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
최승자 지음 / 난다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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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배고픔과 꿈 첫 장부터 세게 얻어맞고 어질어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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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희의 인간
크리스티앙 보뱅 지음, 이주현 옮김 / 1984Books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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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을 때 마침 창밖의 하늘은 파랑, 땅 아니 강도 파랑, 온통 파랑의 세계. 태양을 반사하는 수면의 윤슬과 같이 온통 반짝임으로 가득한 이 책은 느리게 읽을 수밖에 없다. 세상의 껍질을 벗겨내 삶의 광휘를 순간적으로 드러내는 펜촉의 빛은 황금빛. 그가 담고 싶었던 하늘의 푸르름이란 죽음의 어둠과 같은 푸른빛. 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후에도 읽을 수 있는 책을 쓰고 싶다(크리스티앙 보뱅, 환희의 인간, 81쪽) 작가 스스로 다짐하며 썼을 문장.


글쓰기란 넘을 수 없는 벽에 문을 그린 후, 그 문을 여는 것이다.

크리스티앙 보뱅, 환희의 인간


나는 페이지마다 하늘의 푸르름이 스며든 책만을 좋아합니다. 죽음의 어두움을 이미 경험한 푸름 말이에요. 나의 문장이 미소짓고 있다면, 바로 이러한 어둠에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나는 나를 한없이 끌어당기는 우울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며 살아왔습니다. 많은 대가를 치르고 나서야 이 미소를 얻었어요. 당신의 주머니에서 떨어진 금화와 같은 이 하늘의 푸르름을 나는 글을 쓰며 당신에게 돌려드리고 있답니다. 이 장엄한 푸름이 절망의 끝을 알려주며 당신의 눈시울을 붉게 만들 거예요. 무슨 말인지 아시겠지요?

같은 책, 서문


무엇을 보느냐에 따라 우리는 달라진다. 우리가 보는 그것이 우리 자신을 드러내고, 이름을, 진정한 자신의 이름을 드러낸다.

같은 책, 38쪽


단 한 편의 시라도 주머니에 있다면 우리는 죽음을 걸어서 건널 수 있다. 읽고, 쓰고,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우리를 구원하는 삼위일체다. 시는 불타는 돌들에 둘러싸인 침묵이며 세상은 별들에까지 이르는 차가움이다. 새벽 두 시, 여왕들은 죽고 나는 그들의 외침에 경탄한다. '항상 사랑하고, 항상 고통받으며, 항상 죽어가기를.' 세상은 이 외침에 깃든 영감을 알지 못한다. 삶의 등불을 켜주는 이는 죽은 자들이다.

같은 책, 84쪽


삶에서 갑자기 떠오르는 것이 우리 눈을 도려내고 그 자리에 황금빛 눈을 심는다. 눈을 뜨면 단 한 줄기 빛이 죽음의 모습과도 같았던 삶의 모습을 태워버린다.

같은 책, 104쪽


빛으로 가득한 이 책은 얇고 두꺼우며 가볍고 무거운데다 차가우면서 뜨겁다. 다 읽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아 처음부터 다시 읽었다. 한 번 더, 다시 한 번 또, 분명 열려 있다 생각했던 문은 굳게 닫히고 나는 필사적으로 그가 보여 준 것들의 흔적을 더듬거리며 기록한다. 환희의 인간이 남기는 것들은 순간적이고 영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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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마다 만우절
윤성희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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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복도는 이상할 정도로 서늘하다. 창밖 하늘은 새파랗고 구름은 하얗고 복도는 서늘하다. 시간강사로 일할 때 공강이면 수업 중인 교실 복도를 왕래하곤 했다. 교사들이 수업하는 소리, 학생들이 대답하고 떠드는 소리, 폭죽처럼 터지는 웃음소리를 들으며 서늘한 복도를 걸었다. 아직 한 권의 책도 내지 못한 무명의 소설가는 교사도 소설가도 그 무엇도 아닌 상태였고 때때로 늦은 밤 몰래 울었지만 학교 복도를 걸을 때만큼은 괜찮았다. 아마 학교에 깃든 어떤 힘에 위로받은 게 아닌가 생각한다. 아직 미래가 결정되지 않은, 가능성만을 가진 아이들이 가득 모여 있는 공간이 가진 힘.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위안.


