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현장비평가가 뽑은 올해의 좋은 소설
김미월 외 지음 / 현대문학 / 2008년 6월
평점 :
품절


 2008. 10. 17

 

김연수의 단편 '케이케이의 이름을 불러봤어'를 읽었다.  이 작품은 [세계의문학] 2008년 봄호에 실렸는데 [2008 현장비평가가 뽑은 올해의 좋은 소설]에도 선정되었다고 한다.

이 작품은 외국여성작가(아마 미국)가 사랑했던 케이케이의 나라(한국)을 찾아와서 이제는 만날 수 없는 케이케이를 그리워하는 이야기다. 화자에게는 죽어버린 케이케이가 있고 통역을 맡은 해피에게는 세살때 죽은 늦둥이 아들이 있다. 이 둘은 모두 화자에게도 해피에게도 세상의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슬픔고 고통을 주었다. 나는 처음에 그렇게 읽었다. 이토록 사랑을 잃은 아픔을 절절하게 그려낼 수 있을까. 세상에는 사랑을 잃은 고통을 토로한 작품이 널렸지만 김연수는 다시금 그 아픔을 새롭게 그려내고 있었다.

그렇지만 다시 읽어보고, 또 다른 사람들과 함께 그 작품에 대해 얘기를 나누며 단순하게 잃어버린 사랑에 대한 고통만을 말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럼 그렇지, 우리는 '김연수 답다 '라고 입을 모았다. 그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고통을 말하면서 그 너머 깊은 곳으로 독자를 끌고 간다. 그 깊은 곳은 확실하게 제시할 수도 완전하게 이해할 수도 없다. 그 곳은 '어둡고 비밀스럽고 거무스름한 물질이 우리 우주의 90퍼센트를 차지한다'고 과학자들이 말한 '암흑물질'이다. 우리가 안다고 믿는 세상은 암흑물질 속의 겨우 10퍼센트인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다고 여긴 것은 실재와 얼마나 일치할 수 있나? 우리가 아는 것을 우리는 얼마나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나? 완벽한 소통이 가능하기나 한 것인가?

우선 화자가 그리워하는 케이케이를 보자. 화자는 케이케이가 죽고 나서야 그의 이름이 키준 킴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며 '한 번도 그 이름을 불러보지 못했다는 것'에 슬픔을 느낀다. 케이케이의 진짜 이름이었다고 믿고 있는 키준 킴도 온전한 진짜 이름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 독자는 안다. 그의 진짜 이름는 김기준일 것이다.

화자는 케이케이의 고향 '밤메'를 'bamme', '밤뫼', '율산栗山', '방미'로 추정하면서 찾아가지만 결코 '밤메'에는 당도하지 못한다. 심지어 '밤메'를 찾으려고 할 때 '밤에'를 잘 못 입력한 '밤메'에 대한 글들과 엉뚱하게 독일인의 姓중 하나인 'Bam me'까지 나타나 혼란을 부추긴다.

화자가 '해피'라고 부르는 통역의 이름은 '혜미'인데 'help me'를 떠올려서 '혜미'를 기억해달라고 하지만 화자는 'happy'로 기억하겠다고 말한다. 세살짜리 아들을 잃은 어미의 고통스런 이미지를 쓰고 있는 통역자 혜미는 이렇게 '해피'로 불린다.

케이케이가 어렸을 때 밤메에서('가장 아름다운 시절') 했던 수영이라며 미드호수에서 보여준 것은 'a corpes swimming' 즉 '시체의 수영'이었다. 화자의 말에 통역자 해피는 그건 시체의 수영이 아니라 '송장 헤엄'이며 '배영'이며 이는 'a corpes swimming'이 아니라 'a backstroke'가 될 것이라고 한다. 화자는 해피의 말을 받아들일 수 없다.

혜미는 아파서 우는 세살짜리 아들이 하는 말 '으아아아으으러'가 무슨 말인가 알고 싶었지만 결코 아이가 하는 말의 뜻을 알 수 없었다. 아이의 그 소리는 온 힘을 다해 엄마 아빠에게 하는 말이었을 테지만 혜미는 단순하게 그 소리를 '헛되이, 아무런 소용도 없이' 그대로 따라해볼 뿐이었다. 아이가 죽고 나서 혜미는 누구와도 말하지 않는다.

혜미는 '무슨 'nak'으로 살아가느냐고' 묻는 사람이 있었다고 말하며 화자는 'nak'이 무슨 뜻이냐고 묻는다. 낙은 樂이다. 화자는 'nak'이란 '케이케이의 젖은 몸' 같은 것이겠지라고 말한다. 혜미는 화자가 인터뷰 중에 했던 '하이퍼바이터미노우시스에이'라는 말이 무슨 뜻이냐고 화자에게 묻고 '아마 두고두고 미안한 마음 같은 것'일거라고 말한다.

오해는 이 뿐만이 아니다. 케이케이가 자카란다 나무 밑에서 만났던 거지 여인은 알고보면 '구주 예수그리스도를 믿으세요'라고 전도하던 여인이었다.

왜 이렇게 혼란스러운 것인가? 그럴 수 밖에 없다. 우리가 알고 있다고 믿는 것들은 사실은 겨우 10퍼센트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통역이란 무엇인가?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의 말을 그대로 전달해주는 일이 아닌가? 그것은 가능하기나 한 것일까?

혜미는 '동시통역과정'을 공부하면서 마침내 아이를 잃은 고통속에서 살아가야만 하는 최소한의 근거를 발견한다. 그녀는 의미를 따져보지 않고 그저 언어를 단순한 음성적 신호로만 받아들이며 '다른 사람들이 하는 말들의 의미는 바깥에서 오는 게 아니라 서서히' 그녀의 내부에서 생성된다. 왜 그녀는 의미를 외면하고 소리만을 듣는 걸까? 의미는 고통이고 죽음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고통을 외면하고 싶다.

화자는 케이케이의 죽음의 원인을 알지 못하며 단지 그가 죽어가는 모습만을 기억한다. 그녀가(우리 모두가) 알 수 있는 것은 눈에 보이는 현상일 뿐인 것이다. 그녀는 케이케이의 죽음의 원인을 그가 새벽에 불타는 전경을 오랫동안 서서 보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작품 말미에는 고속도로에서 불타는 트럭이 나온다. 화자와 혜미는 운전자의 안위를 걱정하다가 '그는 살았네요'라고 말한다. 불 속에서 운전자가 살았을 거라는 안도는 사실 화자와 혜미도 살고 싶다는 욕망 아닐까. 자신들이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고통속에 살고, 두고두고 미안한 마음으로 살고, 희망을 버렸기 때문에 살고 있지만. 불에 타서 산화하는 것은 우주 속에 환원되었다는 것이고 그것은 사라졌다는 것이 아니고 변화되었다는 것, 윤회다. 자카란다 꽃도 때가 되면 피고 때가 되면 지고 다시 피어난다. 그녀들이 살아가는 것은 정당화된다.

기호로서의 언어와 의미로서의 언어 사이에서 그녀들의 고통과 죄의식을 볼 수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나를 오랫동안 잡는 것은 화자가 말하는 '케이케이의 젖은 몸'으로 대변되는 아름다운 사랑의 이미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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