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팽팽한 뺨에 우주의 입자가 퍼져 있다. 한 존재 안에 수렴된 시간들, 응축된 언어들이 아이의 몸에서 리듬을 입고 튕겨나온다. 누가 꼭 그래야 한다고 정한 게 아닌데도, 손주를 가져본 적 없는 노부인이라도 어린 소녀를 보면 자연히 이런 감정이 심장에 고이는 걸까. 바다를 동경하는 사람이 바닷가에 살지 않는 사람뿐인 것처럼. 손 닿지 않는 존재에 대한경이로움과 채워지지 않는 감각을 향한 대상화. - P96

굳이 먹어보지 않아도 입안에 도는 감미, 아리도록 달콤하며 질척거리는 넥타의 냄새야말로 심장에 가둔 비밀의 본질이다. 우듬지 끝자락에 잘 띄지 않으나 어느새 새로 돋아난 속잎 같은 마음의. - P103

류의 유지를 받들어, 같은 생각은 해본 적 없었고 애당초 유지라는 게 있지도 않았으며 방욕업을 시작한 뒤로 삶은 언제나 현재진행형이 아닌 현재멈춤형이었다. 그녀는 앞날에 대해 어떤 기대도 소망도 없었으며 그저 살아 있기 때문에, 오늘도 눈을 떴기 때문에 연장을 잡았다. 그것으로 자신이 존재하는 이유를 확인하지않았고, 자신의 행동에 논거를 깔거나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살아남으려고 노력하지 않았고 일찍 죽기 위해 몸을 아무렇게나 던지지도 않았다. 오로지 맥박이 멈추지 않았다는 이유로 움직이는 것은 훌륭하게 부속이 조합된 기계의 속성이었다. 류를 가끔 떠올렸고 그가 생전에 주의를 준 사항들에 자주 이끌렸지만, 제 몸처럼 부리던 연장으로 인해 손바닥에 집힌 굳은살과도 같은 감각 외에는, 류를 생긱하면서 온몸이 뻐근하게 달뜨고 아파오는 일이 더 이상 없었다. 그녀는, 나이 들어가고 있었다. - P264

참으로 이상한 일이지. 하나의 존재에서 가장 큰 비중을차지하는 영혼이라는 게 빠져나갔는데도 육신이 더 무거워진다는 것은. - P292

사라진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이 농익은 과일이나 밤하늘에 쏘아올린불꽃처럼 부서져 사라지기 때문에 유달리 빛나는 순간을 한번쯤은 갖게 되는지도 모른다.
지금이야말로 주어진 모든 상실을 살아야 할 때.
그래서 아직은 류, 당신에게 갈 시간이 오지 않은 모양이야. - P34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아가미 (애니메이션 더블 커버)
구병모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8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일반적이지 않다는 것에 대해 많은 생각이 들게하는 소설. 곤에게 직접 말하진 못했지만 행복해 줬음 좋겠다… 살아줬음 좋겠다… 강하의 말이 계속 귓가에 맴도는것 같다..

다음에는 정말 이런 일이 있으려야 있을 수도 없겠지만, 또다시 물에 빠진다면 인어 왕자를 두 번 만나는 행운이란 없을 테니 열심히 두 팔을 휘저어 나갈 거예요. 헤엄쳐야지 별수 있나요. 어쩌면 세상은 그 자체로 바닥없는 물이기도 하고. - P21

꼽아보면 세상 어디에든 흔히 있는 일이었고, 그것이 한 사람에게 몰려 과부하가 걸리는 일도 그리 드물지 않았으며 한가지 불행은 연속되는 서로 다른 고통의 원인이나 빌미가 되기마련이었다. - P25