<여름방학>의 병자 씨도 학교를 퇴직한 뒤 아무도 없는 복도를 걸어 다닌 기억을 그리워한다. 네 명의 오빠를 가진 그녀는 오빠들 때문에 병자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고 오빠들 때문에 결혼하려던 남자와 헤어져야 했다. <어제 꾼 꿈>의 애순 씨는 집 근처 유치원에서 열린 동시 발표 대회를 구경하며 울먹인다. 오빠가 죽은 뒤 원치 않는 결혼을 했던 그녀는 남편을 두 번 잃고 자신의 동생과 자식들과 돈 문제로 냉전 상태다. <어느 밤>의 덕선 씨는 남편이 없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면 밖으로 나가 훔친 킥보드를 타고 동요를 부른다. 운명에 갇혔다는 생각이 들 때 위안을 구하는 작은 몸짓들, 어떤 습관들, 얼음이 되어버린 나의 존재를 구원하려는 안간힘들.


귀여운 어나더커버


따뜻한 신발을 신고 동화 속 주인공을 상상하던 나는 뭐가 되었을까? 나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적절한 단어를 떠올려보았다. 딱히 생각나지 않았다. "나는, 음, 나는, 그냥 어른이 되었지." 나는 그렇게 말해보았다. 그리고 차에서 펜을 꺼내와 '내 자리'라고 쓰인 낙서 옆에 새 낙서를 했다. '그래, 니 자리.' 그러고 나자 그냥 어른이 된 나 자신이 그다지 실망스럽게 느껴지지 않았다. <여섯 번의 깁스>


나는 빨래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걸 보는 게 좋았다. 빨래가 흔들리면 그 주변의 어둠이 환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그걸 보고 있으면 잠시나마 착한 사람이 된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옥탑방으로 이사를 했다.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밤>


윤성희 작가님의 목소리는 담담하다. 차분한 목소리로 인간을 습격하는 피치 못할 운명에 대해 이야기한다. 운명은 갑자기 돌진하는 자동차의 형태로 덮쳐 오고(<여섯 번의 깁스><어제 꾼 꿈><네모난 꿈><눈꺼풀>), 암과 같은 질병의 모습으로 찾아올 때도 있고(<남은 기억>), 잘 안다고 생각했던 가까운 이의 이해할 수 없는 범죄 행각으로 인한 심적인 고통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여름방학><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밤><블랙홀><스위치>). 정류장에 앉아 버스를 기다리고 있을 뿐인 내게 자동차가 돌진할 수도 있다. 나의 엄마가 분노에 차서 마을 잔치 음식에 농약을 뿌리는 사건이 생길 수도 있다. 내게 다정하던 옆집 형이 교도소에 가고, 돈 문제로 가족들이 갈라서고, 장례식장에 가는 일이 잦아진다.


형은 주기율표 외우는 걸 좋아했는데, 화가 날 때마다 그걸 중얼거리면 마음이 차분해진다고 했다. 형이 구속된 뒤에 나는 주기율표를 프린트해서 벽에 붙여놓았다. 왜 그랬을까? 그런 의문이 들 때마다 그걸 들여다보았다.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밤>


예측할 수 없고 피할 수 없는 운명 앞에서 우리는 얼어붙는다. 킥보드를 타다 넘어진 그녀는 몸을 일으킬 수 없다(<어느 밤>). 정류장을 덮친 자동차에 치인 나는 혼수상태에 빠져 의식은 있는데 눈꺼풀 하나 움직일 수가 없다(<눈꺼풀>). <여섯 번의 깁스>처럼 깁스를 하거나 <블랙홀>처럼 돌아가신 아버지와 구속된 어머니가 남긴 시골집을 정리하러 찾았다가 일주일 넘게 나오지 못한다. 몸이 굳어서, 다치고 아프고 힘들고 슬프고 어떻게 해도 이 상태를 벗어날 수가 없다는 절망감 앞에서 우리는 얼음이 된다. 어떻게 해도 눈꺼풀 하나 움직일 수가 없는데, 더 이상 뭘 할 수 있죠?




