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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어장 ㅣ 사계절 1318 문고 49
최나미 지음 / 사계절 / 2008년 6월
평점 : 
줄곧 열세살 아이들의 삶과 고민을 그리는 데 힘을 기울여온 최나미 작가의 첫 청소년소설이다. 초등학교 고학년 아이들이 읽을 소년소설(또는 장편동화)이랑 청소년소설의 경계를 정확히 짚기는 쉽지 않은데, 이 작품은 열네살 아이, 그러니까 막 중학생이 된 아이의 한 해를 그렸다는 점에서 청소년소설로 분류될 것이다(이 책의 소속도 청소년문학 씨리즈인 사계절 1318문고).
어린이문학과 청소년문학의 경계에서 멀지 않은 곳에 놓인 작품이라 그런지, 이 작품을 청소년문학에 대한 최근의 본격적인 탐색과 담론을 가지고 논하기는 어렵겠다는 생각이 든다. 작품을 읽자고 들면 초등 고학년이나 고등학생 모두 무리 없이 읽을 것 같고, 다양하게 시도되고 있는 청소년문학의 본체에 대한 탐색보다는 열네살 아이의 삶과 고민을 살피는 데 더 관심을 기울인 작품으로 읽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작품이 열네살 아이의 삶과 고민을 얼마나 특징지어, 또래 독자 아이들이 폭넓게 공명할 작품으로 씌었는지에 대해 생각해봐야겠다.
최나미 작가가 그려온 열세살 아이들은 그야말로 초등학생이라는 정체성의 정점이랄까, 그 끝에 선 이들의 성숙한 면모를 드러내왔다. 초등학생 가운데 원로라 할 이들은 예전과는 달리 이르게 찾아온 사춘기를 진하게 겪으면서 동화에서 소설로 자신의 삶과 고민의 자리를 옮겨놓았다. 열세살 아이들을 그린 작품은 최나미 작가의 것 말고도 여럿 있는데, 평단으로부터 동화의 소설화라는 경향을 보인다는 분석을 받기도 했다.
현실의 아이들 삶과 고민이 작품들을 그러한 경향으로 이끌었는지, 아니면 현실과 어린이문학에 대한 작가들의 달라진 자각이 현실의 아이들을 그러한 모습으로 그려낸 건지, 나는 정확히 모르겠다. 아마도 세상과 아이들 모두 달라지기도 했겠고, 동시에 더는 낭만으로 윤색된, 계몽성 감동만 앙상하게 남은 세계를 그릴 수 없다는 작가들의 자각이 드넓게 퍼지기도 했을 터이다.
그래, 그렇다면 그러저러한 열세살을 겪어 넘어간 아이들의 열네살은 어떠할까. 실제에서는 어떠할 것이며, 작품 안에서는 어떠할 것인가. 초등학교에서 중학교로 자리를 옮겨 원로에서 신생아로 탈바꿈한 그들일진대, 여전히 성숙한 냉소가 진하게 밴 고민을 하며 자신과 세상을 바라볼까?
이 작품은 그러한 맥락에서 파악할 수 있는 열네살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자리가 바뀌고 정체성이 바뀌니 아이들의 삶과 고민도 달라진다. 사춘기에 누린, 깊어진 고민의 내용은 이제 저 아래로 밀어내려 든든한 바탕으로 삼은 채, 새 공간에서 새 사람들과 새 관계를 쌓는다. 이야기는 주인공 여자 아이 진우령이 중학교에 입학하는 때부터 1학년 겨울방학을 맞을 때까지의 한 해를 여덟 가지 열쇳말로 나누어 드러내, 그때그때의 장면과 장면을 따로 그려내면서도 그 시작과 끝을 아우르는 맥락을 잡으며 끝맺는다. 그 열쇳말과 맥락 모두 바로 새 공간에서 새 사람들과 새 관계를 쌓는 것으로 채워져 있다고 할 수 있다. 낯선 무엇에 대한 설렘과 기대가 생생하고, 그러면서 여전히 낯익은 무엇에 대한 좌절과 실망도 생생하다. 물론 적당히 성숙해져 있는 생생함이다. 익살스럽고 재치 있는 언어로 죽죽 풀려 나오는 에피소드들이 그 생생함의 증거로 보인다.
그래서 어찌 보면 열네살에 대한 보고서 격인 이 작품은 어린이문학과 청소년문학의 경계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기에, 일면 동화다우면서도 소설답다. 신생아로 탈바꿈한 열네살 아이들은 어쩌면 또다른 차원의 동화의 자리에 서 있기도, 그렇지만 이미 소설의 자리에 가 있기는 한 존재일지도 모르겠다. 이런 면에서 이 작품은 열네살이라는 존재의 여러 징표를 잘 붙잡아 설득력 있게 형상화했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을 것 같다. 이전의 열세살을 그려낸 경향들과 견주어 말이다.
그런데 작품을 읽는 내내 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은 이 생각은 무얼까. 우령이와 그 친구 열매, 그리고 이러저러한 등장인물과 이들의 말, 움직임, 생각, 고민, 이런 것들이 고등학생의 것이라 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 말이다. 서로 한 살 차이밖에 안 나기는 해도 우리가 초등학교 6학년과 중학교 1학년을 대별해 특징지을 수 있듯이 중학교 2학년과 고등학교 1학년 등 다른 학년들도 그것대로 특징지을 수 있다. ‘그때면 그러저러할 것’이라는 모종의 공유된 관념이 있기 때문이다. 설령 그것이 고정관념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 작품 속 아이들은 고등학생이라 하면 분명 다르게 그려져야 될, 중학생다운 면모를 지니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여전히, 이 아이들이 고등학생이라 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것이란 느낌이 무척 강하게 남는다.
