아니라 자본이 적절히 분배 되지 않다는 점에 있다.
맬서스 이론은 부의 힘을 휘두르면서 사람들의 생각을 지배하는 계급에게 아주 커다란 정신적 위로를 안겨주고 또
그들의 지위를 확신시켜 주는 사상이다. 이 이론에 의하면 가난, 궁핍, 기아는 개인의 탐욕이나 미비한 사회적 제도 탓이 아니고 보편적 법칙의 불가피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사회에 부의 공평한 분배가 유지된다면 인구의 자연스러운 증가는 모든 개인을 더 가난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더 부유하게 만든다고 주장한다. 당시 정치경제학에선 자본을 생산의 제일 요인으로, 토지를 수단으로, 노동을 자본가의 대리인 혹은 도구로 여기고 있었다.
자본은 맨 먼저 오는 것이 아니라 맨 나중에 온다. 자본은 노동의
사용자가 아니라, 실제로는 노동에 의해 고용되는 것이다. 노동이
투입되려면 먼저 토지가 있어야 하고, 노동이 투입된 이후에 비로소 자본이 생겨나는 것이다. 자본은 노동의 결과이고 노동이 더 많은 생산을 하도록 돕는데 사용된다. 노동은
활동적인 최초의 힘이고 따라서 자본의 사용자가 된다. 노동은 오로지 토지를 상대로 투입될 수 있고 부로
변모시킬 수 있는 물질을 끄집어내는 것도 토지가 있어야 가능하다. 따라서 토지는 선행 조건이고 노동이
투입되는 들판이며 물질이다. 따라서 토지, 노동, 자본이 자연적인 순서가 된다.
당시 헨리 조지는 기존의 고전경제학과는 다른 경제 사상을 갖고 있었기에 재야 경제학자로 불렸다고 한다. 그는 이 책에서 당시에 있던 산업 불황, 부의 쏠림 현상, 빈부 격차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서 토지를 공유 하자는 파격적인 주장을 한다.
그의 주장은 너무나 급진적이며 기존 이론과 배치되기에 무시당했지만 빈부의 격차가 심해지고 몇몇 소유의 부가 급격하게
증가하는 현실 속에서 다시 각광을 받고 있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책을 읽는 내내 현재
이슈가 되고 있는 기본 소득, 최저 임금 인상, 노인 연금, 청년 수당, 아동 수당 등 각종 사회 현안이 떠올랐다.
낙수 효과를 주장하는 보수측과 소득 주도 현상을 주장하는 진보측의 대립은 양쪽 모두 국민들을 잘 살게 해주겠다고
하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이 없는 한 공허한 소리가 되지는 않을까 싶기도 하다. 모두가 잘 사는 세상은
절대 존재할 수 없을 것 같다. 다만, 대다수 국민들이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함께 어울려 사는 세상이 속히 오길 바랄 뿐이다. 140여년 전에 쓰여진 이 책이 2019년에 읽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현실이 조금은 슬프지만 저자의 통찰력이 있기에 다시금 희망도 가져볼 수
있을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