모두 어제가 되어 부질없어진 인물과 사건의 나열들. 그는 과거를 명시하는 글자들을 단지 할 일이 없어 무료함으로 죽지 않기 위해서만 내려다보았다. 그가 어제의 세계를 읽는 동안 실제 세계는 변화와 요동과 전복이 일어나고 있었지만 그와는 무관한 일이었다. 고인 물이나 응결된 얼음만큼의 비중을 간직하며 급속 냉각되어 빙산에 갇힌 의식만을 유지하고 살아갈, 꼭 그만큼의 열량만 있으면 되는 나날들. - P4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이상한 집 2 - 11개의 평면도 ㅣ 우케쓰 이상한 시리즈
우케쓰 지음, 김은모 옮김 / 리드비 / 2025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다른 이야기들이 전부 연결된 사건이되는.. 참신한 구성의 소설… 재미있어서 단숨에 읽게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네 이웃의 식탁 ㅣ 오늘의 젊은 작가 19
구병모 지음 / 민음사 / 2018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실적이고 현실적인 내용에 소름이..
내 이웃의 이야기 혹은 내 이야기 일수도…

몇 번인가 차바퀴와 자갈이 부딪쳐 튕기는 소리가 리듬감을 갖고 요진의 몸을 경쾌하게 흔들었다. 불규칙적이고 불안하며 세상 그 어느 곳에서도 음악으로 인정받을 수 없을 법한 소리였고, 변변한 가로등 불빛 하나 없이 택시는 상향등에의지한 채 당장 무엇이 마주 덮쳐 올지 모를 어둠 속을 더듬어 나가고 있었음에도, 요진은 이 순간 공단 이불에 몸을 부리면 꼭 이럴 듯싶게 편안했다. - P18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작가의 화법에 익숙해지는 순간 순식간에 몰입해 읽어 나가게 되는 소설..
오언은 아가씨에게 무슨 말을 했을까? 아가씨는 그의 상처를 통해 무엇을 읽었을까? 계속 그 결말을 상상하게 되는.. 상처를 읽는 능력이 없었더라면 둘의 관계는 달랐을까?

사람 사이로 범람하는 급류 한가운데 놓인 다리의 안정성과 길이를 우리는 알 수 없으며 다리가 끊어졌거나 애초에 다리 따위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사람 사이를 건너서 다가가야 할 때도 있고 채워야 할 때도 있는 한편 그것이 사이임을 모르는 채 사이를 두어야 할 수도 있습니다. 사람 사이란 파헤치고 들쑤시는 방식으로만 좁히거나 파악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어쩌면 인간이란 서로의 사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 영원한 암실 속에서 서로를 보고 듣고 헤아린다는 착각과 함께 살아가는 유기체적 현상에 불과할 수 있습니다 - P63

그의 일기를? 혹은 그의 편지를? 에움길로 둘러갈 것 없이 알것 같았습니다. 그의 머릿속을 그 자신을. 그때는 어디까지나 아가씨의 재능을 두고 짐작한 바일 뿐, 보스가 읽히기를 원하는 단 한 명의 독자에게 열람을 거절당한 한 권의 책 같은 사람이라는 생각까지는 안 했답니다. - P75

단지 글자를 해독하는 것, 글자가 모여 이룬 낱말의 부유를 응시하고 낱말이 모여 이룬 문맥을 붙드는 것, 물을 머금은 빨래를 햇빛 아래 널어 말릴 때처럼 의미를 머금고 무거워진 행간을 털어서 밝혀내는 것까지. 그러는 동안 어떤 사람은 의미의 목록을 작성하여 분석하게도 되고, 나아가 그중 누군가는 의미의 무의미함까지 닿게 되기도 한다고요. - P165

"신이라는 건 있잖아. 그냥 하나의 오래된 질문이라고 생각해." - P285

상처 없는 관계라는 게 일찍이 존재나 하는 것인지 나는 모르겠다. 상처는 사랑의 누룩이며, 이제 나는 상처를 원경으로 삼지 않은 사랑이라는 걸 더는 알지 못하게 되었다. 상처는 필연이고 용서는 선택이지만, 어쩌면 상처를 가만히 들여다봄으로 인해, 상처를 만짐으로 인해, 상처를 통해서만 다가갈 수 있는 대상이,
세상에는 있는지도 모르겠다고. - P34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