<여름방학>의 병자 씨는 이름을 바꿀 결심을 하고 퇴직 이후의 삶을 '여름방학'이라 명명한다. 그리고 아파트 정문 옆 공원 분수대에서 물놀이를 한다. '여름방학 때는 누구나 물놀이를 하는 법이니까.' <남은 기억>의 나는 아이들에게 명치를 가리키며 물총을 쏴달라 부탁한다. 얼어붙은 가슴을 녹여야 하니까. 조카손녀를 따라 놀이터와 학교 운동장에서 재료를 모아 마녀 수프를 만들고(<어제 꾼 꿈>) 아빠와 나란히 누워 정말 좋았던 삶의 순간을 떠올린다(<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밤>). 서로에게 무해한 거짓말을 하며 웃는 어느 가족의 하루(<날마다 만우절>), 음식을 나눠 먹고 술을 마시고 이야기를 하며 나는 너에게 땡을 외치고 너는 다시 나의 땡을 외치며 웃는다.


딸이 땡을 해주길 기다리면서 나는 종일 소파에 앉아 있었다. 저녁이 되었고 그제야 딸이 내 손을 잡으면서 땡 하고 말했다. 나는 화장실에 가서 시원하게 오줌을 누었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아, 가끔 얼음이 되어야겠다고. 나는 청년에게 지금은 술래를 피해 얼음이 된 거라고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곧 누군가 땡 하고 외쳐줄 거라고, 얼음땡 놀이란 그런 거라고. 누군가 땡 하고 말해줘야 집에 갈 수 있는 거라고. 그러자 청년이 웃었다. 흐흐흐, 그렇게 웃었다. 조금 있으면 구급대원이 도착할 거예요. 그러면 제가 땡이라고 말해줄게요. <어느 밤>


완벽히 이해할 수 없어도, 가끔 내게 상처를 입혀도, 그게 싫어 도망치고 싶어도 얼음땡 놀이는 혼자서 할 수 없고 누군가 나의 얼음을 풀어줄 것이다. 같이 가서 내 남편 돈 떼먹은 사기꾼에게 욕도 하고, 같은 장례식장에서 우연히 만나 수육에 소주를 마시고, 가마솥에 백숙을 끓여 옆집 할머니 담금주를 몰래 훔쳐 나눠마시며 가장 그럴듯한 거짓말을 나눈다. 그렇게 영영 꼼짝도 안 할 것 같은 눈꺼풀을 조금씩 들어 올린다. 땡! 이제 집에 갈 수 있어요.


이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올릴 수만 있다면 앞으로 뭐든지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나는 역도 선수가 되는 상상을 했다. 내 역기는 봉 양쪽에 동그란 눈꺼풀이 달려 있다. 십 킬로그램짜리 눈꺼풀이. 나는 역도 선수다. 나는 국가대표다. 나는 대회 결승전에 진출했다. 결승전 경기에 나선 나는 0부터 9까지 천천히 숫자를 세면서 심호흡을 한다. 그리고 숨을 멈추고 온 힘을 다해 역기를 든다. <눈꺼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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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 망다랭 2
시몬 드 보부아르 지음, 이송이 옮김 / 현암사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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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1권 286쪽, 그러나, 사실 그에게 인생은 그 자체로 충분하지 않았다. 자신이 완전히 살아 있다고 느끼기 위해서는 글을 써야만 했다. 결국 아쉽지만 어쩔 수 없어. 어쨌든 모든 과거를 다 보존할 수는 없으니까. 중요한 건 오늘 그가 자신에 대해 무엇을 말해야 하는지를 아는 것이었다. '나는 어디쯤에 있지? 내가 원하는 건 뭐지?' 우스운 일이야. 그토록 자신을 표현하려 한다는 건, 결국 자신이 특별하다고 느끼기 때문이겠지. 하지만 어떤 점에서 특별한지조차 말할 수 없잖아.

시몬 드 보부아르 [레 망다랭] (강조는 인용자)

시몬 드 보부아르의 소설은 처음 읽었다. 페미니즘 고전 [제 2의 성]과 사르트르와의 계약 결혼 정도의 얕은 배경 지식을 갖고 천 페이지가 넘는 소설을 한 달 넘게 읽었다. 1944년 말 2차 세계대전 중 프랑스가 해방되는 시기부터 시작되는 소설은 3인칭 '앙리'의 시점과 1인칭 '안'의 시점이 교차되며 전개된다.

