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아픔이 마중하는 세계에서 - 병원 밖의 환자들이 내게 가르쳐준 것들
양창모 지음 / 한겨레출판 / 2021년 4월
평점 :
슬픈 영화를 보면 울컥하는 마음에 눈물이 왈칵 나오곤 한다. 영화 속 주인공의 애절한 상황을 보면서 감정이입을 하게 되고 그 상황에 몰입하게 되어 눈물을 흘리고 때론 엉엉 울기도 한다. 나는 남자지만 참 눈물이 많은 남자인 것 같다. 그런데 영화를 보면서 눈물을 흘릴 때는 영화를 보고 있어야 눈물이 난다. 당연한 말처럼 들릴 수 있겠지만 영화의 경우, 영화를 보면서 그 상황에 온전히 몰입을 하고 집중을 해야 슬픔이 증폭되면서 눈물이 난다. 즉, 영화를 보다가 시선을 돌려서 보지 않으면 집중이 안 되고 눈물이 날 정도의 감정이입이 되진 않는다.(내가 이렇게 해서 감정을 추스른다.)
책을 읽다가 슬프고 마음 아픈 내용을 읽다 보면 가슴이 아프다. 가슴 한편이 시린 것 같고 먹먹해진다. 차마 눈물이 흐를까 봐 더 이상 읽지를 못하고 눈을 감는다. 그런데 책은 눈으로 읽기만 하는 매체가 아니다. 읽으면 머릿속에서 상상이 되는 매체다. 눈을 감아도 머릿속에서는 상상이 되고 결국 감정을 이기지 못해 눈물이 난다. 가슴이 찡하게 시리듯 눈물이 핑 돈다. 엉엉 울지는 않는다. 다만 답답한 가슴을 두드리며 깊은숨을 몇 번 토해낼 뿐이다. 오늘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그렇게 했다. 책을 읽다가 몇 번이나 덮었는지 모르겠다. 아픔이 마중하는 세계는 생각보다 많이 가슴 아픈 세계였다.
이 책은 춘천에서 10년간 일했던 병원을 그만두고 시골 어르신들 댁을 찾아가서 아픈 곳을 살펴주는 왕진 의사의 이야기다. 그는 공중보건의로 3년 근무하고 전공의로서 대학병원에서 4년 근무한 다음, 원주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으로 출근하면서 왕진을 다니기 시작했다. 이후 춘천에서 10년 정도 의원에서 일하고 있을 때 그는 환자들과 멀어지는 것을 느꼈고 병원을 정리했다. 이때부터 그는 본격적으로 시골 깊은 곳까지 왕진을 다녔다. 댐 수몰지역과 같은 곳으로 왕진을 가면서 병원을 가기 힘든 아픈 노인분들을 치료해 주었다. 그렇기에 이 책은 왕진을 다닌 의사의 이야기이자 의사가 만났던 환자분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첫 번째 이야기는 왕진을 다니면서 겪었던 이야기들이다. 저자의 의사 생활 시작 이야기부터 왕진 의사가 되기까지의 과정이 먼저 담겨있으며, 이후 왕진을 다니면서 만났던 환자들의 이야기가 주를 이루고 있다. 두 번째 이야기는 저자가 만났던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를 자세히 다루고 있다. 환자들의 이야기가 주된 내용이며 저자의 주변 사람들 및 저자 본인의 이야기도 담겨있다. 세 번째 이야기에는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세계에 대한 저자의 생각들이 담겨있다. 가지지 못한 자, 사회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자들을 위해 목소리를 낸다. 그들을 지키고픈 마음에 현 사회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비판하면서 책을 마무리 짓는다.
