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차(茶)주전자에서 물이 끓고있다. 어둑해진 창밖은 여전히 빗소리로 흥건하고, 나는 잠시 두개의 물소리가 만들어내는 묘한 화음에 빠져든다. 주전자의 손잡이를 잡을 때의 이 느낌이... 나는 좋다. 동(銅)으로 이뤄진 몸체의열기와, 앤틱한 곡선의 손잡이를 둘러싼 사기(沙器)의 두툼한 느낌이 좋다. 그리고 무엇보다 낡고, 충분히 그었다는 점이 마음에든다. 티백이 담긴 찻잔에 물을 따르고... 나는 라디오를 켠다. - P34

젊은 아버지의 얼굴 앞에서 특별한 감정을 느낀 것은 아니었다.
다만 누군가를 사랑해 온 인간의 마음은 오래 신은 운동화의 속처럼 닳고 해진 것이구나, 생각이 들었다. 세상의 어떤 빨래로도 그것을 완전히 되돌리진 못한다... 변형되고, 흔적이 남은 채로... 그저 볕을 쬐거나 습기를 피해야만 한다고 나는 생각했었다. 다 태워버려요 엄마. 그런 말을 내뱉은 나 자신이 조금은 원망스럽기도 했다. 몇 번 신지 않은 운동화 같은얼굴을 서랍 깊이 파묻은 채, 나는 말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다시 닫을 때의 서립은 이상할 정도로 삐걱이고, 무거운 것이었다. - P68

숙제처럼 밀려 있던 앞날과, 아무런 검사도 받지 못한 지난날들이 엎드린 시신처럼 자신의 얼굴을 감추고 누워 있던 밤이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앞으론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걸까? 불꺼진 방안에서한참을 생각하다 잠이 든 밤이었다. 인생이 힘든 것은예습을 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나는 눈을 감고 중얼거렸다. 결국 길고 긴 이 이야기도 복습에 불과할 뿐이겠지만, 어쩔 수 없는일이라고 지금의 나도 중얼거린다. 있는 힘을 다해 복습을 하는이 순간에도 인생은 흐른다. 흘러, 간다.  - P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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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지도
우케쓰 지음, 김은모 옮김 / 리드비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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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다. 근데 이 번 편은 주인공이 모든 실마리를 너무 쉽게 죄다 풀어버린 느낌..
그래도 궁금함에 다음 시리즈를 또 읽게 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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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의 팽팽한 뺨에 우주의 입자가 퍼져 있다. 한 존재 안에 수렴된 시간들, 응축된 언어들이 아이의 몸에서 리듬을 입고 튕겨나온다. 누가 꼭 그래야 한다고 정한 게 아닌데도, 손주를 가져본 적 없는 노부인이라도 어린 소녀를 보면 자연히 이런 감정이 심장에 고이는 걸까. 바다를 동경하는 사람이 바닷가에 살지 않는 사람뿐인 것처럼. 손 닿지 않는 존재에 대한경이로움과 채워지지 않는 감각을 향한 대상화. - P96

굳이 먹어보지 않아도 입안에 도는 감미, 아리도록 달콤하며 질척거리는 넥타의 냄새야말로 심장에 가둔 비밀의 본질이다. 우듬지 끝자락에 잘 띄지 않으나 어느새 새로 돋아난 속잎 같은 마음의. - P103

류의 유지를 받들어, 같은 생각은 해본 적 없었고 애당초 유지라는 게 있지도 않았으며 방욕업을 시작한 뒤로 삶은 언제나 현재진행형이 아닌 현재멈춤형이었다. 그녀는 앞날에 대해 어떤 기대도 소망도 없었으며 그저 살아 있기 때문에, 오늘도 눈을 떴기 때문에 연장을 잡았다. 그것으로 자신이 존재하는 이유를 확인하지않았고, 자신의 행동에 논거를 깔거나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살아남으려고 노력하지 않았고 일찍 죽기 위해 몸을 아무렇게나 던지지도 않았다. 오로지 맥박이 멈추지 않았다는 이유로 움직이는 것은 훌륭하게 부속이 조합된 기계의 속성이었다. 류를 가끔 떠올렸고 그가 생전에 주의를 준 사항들에 자주 이끌렸지만, 제 몸처럼 부리던 연장으로 인해 손바닥에 집힌 굳은살과도 같은 감각 외에는, 류를 생긱하면서 온몸이 뻐근하게 달뜨고 아파오는 일이 더 이상 없었다. 그녀는, 나이 들어가고 있었다. - P264

참으로 이상한 일이지. 하나의 존재에서 가장 큰 비중을차지하는 영혼이라는 게 빠져나갔는데도 육신이 더 무거워진다는 것은. - P292

사라진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이 농익은 과일이나 밤하늘에 쏘아올린불꽃처럼 부서져 사라지기 때문에 유달리 빛나는 순간을 한번쯤은 갖게 되는지도 모른다.
지금이야말로 주어진 모든 상실을 살아야 할 때.
그래서 아직은 류, 당신에게 갈 시간이 오지 않은 모양이야. - P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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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미 (애니메이션 더블 커버)
구병모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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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이지 않다는 것에 대해 많은 생각이 들게하는 소설. 곤에게 직접 말하진 못했지만 행복해 줬음 좋겠다… 살아줬음 좋겠다… 강하의 말이 계속 귓가에 맴도는것 같다..

다음에는 정말 이런 일이 있으려야 있을 수도 없겠지만, 또다시 물에 빠진다면 인어 왕자를 두 번 만나는 행운이란 없을 테니 열심히 두 팔을 휘저어 나갈 거예요. 헤엄쳐야지 별수 있나요. 어쩌면 세상은 그 자체로 바닥없는 물이기도 하고. - P21

꼽아보면 세상 어디에든 흔히 있는 일이었고, 그것이 한 사람에게 몰려 과부하가 걸리는 일도 그리 드물지 않았으며 한가지 불행은 연속되는 서로 다른 고통의 원인이나 빌미가 되기마련이었다. - P25

모두 어제가 되어 부질없어진 인물과 사건의 나열들. 그는 과거를 명시하는 글자들을 단지 할 일이 없어 무료함으로 죽지 않기 위해서만 내려다보았다. 그가 어제의 세계를 읽는 동안 실제 세계는 변화와 요동과 전복이 일어나고 있었지만 그와는 무관한 일이었다. 고인 물이나 응결된 얼음만큼의 비중을 간직하며 급속 냉각되어 빙산에 갇힌 의식만을 유지하고 살아갈, 꼭 그만큼의 열량만 있으면 되는 나날들. - P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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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집 2 - 11개의 평면도 ㅣ 우케쓰 이상한 시리즈
우케쓰 지음, 김은모 옮김 / 리드비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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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이야기들이 전부 연결된 사건이되는.. 참신한 구성의 소설… 재미있어서 단숨에 읽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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