앙리가 주인공인 장에선 당대 프랑스 지식인들의 이념 싸움이 생생하게 묘사된다. 해방 이후 우파는 미국을 옹호하고 좌파는 소련을 이상화하며 각자의 언론 매체에서 서로를 공격한다. 소련의 공산주의를 이상향으로 생각한 지식인들이 소련 강제수용소 뉴스에 혼란스러워하며 사람들을 강제로 가두고 죽인다는 명백한 증거 앞에서도 어떻게든 이를 정당화하는 모습이 소름끼친다. 앙리를 중심으로 자신의 자아를 세계와 일치시켜 '내가 세상을 구원해야 한다'는 도취감에 취한 당시 지식인들 묘사가 흥미로웠다.

안이 주인공인 장은 나이 든 육체 속에서 괴로워하며 갈등하다 정신분석 강연 초청을 받아 떠난 미국에서 젊은 작가 루이스 브로건을 만나 사랑에 빠지는 심리 묘사가 이어진다. 안은 '내 머리는 산 채로 내 뼈와 같은 색깔을 갖게 되겠지'(1권 157쪽) 라 독백하며 다시는 사랑에 빠지지 못하리라 좌절하다 우연히 만난 미국 남성과 불같은 사랑에 빠진다. 사랑에 빠져들고 서로 사랑하다 상대의 사랑이 먼저 식고 그 앞에서 괴로워하다 이별하는 일련의 심리가 굉장했다.

앙리도, 안도, 안의 남편 뒤브레유와 딸 나딘도, 소설 속 등장인물 모두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내고 그걸 이루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신문사를 사수하는 앙리의 투쟁과 자신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 스스로를 진단하는 안의 싸움은 처절하다. 사랑하는 연인을 잃고 스스로를 학대하는 나딘의 악의, 천재 지식인이지만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 움직이지 않는 세계 앞에서 실패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뒤브레유, 대독 협력자를 테러하며 살아가는 뱅상, 앙리와의 사랑에 모든 것을 건 폴, 다들 스스로의 존재 가치를 찾기 위해 처절하게 애쓴다. 이 전쟁에서 왜 내가 살아남아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알기 위해.


-1권 53쪽, 그들을 잊도록 하자. 우리끼리 남아 있자. 우리 인생만으로 할 일이 이미 충분히 많아. 죽은 자들은 죽은 자들이야. 그들에게는 아무 문제가 없잖아. 그러나 축제의 밤이 끝난 뒤, 살아 있는 우리는 다시 깨어날 것이다. 그러면 그때부터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지?


소설의 결말에서 남성인 앙리는 포기했던 정치적인 글쓰기를 다시 시작하기로 결심하고, 여성인 나딘은 앙리와의 아이를 키우는 것으로 마무리되어 묘한 느낌을 준다. 남자는 세계를, 여자는 사랑을 선택하는 고리타분한 결말이 소설에서 말하고자 한 것인가? 그 끝에 짧게 덧붙는 안의 목소리가 그것만이 다가 아니라 말한다.

앙리의 성공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경력을 포기하고 삶을 바쳤다는 폴은 사랑에 의해 몰락한다. 친구인 폴을 달래며 그 역시 사랑에 의해 죽음 직전까지 간 안은 폴과 다른 선택을 한다. '오로지 사랑을 위해서만 산다는 건 상상할 수도 없어.'(2권 423쪽) 이전 시대 소설 속에서 여성이 선택할 수 있는 건 사랑뿐이었다. 남자의 사랑을 받아들이느냐, 거부하고 죽느냐. 작가 보부아르가 투영된 주인공 안은 새로운 길을 택한다. 사랑만으로 살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이대로 죽을 수 없다는 것을 확실히 한다.


-소설의 마지막, 사람이 무관심에 빠지지 않으면, 지상은 다시 정착할 만한 곳이 되기 마련이야. 나는 무관심에 빠지지 않았어. 내 심장은 계속 뛰고 있으니까. 무언가를 위해, 누군가를 위해 뛰어야 해. 나는 귀머거리가 아니니 다시 나를 부르는 소리를 듣게 될 거야. 누가 알겠어? 언젠가는 내가 다시 행복해질 수 있을지. 정말 누가 알겠어?

살아있는 한 우리는 행복해질 것이다.

뻔한 말 같지만 우리를 달랠 수 있는 이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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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니스와프 렘 - 미래학 학회 외 14편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40
스타니스와프 렘 지음, 이지원 외 옮김 / 현대문학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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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어난 SF소설은 뇌가 먹는 박하사탕 같다.

