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별한 실패 - 글쓰기의 좌절을 딛고 일어서는 힘
클라로 지음, 이세진 옮김 / 을유문화사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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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의 '실패'를 다루겠다는 야심 가득한 책을 받고 웃었다. 실패를 이야기하는 일에 실패하더라도, 결국 실패를 성공한 셈이 되기에 책이 도달하고자 하는 목적을 이룩했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아이러니에 빠져버릴 테니까. 실패를 실패하면 그건 성공일까? 모든 글쓰기는 실패다, 애초에 읽기부터가 실패할 수밖에 없으니까. 실패라는 단어를 하도 많이 읽었더니 실패가 실패 단어 그대로 이해되는 것조차 실패에 가까워진다. 그러니까 이 책이 결국 말하고자 하는 것은...


-68쪽, 우회. 들뢰즈가 항상 반복했던 것. 글쓰기는 에둘러 가고 비틀어 가고 리좀을 형성한다, 중간에서부터 사방으로 뻗어 나가며 자라는 식물처럼. 말은 내가 세상의 그 무엇을 전달한다는 착각을 일으킴으로써 나를 붙잡고 바람밖에 씹지 못하는 이 이빨들 중 하나로 전락시킨다. 글을 쓸때 늘 느끼는 실패감이 바로 여기서 온다.


클라로, 각별한 실패, 을유문화사


그래서 이 말은 무엇을 전달하는가? 아무것도, 혹은 모든 것을. 실패는 -와 같다, 로 끝없이 이어지는 상징과 은유의 목록, 갑자기 툭 튀어나오는 단편소설, 인용들, 맥락에서 벗어난 듯 책에 한 발 간신히 걸치고 선 파편들이 뒤섞인 이 책은 하나의 실패를 실패한다. 그래서 지금 나는 무엇을 쓰고 있는가? 아무것도, 혹은 이 책을 읽은 느낌의 모든 것을.


글쓰기는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다. 그 위대한 카프카도 끝내 자신의 장편을 완성시키지 못했다. 페소아는 원고 한 상자를 두고 떠났다. 우리는 당신에게 보내는 카톡 한 줄조차 완벽하게 나의 진심을 담아 보내는 데 실패한다. 이건 글쓰기의 필연이다. 글쓰기와 실패는 이음동의어의 관계다.


읽기부터 실패의 과정이다.


-202쪽, 실제로 읽는다고는 하지만 읽지 않을 때가 더러 있다. 꽁꽁 얼어붙은 호수의 표면 아래 형체들이 지나가는 것만 보는 기분이 들 때가 있지 않은가. 우리에게 잡하지 않는 것, 손아귀 사이로 빠져나가는 것, 시선을 벗어나는 것, 말했지만 아무것도 말하지 않은 듯한 것, 너무 눈부셔서 눈을 멀게 하는 것, 우리를 너무 바짝 끌어당긴 나머지 더 이상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 것, 부서지고 불완전해 보이는 것, 계속 흔들리기 때문에 우리가 만질 수 없는 것, 떨어지는 것, 붕괴되는 것. 그렇다, 의미는 결코 떡하니 주어지지 않는다. 의미는 때로 거부당하고 때로 부재한다. 그래도 우리는 여전히 페이지를 마주한다. 우리는 읽지 않을 수 없다. 이 책이 꾸는 꿈의 일부가 되고 싶으니까. 이 책의 비법들이 신비를 통해 살아남았으니까. 우리는 이해의 실패라는 성운에서부터 줄곧 호흡한다.


애초에 이 책을 읽고 쓰는 감상문부터 실패한다. 책을 읽으며 느낀 약간의 실망감과 그럼에도 소중히 주워담은 몇 개의 빛나는 조각들을 글에 온전히 담아낼 수 없기 때문에. 나는 이 책이 결국 실패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결국 성공적인 책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나 역시 이 책이 도모한 실패의 일부가 되고 싶으니까.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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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진공 & 상상된 위대함
스타니스와프 렘 지음, 정보라 옮김 / 현대문학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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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책의 날에 읽는 허구의 책에 대한 서평과 서문 모음, 책이라면 어떤 형태로든 다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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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인생만사 답사기 - 유홍준 잡문집
유홍준 지음 / 창비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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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쪽, 나의 글쓰기는 일반적인 산문 형식을 벗어난 '잡문'의 성격이 강하다. 이는 내가 젊은 시절에 루쉰의 잡문에서 받은 영향 때문이다. 내 또래와 내 선배들 세대에게 루쉰은 지식인의 표상이었다. 루쉰은 자신의 글을 잡문이라고 했고 [아침 꽃을 저녁에 줍다]등 루쉰 잡문집이 여러 형태로 나와 있다. 그러나 루쉰의 잡문이란 그냥 잡문이 아니라 일상사에서 시작해 사상의 담론에까지 이르는 글이다.

옛 문인들의 문집을 읽을 때도 나는 시, 논, 소, 차, 서, 서, 척독 등 정통적인 글쓰기보다도 대개 마지막에 실려 있는 잡저를 눈여겨보았다. 잡저에는 세상만사가 다 들어 있고 거기엔 인생이 녹아 있기 때문이다.

내가 '답사기'라고 해놓고 이 소리 저 소리 다 이야기하는 것에는 이런 잡저와 잡문의 정신이 들어 있는 것이었다. 이에 나의 산문집을 아예 '유홍준 잡문집 -나의 인생만사 답사기」라 이름 지었다.