저자는 왕진을 가면서 환자를 한 사람으로 보기 시작했다고 밝힌다. 병원의 진료실에 있을 때는 환자의 병만 보였지만 왕진을 가게 되면 환자의 삶 자체가 보이는 것이다. 차를 타고 꼬불꼬불 산길을 지나 한 시간이 걸려 도착한 뒤 마중 나온 할머니와 인사하고 할머니의 방으로 들어가 식혜를 같이 마신다. 진료실과 비교했을 때 '쓸데없는 과정'을 거치기에 단순히 질환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보였던 것이다. 환자의 삶이 의사의 가슴속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진료실 밖으로 나오니 저자는 현재 의료 사회의 민낯을 마주하였다. 이익을 추구하는 중복 처방, 가난한 자들에게는 최소한의 수술도 허락되지 않는 사회적 제약, 3분 이상 진료하지 않는 상품화된 의료 시스템 등 많은 문제점들이 산재했다. 이러한 문제점이 발생하는 이유는 의사가 환자를 찾아가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앞에서 말한 '쓸데없는 과정'이 없기에 환자의 삶은 보이지 않는 것이다. 현재 의료 사회에서 환자를 통해 보는 것은 질환뿐이고 환자에게 요구하는 유일한 것은 돈뿐이다. 왕진을 가서 환자의 삶을 들여다보며 진료한다면 많은 문제점들이 해결되겠지만 현재 상황은 매우 열악하다. 우리 모두 아는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저자는 목소리를 낸다. 병원을 한 번 오기조차 힘든 가난하고 아픈 이들을 위해.
서문에서 얘기한 가슴이 먹먹해진 이야기는 저자가 왕진 다니면서 진료를 보았던 태장동 할머니의 이야기였다. 관상동맥이 전부 막혀서 심장 수술을 해야 하는데 비용은 수백만 원, 설상가상으로 수술을 하기 위해 시행한 가슴 사진촬영에서 폐에 혹이 발견되어 수술 진행이 불가한 상태, 이후 위장이 천공까지 되면서 입원해서 치료를 받는 중이었다. 저자가 면회를 가니 아픈 와중에도 반갑게 맞이해주면서 메모지를 한 장 꺼내서 무언가를 적기 시작하신다. 얼마 되지 않는 재산을 찾는 방법을 가르쳐주시는 것이었다. 당신이 죽고 나면 병원비에 보태달라는 말과 함께. 저자가 곧 회복하실 거라 말씀드려도 할머니는 본인의 상태에 대해 비관적이셨다. 할머니를 안정시키고 뒤돌아 나오는 저자의 눈은 뿌옇게 흐려졌고 나의 가슴은 먹먹하게 아려왔다. 할머니를 바라보는 주위 사람의 심정도 이렇게 힘든데 당신께서는 어땠을까? 짐작조차 할 수 없는 할머니의 감정이 나도 모르게 느껴졌고 저자와 함께 눈물을 흘렸다.
이렇게 가슴 아픈 이야기들이 저자의 겉으론 덤덤해 보이나 속은 따듯한 시선으로 서술된다. 저자의 문체는 상당히 수려하다. 유려한 수준을 넘어서서 수려하다고 표현하고 싶다. 상황 및 사람에 대한 본인만의 감정을 표현하는 문장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나 싶을 정도다. 너무나도 꾸며져서 읽기 힘든 문장이 아니다. 문장이 간결해서 읽기 쉬움에도 문체의 아름다움이 잘 느껴진다. 이 부분은 말로 표현하기가 정말 어렵다. 어떤 한 문장만으로 보여주기도 힘들다. 글 전체의 맥락을 읽어야 느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책을 읽어야만 느껴지는 부분이니 참고하면 좋을 것 같다.
이 책을 읽으면 처음에는 저자가 만난 환자분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가슴 먹먹해지고 슬퍼지다가 이후에는 저자의 생각들을 읽으면서 공감하고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그만큼 이야기의 흡입력이 강력하다. 이러한 이야기들이 담긴 한 사람의 에세이를 읽어보고 싶다면 이 책이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따듯하면서 가슴 아픈 이야기들이 저자의 담백하면서도 서정적인 문장과 만나서 당신의 마음에 물결을 일으킬 것이다.
의사가 병원이 아닌 바깥에서 만난 환자들의 이야기가 궁금하거나 저자가 병원 안과 밖에서 마주한 세계가 어떤지 궁금한 사람들에게도 이 책을 추천한다. 아픔이 마중하는 세계가 슬프고 비관적이기만 할지, 희미하지만 희망적인 빛이 보일지는 끝까지 읽어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 이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지원받아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