머리속이 뻥 뚫리면서 시원해지는 느낌을 준다.

관성화된 일상이 새롭게 보이고 세계를 재창조한다.

가령 <앨리스타 웨인라이트의 [존재주식회사]>같은 단편, 존재하지 않는 책의 서평 형식으로 쓰인 이 소설은 삶의 형태를 구입할 수 있는 회사 '존재주식회사'를 묘사하는데, 엄격한 판사가 되어 사형을 구형하고자 하는 사람이 프로그램을 사면 회사의 직원들이 물밀작업으로 알맞은 타이밍에 극악무도한 범죄자가 체포되어 판사 앞에 당도할 수 있도록 돕는데, 이런 일을 하는 회사가 두 개 더 있고 인간의 모든 삶이 세 개 회사가 프로그래밍한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결말로 나아간다는 소설을 소개하는 소설이다. 재미있다!

똑똑한 세탁기 생산 경쟁에서 시작되는 <세탁기의 비극>이나 시를 쓰는 기계를 만들었다가 벌어지는 이야기 <첫 번째 여행 A, 트루를의 음유시인 기계>, 인간 신체를 자유롭게 조작 가능한 자가진화공학이 발달하면서 생겨나는 온갖 인간 형태의 묘사가 이어지는 <스물한 번째 여행> 등 아주 재미있고 읽기 어려우며 또 술술 넘어가는 작품들이 가득하다.

스타니스와프 렘의 가장 유명한 작품이라면 타르코프스키 영화로 만들어진 [솔라리스]일 것이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그의 개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작품으로 나는 <미래학 학회>를 뽑겠다. 코스타리카 힐튼 호텔에서 개최된 미래학 학회에 참석했다가 전쟁에 휘말린 이욘 티히는 냉동되었다가 2039년에 해동되어 '정신화학'이 문명화된 미래를 경험한다. 책도 약으로 복용하면 머릿속에 즉각 모든 내용이 흡수되는 세상은 모두가 행복하고 유쾌해 보인다. [멋진 신세계]의 소마 같은 약의 진실은 2098년 100조에 가까운 인류로 터져나갈 것 같은 지구에서 거의 모든 자원이 소진되고 절망에 찰 인간들에게 지상 낙원에 살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실제로는 걷고 있지만 약을 통해 멋진 자동차를 운전하고 있다는 환상에 빠져들도록 정신을 조종하는 세계는 진정한 낙원인가?

그런 미래는 터무니없다. 그렇다고 불가능하다고 볼 순 없다. 이미 진행 중인 미래일 수도 있다. 비밀리에 실험 중인 제약 회사가 불의의 사고로 사랑의 감정을 전부 제거하는 약을 전 세계에 누출시킨다면(<사이먼 메릴의 [섹스플로전]>에서 상상한 세계와 같이), 성적 욕망이 사라져 인구가 급감하고 멸종 위기에 처하는 미래가 올 수도 있다. SF는 소설을 통해 수많은 미래를 상상한다. 미래학 학회가 개최된다면 SF작가들이 연단을 꽉 채울 것이다. 그곳에서 인공지능의 창조주로서 신의 존재에 대해 토론하거나 로봇에게 부여된 프로그래밍과 인간에게 주어진 운명의 상관관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것이다. 재미있겠다!

인간은 자기가 이해할 수 있는 것만을 지배할 수 있고, 이해한다는 것은 언어로 나타낼 수 있는 것만을 이해할 수 있는 법이지요.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은 이해의 영역에 속하지 않는 것이니까. 언어가 앞으로 어떻게 진화될지를 연구한다면 언젠가는 나타날 모든 발명과 변화, 관습의 진화에까지 다다를 수 있어요. 언어는 언젠가 이 모든 것을 반영할 테니 말입니다.

스타니스와프 렘 <미래학 학회> 중에서


인간은 자기가 이해할 수 있는 것만을 지배할 수 있고, 이해한다는 것은 언어로 나타낼 수 있는 것만을 이해할 수 있는 법이지요.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은 이해의 영역에 속하지 않는 것이니까. 언어가 앞으로 어떻게 진화될지를 연구한다면 언젠가는 나타날 모든 발명과 변화, 관습의 진화에까지 다다를 수 있어요. 언어는 언젠가 이 모든 것을 반영할 테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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