중학생과 고등학생이 공유하는 면모가 분명 있겠지만, 아무튼 저러한 느낌을 한마디로 나타내면 ‘중학생이 이 정도?’라 할까. 끝 간 데 없이 이어지는 아이들의 톡톡 튀는 재담과 그 속에 깃든 성숙함을 보다 보면 이들이 중학생이란 인식은 스르르 사라진다. 초등학교에서 막 올라온, 아직은 풋사과 같은 중학교 1학년들(중학교 1학년들에게서 이런 면모는 쉽게 찾아볼 수 있다)이 할 법한 평범하고 별스럽지 않은 대사나 사유의 표현은 오히려 찾기 어려울 정도다. 그렇다 보니 아예 고등학생이 더 적실할 것이란 생각이 강하게 들고, 때때로는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작가의 모습이 어른거리듯 상상된다. 농담을 정말 잘하는, 입담이 꽤 셀, 순발력이 좋을 것만 같은 작가가 말이다(실제로는 어떤 분인지 모르지만).
물론 수없이 다양한 중학생과 고등학생이 있고 그들 중 어떤 아이를 작품에 데려와 그려낼 것이냐는 작가의 선택이다. 그 선택에 따라 작품이 그려내는 인물이 드러낼 대표적인 사회적 표상이 달라진다. 이때 그것이 실감에서 벗어나 있다면 문제다. 작가의 사유와 목소리, 특히 성숙도와 입담이 두드러진다는 느낌을 주면 더더욱 문제다. 이 작품을 읽는 중학생 독자들은 어떻게 감상할까. 우령이를 비롯한 등장인물들의 표상을 자신의 개인 표상과, 또 자기 또래의 사회적 표상과 쉽고 자연스럽게 연결지을까? 그저 재미있다 여기며 읽어가기만 할까? 이러한 생각과 의문 때문에, 어쩌면 이 작품은 앞서 말해온 대로 열네살을 잘 그려낸 작품일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작품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열일곱이나 열여덟살의 이야기라 해도 충분히 믿을 법하니까.(지난달에 읽은, [어린이와 문학] 6월호에 실린 이현 작가의 단편 청소년소설 [어떤 실연]은 고등학교 2학년이 주인공인데, 그 주인공과 이 책의 등장인물들을 서로 섞어도 어색할 게 없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떤 실연]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의 사유나 언어 표현도 뭔가 적실함과는 거리가 있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그러고 보면 이런 것이 혹시 최근 청소년문학의 한 경향?)
동화든 청소년소설이든, 인물에 대한 독자 반응 가운데 가장 허무한 게 어쩌면 ‘세상에 이런 애가 어딨어?’일지 모른다.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있다고 하면 있는 거고 없다고 하면 없는 걸 테다. 손쉬운, 어쩌면 합리적인 대답이 ‘없진 않지’일지 모르겠는데, 아무튼 그 존재 가능성에 대한 독자의 감이 옅어지면 옅어질수록 작품의 공감도도 줄어들 것이다. 이 작품이 중학교 1학년, 열네살 아이들에게 어느 정도로 공감될지 정말 궁금하다.
(이 책의 작가 소개글을 보면 “열세살 아이들 얘기만 줄곧 쓰다가 처음으로 열네살에 도전장을 내밀었다”는 말이 나온다. 무릇 작가 소개글은 작가 스스로 독자에게 자기소개를 하거나, 출판사에서 독자에게 그 작가를 소개하거나, 그런 것일 테다. 그렇다면 이 책의 소개글은 어디에 해당할까. 끝까지 읽어보면 일단 후자에 해당하진 않는다는 걸 알 수 있다. 작가에 대한 객관적 정보로 설명하거나 논평을 한 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전자에 해당되는 걸 텐데, 작가가 이 책을 읽을 열네살 아이들한테 자신을 소개하면서 “열네살에 도전장을 내밀었다”고 말을 한 셈이다. ‘나 처음으로 너희들 얘기를 써보는 일에 도전했어’라는 걸 텐데, 나는 아무래도 이것이 자연스럽게 읽히지를 않는다. 이런 것이 과연 작가가 독자에게 하는 자기소개일까? 내가 보기에는 아무래도 작가가 자조적으로 자기 자신한테, 또는 다른 작가들한테, 또는 그쪽 출판계 사람들한테 자기소개를 하는 것처럼 읽힌다. 억측이나 비약인가?)
(우리 동화나 청소년소설을 보다 보면 때로 이런 생각이 든다. 특정 시기의 구분으로 세분화된 세대의 아이들이 서로 대별되는데, 그 구분의 기준 가운데 가장 강한 것이 바로 ‘학년’이다. 어느 학교급에 다니는 몇 학년인지가 그 인물이 드러낼 표상을 강하게 규정한다. 물론 이는 아이들을 ‘학생’으로만 인식하는, 제도교육의 공고함이 너무나 강력한 우리나라에서 어쩔 수 없는 일일지 모른다. 하지만 학년에 따라 달라진 아이들과 그들의 삶, 고민, 표정이 작품의 주제와 소재, 서사의 뼈대를 장악하는 경향, 또 감상의 기준이 되는 경향은 정말이지 답답함을 준다. 다른 기준과 삶을 절절하게 그려내는 작품을 만나 달리 감상할 수 있는 기회와 여유가 많이 생기면 참 좋겠다.)
(이 책에서 정말 마음에 드는 것 가운데 하나가 표지다. 최근에 본 청소년소설 책 표지 가운데 꼽을 만하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