유홍준 잡문집-나의 인생만사 답사기, 창비

서문에서 밝히는 대로 저자가 살아 온 인생만사가 다 들어있는 잡다한 글, 그런데 그 저자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의 저자 유홍준인, 저자의 이름만으로도 글의 완성도와 신뢰도가 보장된다는 건 크다. 기념비적인 교양 시리즈가 된 답사기의 역사적인 첫 권이 '남도답사 일번지'였고, 전라남도 장흥 출신인 아버지는 행복한 얼굴로 우리 가족을 차에 태워 고향으로 향했고, 아버지의 가방 안에는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1권이 당연하게 들어 있었다.

당시 초등학생이던 내 눈에도 재미있게 술술 읽혔던 답사기가 품고 있던 힘은 강력했다. 책에 부록으로 실린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이력서'를 읽고 나면 오랜만에 답사기를 다시 한 번 더 읽고 싶어진다. 일단 이 잡문집을 읽는다. 잡문집도 너무나 재미있다. 잡문집은 원래 재미있다. 한국의 봄꽃을 이야기하는 '꽃차례'나 바둑의 사례로 한미 FTA의 필요성을 역설한 글 '바둑 FTA', 아재 개그의 진수 '문화재청장의 관할 영역'은 재미있고, 답사 여적과 인연이 있었던 예술가를 이야기하는 챕터는 전체가 아름답다. 부록의 '좋은 글쓰기를 위한 15가지 조언'과 '나의 문장수업'은 수식어를 더 붙일 필요조차 없는 글이다. 글쓰기 조언은 전국의 학교 글쓰기 시간에 가르쳐야 한다. 이미 답사기가 교과서에 실려 있긴 하지만..

굴곡 많은 인생을 살았다고 해서 꼭 글을 잘 쓴다고 할 수는 없다. 서울대 재학 중 긴급조치 4호 위반으로 교도소에 복역하고, 출역 후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취업하고, 한국미술 평론가로 등단해 한국미술 강의 및 답사를 이끌다 제안을 받아 답사기를 쓰게 되고, 초대박 베스트셀러가 되고, 대학 교수가 되고, 문화재청장에 취임하고, 그 많은 일을 겪으면서 열심히 읽고 쓰고 답사하고 사람을 만나고 느끼고 강의하고 이 모든 일들을 다시 또 글로 남긴다. 그렇게 쓴 잡문이 또 너무 재미있다.

작가님은 친절하게 15가지 항목으로 좋은 글쓰기를 위한 조언을 조목조목 달아 주셨지만, 글재주 없는 형편없는 제자로서 '이 책 너무 재미있고 훌륭합니다!'를 최대한 늘린 게 이 글이라 송구합니다. 저는 다시 '남도답사 일번지' 읽으러 떠나봅니다 총총-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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딕테
차학경 지음, 김경년 옮김 / 문학사상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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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눈 폭설과 함께 도착한 전설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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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사슴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장편소설 문학동네 한국문학 전집 24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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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작가님의 모든 작품을 읽었다고 착각한 나의 오만을 반성하며, 1998년에 출간된 첫 장편소설 [검은 사슴]을 읽는다. 문학동네에서 2017년에 한국문학전집으로 판형과 장정을 바꾸어 새롭게 출간된 판본이다. 두껍고, 어둡고, 무겁고, 읽는 걸 멈출 수 없다.


첫 장편 속에 이미 [채식주의자]의 영혜가 의선이라는 이름으로 발아하고 있었다. 햇빛을 갈망하며 고기를 거부하고 상처입은 짐승 같은 식물적 인간의 모습. [작별하지 않는다]의 제주에 퍼붓던 눈보라가 여기서는 강원도 깊은 산골짝의 사라진 마을 어둔리에 쏟아지며 사라진 의선을 찾아 온 인영과 명윤을 어둠 속에 가둔다.


아주 어둡다. 인영이 필사적으로 찍고 다닌 검은 바다의 어둠, 의선이 필사적으로 도망치려 한 어둔리의 어둠, 사진가 장이 찍은 탄광의 어둠, 탄광 속에서 존재한다는 검은 사슴. 하늘을 보고 싶은 소망을 품었으나 햇빛이 닿는 순간 녹아버린다는 그 짐승은 인영에게, 명윤에게, 의선에게, 장에게 깃들어 있다.


외롭다. 서로 연결되기를 원하면서도 밀어내고 원망하고 그러다 조금씩 가까워지는, 인물의 외로움이 사무친다. 특히 인영의 외로움은 인영이라는 인물 그 자체로 굳어 단단한 캐릭터를 만들어 낸다. 그래서 오히려 한강 작가님의 이후 작품에 등장하는 여러 여성 인물 중 가장 마음이 가닿는 캐릭터가 되었다.


-424쪽, 빛 속에서도 나는 어둠 속에서 웅크리고 있는 것 같은 적막감을 느끼곤 했다. 어떤 외부의 빛도 맨살로 직접 느낄 수 없게 하는 어둠의 덩어리가 내 몸을 두꺼운 외투처럼 감싼 채 따라다니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오히려 캄캄한 방보다 밝은 대낮의 거리에서, 나를 결박하고 있는 어둠의 무게를 더욱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혼자 있을 때보다 여러 사람이 떠들썩하게 어울리는 자리에서 그 어둠은 더 가깝게 느껴졌다. 깊은 수심 어디쯤의 먹먹한 침묵 같은 어둠이 내 웃음을 봉하고 몸을 묶었다.


다 읽은 뒤 내가 어둔리의 어둠 속에, 폐광 깊은 곳에 갇힌 느낌이 든다. 검은 소설, 작가님의 [흰]과 극단에 있다고 표현할 수도 있을, 순도 높은 어둠의 문장들. 어둠 속에 잠긴 채 빛을 꿈꾸는 인영과 의선과 명윤과 사진과 장과 모든 등장인물들, 그리고 작품을 읽은 독자 역시, 어둠이 우리 몸을 묶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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